진해현 읍성4 읍성(邑城)



진해현은 조선 태종13년에 개현이 됩니다. 이전에 현 마산시 진동면 고현리에 있었던 우산현의 읍치기능을 현 진동면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옮겨오면서 진해현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해동지도에서 본 진해현성의 모습으로 위 광여도와 달리 성문은 3개(동,서,남문) 성곽에는 여장을 그려 놓았으며 읍성안에는 객사와 아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해동지도가 그려지는 시기는 1750년대 초라고 합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광여도에서 본 진해현성의 모습으로 읍성은 둥글게 조성이 되어 있으며 성문은 1개가 있으며 읍성안에는 좌측으로 창(서창,동창등으로 사용하는 창고) 아사(동헌,내아) 객사가 보이며 우측에는 봉수대가 보이는데 봉수대는 가을포봉수대입니다. 광여도의 경우 1800년대(정확한 시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19세기 초반) 아사의 위치가 위 해동지도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공이 잘못 그렸는지 아니면 아사가 위치를 옮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1872년 지방지에 실린 진해현성의 모습으로 위 두 지도에 비해 조금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객사가 가장 가운데 있으며 객사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남문이고 객사좌측이 동문 객사우측이 서문이며 동헌의 경우 객사에서 서측방향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객사 앞에는 외삼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주요 도로를 보면 객사에서 남측으로 내려온 남문이 가장 큰 도로임을 알 수 있고 남문가 동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읍성 밖을 보면 동측과 서측에 숲이 조성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남원읍성과 광양읍성, 상주읍성의 경우 읍성 밖 숲을 조성하였는데 숲은 풍수지리에 따라 음과 양의 기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비보림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진해읍성 동과 서측에 있는 숲 또한 풍수지리적 성격을 뛴 비보림입니다. 아래쪽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진해동헌의 경우 현재 진동면 사무소 내에 있는데 진해동헌의 안내판에는 진해동헌은 순조 32년(1832년)에 진해현감 이령모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 이전에는 동헌이 없었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진해현의 경우 고려 공민왕때 현으로 승격되고 조선개국과 함께 진해현의 기능을 했기 때문에 동헌의 경우 조선 초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해동지도(1750년대에)에서는 아사가 표시되어져 있고 광여도(1800년대)에도 아사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동헌이 분명히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해동지도와 광여도, 지방지를 기준으로 봐서 처음에는 서측에 동헌을 건축하고 19세기 초반 서에서 동으로 동헌을 옮기고 1832년에 지금의 동헌자리에 진해현감 이령모가 건립하였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동헌이란 동쪽에 있다고 동헌인데 진해현은 서측에 있으니 서헌인가? 아니고 모두 동헌이라는 고유명사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건립 당시 함께 지어진 건물은 형방소, 이령청, 삼문, 착사, 마방 등이었다고 합니다.
▼ 조선의 수도인 한성의 경북궁을 설할 때에도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건설한 것처럼 각 지역의 읍치 또한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건설하였습니다. 보통 읍성의 경우 각종 관아들을 주산을 중심으로 남으로 배치하고 때에 따라서 동서로 배치를 하는 것에 비해 진해현의 경우 주산인 취산을 중심으로 동남방향으로 배치를 하였습니다.
▼ 명당도의 기준으로 진해읍성을 보면 주산인 취산으로 남측방향으로 좌측인 옥녀봉의 줄기인 외청룡과 우측인 인성산의 줄기인 외백호가 감싸고 있으며 내수구인 태봉천과 진동천이 좌우로 흐르고 있으나 내청룡과 내백호가 없어서 명당으로 하기가 곤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내청룡과 내백호를 대신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1872년 지방지에 나온 진해읍성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은 비보림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내청룡과 내백호가 진해읍성 좌우에 들어서게 되고 명당 옆에는 해자를 파서 좌우로 물이 흐르게 하여 명당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 내수구인 태봉천과 진동천이 만나서 바다로 흘러가는 지점에 산이 있는데 고려시대때 현이었던 우산이다. 이 우산이 풍수에서 안산의 기능을 하여 명당으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그럼 진해읍성은 어떤 모습이며 읍성 안에는 어떤 건물들이 있었으며 건물의 기능은 무엇이며 누가 있었을까요?
먼저 진해읍성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진해현 읍성의 기록 중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성의둘레는 1.325척 4촌이며, 시설물로는 높이 3척의 여장과 적대 6개소, 문이 3개소, 옹성이 2개소, 여장382개소, 우물이 2개 있었다고 합니다. 아래에 나오는 지적도와 성곽, 해자의 모양은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만든 것입니다.(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지적도와 고지도를 기준으로 재구성하여 진해현성(진해읍성)의 성곽도를 올려봅니다. 파랑색으로 된 부분이 읍성의 성곽으로 진해읍성의 경우 직사각형으로 된 평지읍성이고 2개의 옹성이 있는데 고지도에서 주 도로인 남,동측에 옹성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치의 경우 성곽의 각이진 곳에 배치를 하고 서측성벽이 동측성벽보다 더 길어서 그곳에 치성을 배치하였습니다. 파랑색으로 적힌 부분은 현재 잔존하는 관아지와 건물의 모습이고 빨강색으로 적힌 부분은 제가 추정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빨강색으로 적힌 부분은 틀릴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먼저 삼진중학교 운동장부분이 구. 동헌의 자리가 아닌가 추측을 합니다. 이유는 해동지도와 광여도에서 나오는 아사의 위치 때문입니다. 아사 즉 동헌이 한차례 옮기게 되는데 그 장소가 삼진중학교 운동장으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삼진중학교 운동장에 있는 오래된 나무입니다. 그 이유에 관하여는 아래에 동헌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 진해읍성 동헌을 들어가기 전 먼저 만나는 것이 유허비 또는 선정비, 공덕비인데 16개가 있습니다. 위 그림지도에도 표시를 하였지만 선정비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해읍성이 무너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올 확률이 높습니다. 원래 선정비의 경우 성문 밖에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동안 정치를 잘하여 백성들이 떠나가는 현감의 뜻을 기리는 선정비입니다. 꼭 정치를 잘한 수령에게 주는 것은 아니고 반 강제적으로 진행한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선정비를 위한 모든 세 부담은 백성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선정비가 그리 반갑지 아니하였죠. 그래서 백성들은 들어 내놓고 말은 하지 못하니까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전북 고창군 무장읍성을 가보면 선정비가 있는데 선정비의 하단의 거북이 머리가 고개를 돌리고 웃고 있는 표정의 선정비들이 있다. 이는 선정비에 대한 불만을 석공이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또 어사가 출두한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선정비의 글자를 진흙으로 채우기도 하였는데 지나가는 어사가 고을을 잘 다스리는 수령가 많다는 오해를 할까봐 진흙으로 채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진해읍성에 있었던 선정비들은 정치를 잘한 수령에게 백성들이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을까요? 그 부분은 잘모르겠네요. 진해현감중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 사상의학을 주장하신 이재마 이십니다. 1888년 부임했다고 합니다. 또 안중근의사의 할아버지이신 안인수님이 진해현 현감을 지냈다고 합니다.  
▼ 선정비를 보고 동헌을 들어가기 위해 만나는 문이 사주문이다. 여기서부터 의아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사주문과 동헌은 바로 일직선상으로 있는데 동헌 앞에 있는 문의 경우 대부분이 내삼문이다. 내삼문은 동헌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곳에 문지기가 항상 있었습니다. 내삼문 앞에 외삼문이 있고 외삼문 앞에 홍살문이 있는데 진해읍성이 무너지면서 홍살문과 외삼문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지만 내삼문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사주문이 있습니다.

사주문은 보통 동헌과 내아사이에 난 자그마한 협문을 가르키는데 사주문이 동헌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내삼문의 경우 솟을 대문을 사용하여 육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주문과는 크기와 높이에서 차이가 납니다. 미루어 보건데 사주문의 경우 후세에 복원을 했거나 내아에 있었던 사주문을 이곳으로 옮겨왔을 확률이 높습니다.

참고로 홍살문울 지나면 나타나는 것이 외삼문인데 외삼문의 경우 가운데 문은 수령이나 중앙의 높으신 분들이 다니고 좌측문은 양반이나 육방,사령들이 다니고 우측문은 백성들이 다니는 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문을 통과하는데도 신분에 따라서 틀리게 출입을 하였던 것입니다.
▼ 아무튼 사주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것이 동헌입니다. 동헌은 읍성의 가장 행정의 중심이고 수령의 집무처입니다. 이곳에서는 행정을 펼치고 소송, 재판 등을 진행합니다. 수령의 경우 부임을 하면 1,800일(5년)을 근무하는데 이때에는 가족을 데리고 오는 경우이고 가족을 데려오지 않는 경우 900일이었다고 합니다. 진해동헌의 안내판을 보면 "정면 7칸, 측면 3칸의 일자형 평면이며 양측 1칸의 방과 중앙에 우물마루를 편 대청을 두었다. 건물의 형태는 팔작지붕목조와가이다. 그러나 마루 기둥 중 일부 각주를 사용한 것이 보이는 바 이는 뒷날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정면 7칸은 기둥이 7개라는 것이며 측면 3칸은 측면에서 보았을 때 기둥이 3개라는 뜻입니다. 양측1칸의 방이란 좌,우1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고 동측의 방을 상방이라고 하고 서측의 방을 협방이라고 하는데 수령은 상방에서 근무를 하고 협방의 경우 통인이나 급창이 근무하는 곳입니다. 이는 동쪽 방위각이 서쪽방위각 보다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측에 있는 방은 잠을 잘 수 는 있지만 수령은 이곳에서 잠을 자지 않고 내아로 가서 잠을 잤습니다. “중앙에 우물마루를 편 대청을 두었다“라는 말은 대청마루의 모양이 세로 방향에 짧은 널을 깔고 가로 방향에 긴 널을 깔아서 ‘井’ 자 모양으로 짠 마루를 가르킵니다. 팔작지붕목조와가란 ”한문의 八자 모양으로 된 목조건물이고 지붕이 기와로 되어져있다“ 라는 뜻입니다.
▼ 동헌의 경우 사법권을 집행하는 장소로 법정입니다. 수령의 경우 대청마루에 의자에 앉아있고 수령 옆에는 통인이나 서리가 앉습니다. 대청마루와 뜰 사이에 있는 돌로 된 부분을 섬돌이라고 하는데(몇 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공간) 여기에 급창과 비장이 서있는 장소입니다. 뜰에는 협의자들이 끓어 엎드려 있으며 형리와 사령들이 서있습니다. 통인이란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나이가 어립니다. 서리는 기록을 적는 사람이고 급창은 수령이 명을 내리면 복창하는 사람이고 비장은 수령의 비서입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노거수는 동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필자가 위에 삼진중학교에 있는 노거수를 근거로 구.동헌이 있었다고 추정을 하였는데 이는 동헌에서 반드시는 아니지만 노거수를 심습니다. 이는 노거수가 재판에 빠짐없이 입회하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삼진중학교에 있는 노거수를 근거로 그 지역이 구 동헌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동헌을 보면 현판이 있는데 동헌이라고 적혀있다. 필자가 볼 때 잘못 적혀있을 확률이 많다. 우리가 모두 이름이 다른 것과 같이 동헌이나 객사를 부를 때 사용하는 명칭이 당호인데 지방마다 이 당호를 부르는 이름이 달랐습니다. 무장읍성 동헌의 경우 취백당, 고창읍성의 경우 평근당, 낙안읍성의 경우 사무당이라고 불립니다. 이외 많은 곳에서 동헌의 당호를 따로 정해 불리었는데 진해읍성의 경우 그냥 동헌이라고 적혀있네요. 진해읍성의 동헌이 무엇으로 불렀을까요? 동헌의 당호는 화류헌(化流軒)이라고 합니다.
▼ 동헌인 화류헌(化流軒) 서측편에 진동면사무소가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그곳에 내아가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동헌과 내아는 보통 옆에 있고 아주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이고 일제강점기때 내아를 허물고 그곳에 관공서를 세웠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해방이 된 후 면사무소가 들어섰을 것으로 보입니다. 동헌과 내아의 경우 담장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업무공간과 주거공간의 분리를 위해 했을 것으로 보이고 동헌에서 내아로 출입할 수 있는 작은 문이 있는데 협문이라고 부릅니다. 그 협문을 만들 때 네 개의 기둥으로 만든 것이 사주문이라고 하는데 동헌 입구에 있는 사주문이 있어야할 곳은 동헌과 내아 사이의 협문으로 생각이 드는데 왜 동헌입구에 있을까요?

화류헌(化流軒) 뒤편에 보이는 곳에는 현재 창고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책방 즉 책실로 추정이 됩니다. 책실은 수령의 자제가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책실의 경우 동헌과 내아와 함께 같은 공간에 배치를 많이 했음으로 추정을 합니다. 동헌은 1981년9월, 1982년7월 보수하였다고 하네요.
▼ 진해현 객사는 우산관인데 우산관의 내력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진동만의 중심은 고현리에 있는 우산현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명 중 고현이라는 지명이 많이 있는데 거제의 고현, 하동의 고현, 거제의 고현, 수원의 고현, 익산의 고현, 마산의 고현 등은 예전에 현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함으로 한자로 古縣을 사용합니다.

우산현에서 진해현으로 장소와 지명이 옮겨지면서 예전의 명칭을 가져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이런 추측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산에서 아직 우산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진동면 고현리에 있는 우산초등학교입니다. 우산초등학교 뒷산이 우산인데 객사에서 바라봤을 때 보이는 산이 우산이라 객사의 명칭을 우산관이라고 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함양읍성의 남문인 망악루의 경우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우산관 또한 우산이 바라보인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 객사인 우산관의 경우 남문에서 출발하여 북측 방향으로 걸어오면 가장 처음 만나는 관아 건물지이며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 객사이다. 객사는 임금의 권한을 상징하는 건물로 왕의 사당이며 각 읍치마다 있었다. 주관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대소관헌이 모여 대궐을 향하여 배례하던 곳입니다. 이러한 것을 망궐례라고 부릅니다. 익헌은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주관보다 지붕을 낮게 하여 격식을 갖춘 것이 객사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객사의 경우 임금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곳이자 관리들의 숙소기능 두 가지를 하는 곳입니다. (아래 사진은 진동초등학교 100년 발자취에서 가져왔습니다.)
객사건물의 형태를 보면 한 개의 건물이지만 세 개의 건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가운데 높게 솟은 곳을 주관이라고 하고 좌우에 있는 곳은 익헌이라고 하는데 사신이나 파견된 관리들이 묵었습니다. 동측 익헌에는 문신이 서측 익헌에는 무신이 사용하였는데 동측 방위가 서측 방위보다 높게 생각한데에서 있습니다. 진해현 객사인 우산관의 경우 1985년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현재는 삼진중학교에 주춧돌만 남아있습니다. 우산관의 경우 정면 11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낙안읍성의 객사인 낙안지관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보입니다. 객사에서 남측방향을 보면 기단이 있었을 것이고 기단에서 객사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진해현 객사인 우산관이 있었던 곳 앞에는 현재 삼진중학교 교실로 사용 중인데 이곳은 객사 앞으로 내삼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이 됩니다. 객사 또한 내삼문과 외삼문, 홍살문이 있는데 이렇게 문이 3개로 사용했던 곳은 동헌과 객사, 향교입니다. 객사의 경우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중삼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해현 객사의 수난을 보면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전국에 있는 많은 객사와 읍성들이 수난을 당하는데 어떤 곳은 일본 헌병들이 객사를 장악한 후 전패(殿牌)를 불태워 땅에 묻어 버렸기도 하였고 객사를 허물고 각종 관공서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진해현 객사인 우산관의 경우 다행히 객사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면했는데 진동초등학교의 교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진동초등학교가 이전을 하고 삼진중학교가 개교를 합니다. 이때 객사는 삼진중학교 건물로 사용되다가 1985년 화재로 유실되어 버립니다
▼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사령청 옆에 있는 진동노인회관을 주목해야 하는데 이곳이 조선시대 향청의 건물입니다. 향청의 경우 동서로 건물이 되어있는 곳으로 보여집니다. 향청의 경우 양반들의 친목단체인 향사당에서 출발하여 수령을 보좌하는 자치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향청의 우두머리를 좌수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향청에서 세금을 매기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수령을 감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진해현읍성 내에 있어야 할 것 중 하나가 질청인데 작청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진해현읍성 내에서는 보이지가 않던데 아마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들며 동헌 앞 마방 앞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질청의 경우 아전들이 머물던 곳으로 이방과 함께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들이 근무하던 곳으로 수령의 경우 그 지역사람이 아니고 잘해야 1800일 정도 있다가 가는 것에 비해 아전들이 대대로 살아오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서 실질적인 힘은 질청에서 출발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질청에서는 수많은 관아문서를 작성하며 무리한 세금을 거두기도 합니다. 아전이란 지방관아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로 무보수로 근무하는데 여러 가지 항목들을 부쳐서 백성들에게 뒷돈을 받아서 생활 하였습니다. 아전이란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 6전 체제이며 우리가 TV 사극에서 보면 이방 또는 형방하는 사람들이 아전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전이라 불리지만 이 육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아전들입니다.

읍성 안에 또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연못 즉 못인데 연못은 화재가 났을 경우 소화수로 사용하기 위함인데 고지도에서는 보이지가 않네요. 또 필요한 것이 형옥 즉 감옥인데 옥이라 부릅니다. 옥의 경우 담장을 두르고 남녀를 구분하여 만들었는데 공간이 있다 보니 구석진 곳에 만들었는데 고지도에선 보이지가 않네요.
▼ 현재 남아있는 건물을 보면 먼저 사령청이 있는데 사령청의 경우 군령을 출입하고, 형방소의 경우 형방이 근무하는 곳이며, 마방의 경우 말을 관리하는 마굿간이다.  (아래 사진은 사령청 건물) 
▼ 그밖에 관노비가 있는 관노청, 회계업무를 보는 관청, 현을 지키는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이나 병방과 군교들이 군무를 보는 장청, 호적을 매기고 기생을 관리하는 호방청, 심부름꾼들의 대기소인 통인청, 군기청, 포수청. 기생들이 거주하는 교방, 훈련청, 민원대기실인 헐소 등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창고도 포함되겠죠. (아래 사진은 마방의 모습입니다.)
▼ 객사인 우산관에서 남측으로 내려오면 남문이 나오는데 남문은 진해읍성의 주 출입문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고 수령이 행차시 사용했습니다. 이곳에 장이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나라 읍성의 대부분이 남문을 중심으로 장이 있습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 북문, 서문, 동문을 중심으로 장이 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해읍성의 경우 남문을 중심으로 장이 섰고 1872년 지방지에 보면 10일마다 장이 열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장의 영향을 받아 현재 남문을 중심으로 진동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서측도로입니다.) 
▼ 이제 성곽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문 중 가장 중심인 진남문을 보겠습니다. 진남문의 경우 우리나라 읍성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명칭인데 진해 웅천읍성, 창원읍성, 광주읍성, 해미읍성 등에서 사용되어 지는데 여기서 鎭南問의 鎭을 보면 진압할 진자입니다. 군사상 필요한 곳에 설치를 하는 진보성의 진자도 鎭를 사용함으로 진해읍성의 군사들이 진출입을 사용할 때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령청의 모습) 
▼ 진해현성의 남측성곽에서 해자가 있는 곳까지 거리를 측정하니 대략 33미터가 나오고 옹성지점에서 해자까지는 18미터 정도 됩니다. (물론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서 정확한 거리는 나오지 않고 추정을 한 것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동측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26미터 체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18미터, 북측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도 대략 18미터가 나옵니다.
따라서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16~20미터 사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거제 고현성 해자 발굴시 옹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5.1미터였다고 하고 웅천읍성의 경우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7.8~7.9미터였다고 합니다.

거제고현읍성과 웅천읍성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와 다음지도에서 측정한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를 토대로 진해읍성의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를 추정을 한다면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10미터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해자의 폭을 보면 북측해자의 경우 5미터, 동,남측 해자의 경우 3미터로 측정되는 골목의 기준으로 본다면 3~4미터 사이로 보여집니다. 해자의 높이의 경우 보통 읍성에서 사용되는 2~3미터 정도로 추정이 됩니다, 해자의 기능을 보면 평상시 해자에 물이 흐르고 해자 안에는 뾰족한 나무로 만든 목익을 촘촘히 설치하여 적의 공격시 해자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 해자로 추정되는 진해현읍성의 골목
▼ 옹성의 경우 읍지의 기준으로 보면 2개인데 1872년 지방지 고지도를 보면 길이 동측과 남측에 길이 있는데 그 기준으로 동측과 남측에 옹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옹성은 편문식으로 되어있을 것으로 추정을 하는데 중앙문식의 옹성의 경우 읍성이 큰 고을에 설치를 하는데 진해읍성의 경우 읍성규모가 작아서 편문식으로 된 옹성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 옹성과 해자 그리고 체성을 이용하여 읍성을 방어하는데 아래 그림을 보시면 이해하시기 편할 것으로 보입니다.
 적은 해자를 건너고 성문을 공격하기 위해 옹성을 피해서 와야 하는데 읍성안 옹성에서 사방으로 공격을 하게 됨으로 적의 입장에서 공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1872년 지방지를 보면 성문위에 누각이 보이는데 2층 누각이 아닌 1층 누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문의 경우 평거식으로 된 성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해동지도나 광여도에서는 개거식 성문으로 되어있는데 화공이 그림을 그리면서 생략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식의 성문이었다라고 단정을 짓기는 힘이 듭니다. 다만 진해현읍성의 규모와 진해현의 인구와 통행량을 생각한다면 개거식의 성문보다는 평거식의 성문일 확률이 높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진남문으로 사용된 남문의 경우 평거식보다는 홍예식으로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치성의 경우 진해현읍성이 남북보다 동서로 길이가 더 길고 남동측보다 남서측의 체성의 길이가 긴 점을 생각해서 남서측과 북서측에 치성을 두었고 체성이 만나는 지점에 치성을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총 6개의 치성이 나옵니다.

▼ 성벽의 높이는 현재 알 수가 없지만 조선초기 읍성 축성시 사용한 4~5미터 사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해읍지에 의하면 높이는 9척(현 2.7미터)였다고 합니다.(현재 남아있는 진해현읍성의 체성의 모습) 진동면사무소 뒷편에 있는 진해현 체성
발굴공사에서 나온 진해현 체성
▼  민가의 담장으로 사용중인 진해현 체성
▼ 체성의 길이를 측정해보니 대략 650미터이고 면적은 29,118.55㎡ 인데 이를 평으로 계산하니 8,808평으로 나오네요.
▼ 위에서 이야기한 진해읍성의 성곽과 옹성 등과 읍성내부에 있었던 각종 관아 건물에 관하여 추정을 하여 보았는데요. 이 모든 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지 않을까 추정합니다. 물론 내부에 있는 관아 건물들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상상이란 점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정확한 것은 항상 발굴조사라는 점을 알아주시고.. 삼진중학교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래 사진은 현 진동면으로 진해읍성이 있었던 곳입니다.  (사진출처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빨간색으로 된 도로는 크게 T자형의 도로로 되어있고 이는 각 동,서,남문을 중심으로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현재 객사터인 삼진중학교 교사로 사용되는 곳은 객사의 내삼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동헌의 사주문은 내삼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동헌앞 골목의 경우 외삼문과 홍살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동헌옆에 있는 진동면사무소의 경우 동헌과 함께 사용한 내동헌인 내아로 추정이 되며 동헌과 내아사이에는 담이 있었을 것이며 동헌과 내아사이에 협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동헌 뒤에는 책방 즉 책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동헌앞 골목에는 작청이나 통인청, 관청 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삼진중학교 운동장의 경우 한번 이전한 동헌의 터로 추정이 되며 동헌옆에 내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동헌 옆 골목에는 이방청이나 호방청, 관노청, 교방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가져봅니다.
현재 진동노인회로 사용되어지는 향청과 사령청 주위에는 훈련청이나 군기청 등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진해읍성의 경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동헌, 사령청, 마방, 형방소이며 삼진중학교내에 객사유지가 남아있고 진동노인회관은 향청터라고만 전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필자가 추정한 것이며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진해현읍성의 규모 및 각종 관아들이 있었다는 점만 알아주었으면 하고 본격적인 것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아래 사진은 진동면사무소앞에 있는 실내포장마차로 상호명이 "이리오너라"라인데 진해현읍성과 어울리는 상호명이네요.
진해현읍지와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한 진해현읍성에 관한 자료가 입수되면 다시 정리하여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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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지나가는이 2012/07/12 15:23 # 삭제

    대단하시네요. 엄청난 자료에 감탄하고 갑니다.
  • 팬저 2012/07/12 15:54 #

    이렇게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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