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현 읍성5 읍성(邑城)



진해현읍성의 경우 가깝다는 이유로 잠시 가보고 금방오고 이런식으로 진행하였는데 이번에 시간을 내어서 다시 가보니 여러가지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인터넷에서 진해현에 관련된 자료를 보면 읍성의 성곽의 경우 허물어지고 진동면사무소 뒤에 조금 남아있다라고 적혀있는데 막상 이번에 탐방을 해보니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더군요. 제가 탐방을 한 곳을 빨강색 영문자로 표시하였고 기존에 남아있는 건물은 파란색으로 된 영문자로 표시하여 두었습니다. 나오는 지역을 영문자로 표시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도를 참조하시면 위치에 관한 이해가 빠를것으로 보입니다.
▼ 유장근교수의 도시탐방대행사의 하나로 진해현 관아 탐방이 있어서 참여했습니다. 탐방대보다 일찍 도착하여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최근에 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행운이 ^^) 위 지도에 나오는 지점은 R지점입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공터의 골목은 진해현읍성의 해자로 추정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저번에는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어느 연구원에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하단의 성돌을 보면 대략 50~60센치 이상의 돌들이 아래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 성벽의 바깥부분만 아니라 안측에도 성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봐서 진해현읍성의 경우 내외축 모두 돌로 만든 협축으로 된 성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성돌의 경우 자연석을 다듬어 놓았는데 전형적인 조선초기 연해읍성에서 사용된 축성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돌과 성돌사이에 틈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잔돌끼움방식으로 축성한 것임을 알 수 있더군요.
▼ 보이는 부분은 서문지로 추정이 되는 지역으로 아래 사진을 보면 성벽의 폭은 1.3미터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 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 서문의 경우 옹성이 있지 않았나 싶어서 서문지 앞에까지 발굴조사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 서문지 뒷편의 모습으로 여기에서는 성곽의 돌이 보이지 않더군요.
▼ 비가 올 것을 대비해서 천을 덮어놓았는데 그 틈사이로 돌들이 보입니다. 돌의 경우 큰 돌이 있지만 작은 돌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 서문지 앞 옹성이 있을까 싶어서 발굴조사를 한 흔적이 보이는데 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 옹성의 흔적을 발굴했는지 몰라도 제가 볼때는 옹성의 흔적이 보이지 않더군요. 저번 진해현읍성4편에서 서문의 경우 옹성이 없을 것으로 추정을 하였는데 제 추측이 맞을 것 같습니다.
▼ 옹성부분을 추정하여 발굴조사하 복토한 흔적이 보입니다.
▼ 서문지 앞의 골목으로 예전 조선시대에서는 왕래가 많았겠지만 지금은 어느 골목길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위 지도에 나오는 지점은 S지점입니다
▼ 발굴조사하고 있는 서문지 옆에 있는 가정집으로 담이 돌로 되어있었는데 하단부와 상단부에는 근대시대에 성벽의 돌을 허물고 작은 돌로 담을 세워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 부분이 적어도 10여미터 연결되어있어서 하단부 발굴을 하면 정확한 자료가 나올 것 같습니다.
▼ 다시 골목길로 왔습니다. 골목의 담을 돌로 사용중인데 사용되고 있는 돌들이 작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서문지 옆 골목으로 예전에 동문과 남문을 가기위해 자주 이용했던 도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돌담의 가정집으로
▼ 위 가정집의 담은 예전 우리가 즐겨보던 읅담으로 되어져 있더군요. 위 지도에 나오는 지점은 Q지점입니다
▼ 위 돌담의 집 맞은편에 있는 집으로 보이는 야외화장실편으로 성벽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여기로 성벽이 지나가고 다음편 집에서 진해현읍성의 성벽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아래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위 지도에 나오는 지점은 T지점입니다
▼ 이제 진해현 관아가 있는 곳으로 나왔습니다. 보이는 도로가 위 골목길 보다는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관아의 가장 중심인 동헌을 가기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지도에 나오는 지점은 N지점입니다
▼ 보이는 잡화점과 차들이 세워진 곳이 진해현 관아의 외삼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을 하는 곳입니다. 진해현 관아에서 외삼문까지 남아있었다면 영남지역 읍성중 문화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 있었을 것인데 외삼문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위 지도에 나오는 지점은 M지점입니다 
▼ 고창읍성에서 본 풍화루의 모습 고창읍성이 외삼문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이 들고 고창읍성이나 낙안읍성에 사용된 외삼문의 경우 모두 복원한 것입니다.
▼ 낙안읍성내에 있는 외삼문인 낙민루로 진해현안에 외삼문이 있었다면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보이는 문구점의 경우 진해현읍성내에 있었던 각 관청건물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작청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만 가져봅니다. 또 보이는 문구점이 진해현 관아의 외삼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을 하는 곳입니다. 위 사진에 나온 잡화점과 문구점 사이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거리상 기준으로 봐서는 잡화점이나 문구점 또는 사이에 외삼문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위 지도에 나오는 지점은 L지점입니다
▼ 이번 탐방에서 얻었던 수확중 하나인 진동경노당입니다. 필자가 예전에 탐방했을때 진동면 사무소옆에 있는 노인회사무실을 향청으로 오해를 했었는데 이번 탐방을 해보닌 이곳이 확실히 향청건물로 사용한 것이 맞더군요. 진동경노당의 경우 바로 위 문구점 옆이며 관아로 들어가기전에 있습니다.
▼ 향청의 경우 읍치의 관아 건물중 객사와 동헌 다음에 중요한 건물로 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는 지방자치기구로서의 기능을 했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지방의회와 같은 역활을 했습니다.
▼ 진동경노당(향청)건물의 출입문으로 관아의 출입문과 크기나 건축기법면에서 비슷하게 보입니다.
▼ 향청의 경우 향회를 소집하여 지방의 여론을 모으고, 백성들을 교화하였으며, 수령에 대한 자문과 함께 수령의 비행을 고발하는 등의 업무를 맡았습니다.  
▼ 향청의 우두머리는 향정(鄕正) 또는 좌수(座首:1894년 이후 鄕長)라 하여 선거로 추천된 자를 임명하였는데, (지금 지방의회의 의회장의 경우도 선거로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향청의 경우 나이가 있어야 했고 덕망이 있는 분으로 했죠.) 좌수는 풍속 교정·향리규찰·정령시달(政令示達) 등의 일을 맡아보았습니다. 그러나 향청은 향민을 대표해서 지방관을 감시할 소임을 하지 못하고, 때때로 그 권한을 남용하여 민폐를 끼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합니다.
▼ 진동경로당에 사용된 초석의 경우 가공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초석으로 되어져 있더군요.
▼ 진동경로당의 담부분에서 본 수구로 예전방식으로 된 수구로 보여졌습니다.
▼ 진해현읍성의 공적비로 쇠로 만든 공적비가 있더군요.
▼ 거제기성관에서 본 공적비로 이곳에 6개의 쇠로 만든 공적비가 있었습니다.
▼ 이번 진해현 공적비에서 본 공적비하단의 거북이모습
▼ 거북이 목의 경우 하단에 시멘트와 함께 묻어버려서 거북이가 잘 나타나지 않더군요. 관리가 힘든면이 있겠지만 흙으로 했으면 거북이의 모습도 알기 쉬울 것 같은데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 비석에 거북이가 있는 것은 거북은 수명이 기니 영원과 길상(吉祥)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것을 만지면 복이 온다고 한다고 하더군요(믿거나 말거나). 이러한 전통이 아직도 남아서 비석 밑에 거북이가 아직도 있습니다. 비석 밑에 있는 거북이를 귀부라고 합니다.
▼ 동헌의 출입문인 사주문의 기둥밑의 초석은 막돌로 자연스럽게 되어져 있었습니다. 
▼ 진해현 동헌의 모습
▼ 동헌의 기둥의 초석 또한 막돌로 자연스러운 맛을 줍니다. 진해현 동헌의 민흘림의 원기둥이 사용됐었는데 여기서 민흘림이란 기둥의 머리부터 뿌리까지가 직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 동헌의 대청마루로 층이 진 것을 알 수 있는데 특이하게 보였습니다. 그동안 복원한 동헌의 경우 이런 층이 진것이 없었는데....왜 그랬는지는 현재는 알 수가 없네요. 일단은 숙제로 남겨 놓아야겠네요.
▼ 진해현 동헌의 대들보의 모습으로 굵은 나무가 고주(가운데 있는 기둥)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 진해동헌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고 하는데 우물마루는 세로 방향에 짧은 널을 깔고 가로 방향에 긴 널을 깔아서 ‘井’ 자 모양으로 짠 마루를 가르킵니다.
▼ 진해현 동헌의 협방에 사용된 아궁이로 최근까지 사용한 흔적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진해현 동헌의 현판으로 그냥 동헌이라고 적혀있는데 이 부분이 아쉽더군요. 다른 읍성의 관아지를 보면 당호를 적는데 진해현 관아의 경우 당호를 사용하지 않고 동헌이라고 적혀있는데 이 부분은 빨리 수정하여 당호를 사용했으면 합니다. 진해현 동헌의 당호는 화류헌(化流軒)이라고 합니다. 화류헌이라고 적혀있는 것과 동헌이라고 적혀있는 것의 경우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 진해현 동헌 뒤의 모습으로 우측에 협방이 보이고 문이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 아니더군요.
▼ 진해현 동헌의 천장의 모습
▼ 진해현 동헌의 귀포의 모습(귀포가 맞나?)
▼ 진해현 동헌의 기둥의 모습으로 나무가 작어서인지는 몰라도 연결한 것이 보이더군요.
▼ 군데 군데 갈라진 틈이 보였습니다.
▼ 진동면사무소 앞에 있는 우산팔경의 비석으로 고려시대때 사용한 우산현이 진동현으로 옮기고 나서도 객사가 우산관으로 사용되었고 이후에도 우산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곳 진동면사무소에서 우산이라는 지명을 보여주네요.
▼ 마방의 모습으로 현재 마방의 건물이 남아있는 경우는 드물다고 봐야 합니다.
▼ 이제 객사터로 옮겨갑니다. 객사터의 경우 기단부분이 남아있는데 높이가 대략 60센치 정도 되어보였습니다. 이렇게 기단을 사용하는 이유는 객사의 위엄때문입니다. 객사의 경우 왕권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에 다른 건물보다 높고 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객사 앞에 있는 화단으로 여기에 객사의 기단석이 연결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객사터에서 남측을 바라본 모습으로 객사터에서 남문까지 연결된 도로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나무로 2개의 나무가 좌우측에 들어서있고 앞에 보이는 창고건물이 도로였을 것입니다. 창고건물 부근에 객사의 내삼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무의 경우 객서의 내삼문이 무너지고 나서 심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 길 건너 왔습니다. 바로 보이는 나무가 객사터앞에 있는 나무입니다. 
▼ 동헌의 외삼문이 있었던 곳을 추정하는 곳에서 위 사진이 보이는 곳을 바라본 것으로 객사에서 나와 T자로 갈라지는 도로입니다. 
▼ 보이는 도로에 있는 삼진중학교 건물의 경우 조선시대 도로였을 것으로 보이고 이길을 따라 쭉 가면 동문이 나옵니다.  
▼ 객사에서 내려오자 마자 좌측편에 있는 건물에서 본 돌로 이곳에 건물의 담이 있었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 조금 뒤로 가서 찍어보았는데요. 조선시대때 관아건물지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 옆 건물 맞은편에 있는 농협창고 건물로 건물의 규모나 대지 그리고 터로 봐서 이곳도 조선시대 관아건물지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 농협창고 옆에 농협진동지점으로 이곳에 조선시대때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요?  
▼ 농협에서 객사터 방향을 바라본 모습으로 읍성안에 있었던 주도로의 모습으로 남문의 도로가 주 도로였음을 증명해주는 사진입니다.
▼ 농협하나로 마트 건물의 경우 남문의 성벽이 지나가는 곳입니다.
▼ 농협하나로 마트앞 도로가 남문의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남문에서 객사까지는 상당히 가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남문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진동시장이 보이는데 아케이트가 끝나는 지점이 남문의 옹성이 끝나는 지점입니다.
▼ 남문앞의 옹성이라는 증거는 옹성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된 골목길이 나오는데 가장위 지도에서 F지점입니다.
▼ 진동시장 아케이트에서 남측을 바라본 모습으로 이곳에도 시장이 있는데 예전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장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읍성이 무너지면서 남문이 있었던 곳까지 확장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남문지에서 동문지가 있었던 곳으로 방향을 돌려 보았습니다. 보이는 골목의 경우 진해현읍성의 해자가 지나갔을 것으로 보이고 골목이 ㄱ자로 꺽여 돌아감을 알 수 있습니다.
▼ 골목길 중 삼진중학교 방향으로 골목이 더 있었는데 보이는 안측 가정집으로 성벽이 있었을 것입니다.
▼ 동문지 앞에 골목이 있었는데 민가들이 있지 않고 공터가 나오더군요. 실록을 보면 "진해현읍성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진해현읍성을 옮겨야 한다"는 비변사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 기준으로 본다면 동문 앞 골목까지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생각을 가져봅니다.
▼ 위 골목 앞에 있는 가정집에서 본 진해현읍성의 동문 옹성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정집의 경우 폐허더군요.
▼ 옹성으로 추정되는 곳을 보면 아래측에 있는 돌들은 규모가 크고 위로 가면서 작아지는데 가장위에 있는 작은돌들은 근대에 담으로 사용하기위해 올려 놓은 것 같습니다.
▼ 어떤 돌의 경우 70센치 이상 되어 보이는 돌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서문지 발굴조사에서 본것과 같이 잔돌끼움방식으로 축성하여더군요.
▼ 곤양읍성지에서 본 성벽으로 전체적으로 진해현읍성과 비슷하게 보이더군요.
▼ 동문지에서 북측성곽을 향해 걸어가다가 삼진중학교에 있는 노거수를 보았습니다.
▼ 노거수에서 남측방향을 바라본 것으로 우측 삼진중학교 담을따라서 성곽이 축성되었을 것입니다.
▼ 다시 북측성곽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갑니다. 골목이 곡선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조금 가다가 본 북측성곽의 성벽으로 하단부에 보였는데 위 동문지에서 본 성곽의 돌과 달리 장방향으로 된 돌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 위 북측성벽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삼진중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1층 건물입니다.
▼ 삼진중학교 운동장 스텐드로 스텐드의 경우 직선을 이루며 되어있는데 옆에 있는 가정집의 담과 함께 북측성벽이 조성되어져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북측성벽과 동측성벽이 코너를 이루어지는 부분으로 이곳에 치성이 있었을것으로 추정을 했는데 자그마한 돌들이 따라 갑니다.
▼ 삼진중학교에서 나와 발굴현장인 서문지를 가보았습니다. 객사에서 서문지로 가는 골목으로 조선시대에서는 번화한 거리였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위 지도에 U부분으로 서문지에서 남문지 방향으로 길을 걷어가자마자 본 가정집 담으로 사용되고 있는 진해현읍성의 성벽의 모습입니다.
▼ 주인 아저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하단부의 경우 큰 돌이 자리잡고 위로 가면서 작은 돌을 사용했는데 정방향보다는 장방향의 돌들로 축성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찍은 사진으로 성벽의 축성은 서문지와 같이 잔돌끼움방식으로 축성하였고 성돌의 크기는 50~60센치이고 위로는 10~20센치로 보였습니다.
▼ 다시 가정집을 나와 남문지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차가 보이는 곳에서 남측으로 골목이 튀어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남문옹성이 지나갔기 때문에 옹성과 같은 방향으로 해자가 연결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웅천읍성의 동문지로 앞에 해자가 있고 뒤에 옹성이 있는데 옹성의 방향과 같이 해자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해현읍성의 경우도 웅천읍성과 같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진해현읍성의 주산인 취산의 모습
▼ 진해현 좌측에 있는 야산으로 이곳에 가을포봉수대가 있었습니다. 읍성 주위에 봉수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적이 나타나면 알려줍니다. 진해읍지에 의하면 봉수대에 봉군들이 있었으며 10명이 교대로 봉수대를 지켰다고 합니다.
▼ 진동면 사등리 뒤에 있는 산으로 이곳에 진해현읍성을 보좌하는 사등성지가 있었는데 토성이었으며 조선시대때 축성하였다고 합니다.
▼ 사등리에 양반들이 많이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진해현읍성안에는 아전들이나 백성들이 살았을 것이고 양반들은 수령과 마주치지 않기위해 읍성밖에 살았는데 그중 한 곳이 이곳 사등리입니다.
진해현읍성의 경우 관아지와 객사터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번 탐사에서 향사건물지와 성벽을 발견했습니다. 성벽의 축성방식을 보았을때 조선초기에 축성한 것으로 보이고 임진왜란 이후 다시 한번 축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힘이들지만 세종제임기간중 초기에 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1420년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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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松下吹笙 2010/02/24 19:30 #

    동헌 기둥 에서 서로 연결한 부재는 아마도 보수 수리 흔적일 것입니다. 기둥은 하부는 비바람에 노출이 되기 쉽고, 지상으로 부터 해충들이 침입하기 쉬워서 쉬이 썩거나 훼손되기 쉽거든요. 이때 기둥전체를 갈기 보다는 일부만 갈아서 연결한답니다. 이를 동바리라고 하지요.
  • 팬저 2010/02/24 21:51 #

    동바리라 말이 낯설지만 재미있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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