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읍성 관아와 객사터 급수정 읍성(邑城)



여지도에서 본 창원읍성으로 읍성내부를 보면 객사가 좌측에 있고 동헌이 우측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72년 지방지에는 창원대도호부지도가 없다. 그러다 보니 여지도의 지도를 기준으로 창원읍성의 각종 관아를 추정하다 보니 오류가 발생한 것 같아서 창원읍성의 관아와 객사에 관하여 다시 작성하려고 합니다.

여지도의 경우 1789년에서 179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18세기 말에 제작하였다고 봐야하는데 그 시기에 창원읍성의 객사의 경우 좌측에 있고 우측에 동헌이 있었습니다. 여지도를 기준으로 현재 창원초등학교 건물터가 객사터라고 이야기 하였는데 우리문화재연구원에 계시는 권순강팀장이 이야기하기를 창원초등학교 건물터의 경우 객사터가 아니고 동헌터라고 하더군요.

엥... 이 무슨 소리인가? 그동안 올렸던 자료들이 모두 엉터리로 올렸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그렇다면 여지도가 그려진 시기 이후에 다시 한번 객사와 동헌이 자리바꿈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더군요. 이런 경우는 읍성내에서 빈번히 있었는데 이런 부분을 알아보지 못했던 부분이 아쉽네요.
▼ 창원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이트에서 본 창원읍성 동헌의 모습입니다. 처음 이사진을 보고 객사건물이 특이하게 만들었나? 이상한데 객사건물이라면 좌우익공이 있어야 하는데 왜 없지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 평근당이라는 당호의 모습과 평근당을 배경으로 졸업사진을 찍은 모습으로 우리나라 읍성내에 있었던 초등학교건물의 경우 1910년경 읍성내부에 남아있던 각종 건물을 이용하여 사용했던 것을 알고 있기에 객사의 건물로 사용한 예가 많이 있었고 위 여지도의 기준으로 작성하다보니 이런 오류가 발생하였네요.
▼ 운동회때의 모습으로 우측에 평근당의 당호와 좌측에 있는 각종 관아건물의 모습이 이제 이해가 됩니다. 객사의 경우 주위에 담장을 두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이제야 그림퍼즐이 맞추어지네요.

창원읍성 동헌의 당호는 평근당(平近堂)입니다. 평근당의 명칭을 사용하는 동헌이 많이있었는데 고창읍성의 동헌의 경우도 평근당으로 사용합니다. 평근당의 내용을 보면 백성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리겠다하여 평근당(平近堂)으로 사용했기때문에 각 읍성의 동헌에 많이 사용한 것입니다.

동헌의 당호로 평근당뿐만 아니라 여러 당호가 사용하였는데 그중 많이 사용하는 당호가 안민헌과 제민헌입니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겠다하여 안민헌(安民軒),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겠다하여 제민헌(濟民軒) 입니다. 

창원읍성의 경우 창원대도호부로 정3품의 부사가 임명되고 그 아래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90명, 인리 40명, 지인 17명, 사령 20명, 군졸 14명 그리고 관노 37명과 관비 16명이 예속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창원읍성내 군사의 수를 보면 조선초기 정군사수는 모두 860명이었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2명, 영진군(營鎭軍 지방군)이 119명, 선군(船軍 수군)이 689명이다. 창원부의 군사 중 창원 관아와 읍성에 배치된 군사는 군관 71명, 수성군 15명으로 모두 86명이 배치되었고, 합포에는 진군 20명, 기선군 200명, 보병 300명이 배치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군제가 개편되면서 나타난 5군영 체제 하의 창원대도호부 정군사는 모두 2,544명이었다. 어영정군 80명, 금위정군 110명, 병조보병 52명, 봉수군 150명, 마병 213명, 속오군 487명, 별대 45명, 아병 102명, 단사분방군 336명, 수군 713명, 육군 256명 등이었다고 합니다.




덧글

  • 松下吹笙 2010/04/22 23:02 #

    객사 중에 간혹 좌우 익사가 없는 건물도 있습니다. 물론 그 수가 적지만요.
  • 팬저 2010/04/23 10:06 #

    예... 좌우 익사가 없는 경우도 보았지만 숫자도 적죠. 그것 때문에 처음에 창원초등학교에 있던 건물이 객사건물인줄 알았습니다. 이후 객사와 동헌이 위치를 바뀌었던 부분을 알지 못하고 객사건물인줄 알았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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