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_03(나주읍성 모형 _ 그 시절로 돌아 가본다) 읍성(邑城)



나주읍성을 알려면 현재 남아있는 나주읍성의 성곽을 따라서 걸어가면서 본다면 아주 좋을 것이나 나주읍성 또한 우리나라 현재에 남아있는 읍성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일부만 남아있죠) 물론 나주읍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남고문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 최근에 복원을 한 것이라 예전 조선시대의 상징물은 나주목 내아와 객사이지만 이는 어디까지 성내부에 있는 건물이고 성곽을 이해하는데에는 문제가 있으니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이 모형인데 여러군데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부산 동래읍성, 여수 전라좌수영, 진해 웅천읍성 등)

▼ 나주읍성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이 모형이 있는 곳은 나주문화관입니다.   

▼ 서문인 서성문이 있는 곳으로 서성문과 함께 나주향교의 모습이 보입니다.
▼ 서성문의 경우 현재 복원공사를 들어갔는데 2010년 말 완공을 한다고 하네요. 서성문 복원추진 뉴스
▼ 나주향교의 모습으로 나주향교의 경우 일제시대때 많은 부분이 헐리게 되다가 1959년 동재·서재를 중건하고, 1980년 명륜당과 동·서익당 보수, 1981년 담장 개축, 대성전과 동재·서재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주향교의 건물 배치는 전묘후학(前墓後學)으로, 일반적인 향교의 전학후묘와 달리 앞에 제향을 두는 대성전을 두고 강학을 하는 명륜당을 뒤에 두는 방법입니다. 필자가 가본 대부분의 향교의 경우 전학후묘방식이었는데 나주향교의 경우 이와 반대로 전묘후학의 방식입니다. 이는 서울의 성균관과 같은 배치법으로 평탄한 대지에 건물을 배치할 때는 이와 같은 법칙을 따랐다고 합니다. 문제는 시간이 없어서 가보지를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네요.
▼ 전라우영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전라우영이라...  병영과 수영에 관하여는 들어 보았으나 우영에 관하여는 듣어보지를 못했습니다. 이래저래 알아보니 세조 3년(1457년) 병영의 하부조직인 거진을 설치하고 진장인 병마사는 목사가 겸임하였으며. 효종 8년(1657년) 나주거진을 전라우영으로 개편함으로써 우영장을 두어 2군 8현의 군비를 장악하게 한바 있다라는 내용을 보고 알았습니다.

전라우영이 나주였다면 전라좌영이 있었겠죠. 전라 좌영의 경우 어디에 있었을까요? 전라좌영의 경우 남원입니다. 경상우병영과 경상좌병영을 낙동강을 기준으로 나누었다면 전라우영과 전라좌영의 경우 영산강을 기준으로 나누었습니다.

전라병영의 경우 현재 전라남도 강진에 있으며 전라병영성의 경우도 복원이 한참입니다. 전라도의 경우 병영성이 한개만 있어서 좌우로 나뉜 우영과 좌영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 전라병영이 현재의 사단급이라면 전라우영과 좌영의 경우 현재 연대급이나 여단급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래 전라우영의 글은  호시탐탐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전라우영은 남문(南門)밖인 나주시 남외동 135번지 일대인 현 나주초등학교 부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곳은 세조 3년(1457)에 나주목사가 겸임하는 병마첨절제사영 나주진영이 설치된 이후, 효종 8년(1657) 삼도(三道)에 도별로 5영을 설치할 때 전라우영으로 개편되어 설치되었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 7월 16일 우영이 폐지된 후 광무 11년(1907) 공립나주보통학교가 이 우영건물터에 설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3목 2군 7현의 병마(육군)지휘권을 가진 무관인 우영장(정3품)이 별도로 배치되었던 우영의 영장(營長)은 그 병마관할지역 12개 군현의 토포사(討捕使,지금의 검찰지청장)를 겸임하여 실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속읍은 나주, 광주, 능주, 영암, 영광, 남평, 함평, 무안, 화순, 고창, 흥덕, 무장현이다.

 

전라우영(全羅右營)에는 영장겸 토포사 아래에 대변군관(待變軍官) 50인, 토포군관(討捕軍官) 50인, 천총(千摠) 1인, 파총(把摠) 2인, 초관(哨官) 15인 기패관(旗牌官)29인, 지곡관(知穀官) 1인, 기고관(旗鼓官) 1인, 아전(衙前) 6인, 지인(知印)15인, 군병(軍兵) 60인, 취수(吹手)15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때 읍성내에 있는 건물들을 헐어내고 그곳에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나주의 경우 전라우영을 헐어내고 이곳에 나주보통학교를 설립했네요.

▼ 서측방향에서 동측방향을 바라본 나주읍성 모형의 모습으로 나주읍성 내부에 흐르는 나주천이 눈에 들어 옵니다.
▼ 나주읍성 남고문의 모습으로 위에서 본 서성문의 누각과 달리 2층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남고문의 경우 최근(1993년)에 복원을 하였습니다.
▼ 나주읍성 남문에 있는 최고정의 모습이 보입니다. 오래 전에 최고정이란 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엔 신사가 세워졌던 곳이기도 한 곳이 이곳 남산입니다. 나주읍성의 경우 평지읍성인데 이곳 남산만이 동산과 같이 조금 높은 곳인데 여기서 동문 쪽을 내려다보면 멀리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 줄기가 눈에 잡힙니다. 그러다보니 이곳에서 전망을 바라 볼 수 있는 정자를 세운 곳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현재 최고정의 경우 시멘트 팔각정이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못해보았습니다.  
▼ 남산옆에 나주천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이고 나주천과 성곽이 만나는 곳에는 수구의 모습이 보이며 그 옆에 동점문이 보입니다. 동점문의 경우 남고문보다 늦게 복원(2006년 10월)을 하였습니다.
▼ 나주천의 모습과 나주읍성의 성곽을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남문과 서문이 보입니다. 나주읍성의 경우 4대문이 있다보니 길 또한 +형식으로 된 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 북문의 모습과 북측에서 남측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 서성문과 나주읍성 내부의 모습이 보입니다.
▼ 남측에서 나주읍성 동헌과 객사인 금성관의 모습이 보입니다.
▼ 나주천을 가로지르는 곳에 나주읍성 당시 유일한 다리인 학교의 모습이 보입니다. 학교의 경우 남문을 지나 객사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입니다.
▼ 나주읍성 2편에서 소개한 나주목 내아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옆에는 동헌의 모습이 보이며 동헌 옆에는 객사인 금성관의 모습이 보입니다. 금성이란 나주의 옛지명입니다.
▼ 나주읍성의 중요 건물인 관아와 객사 그리고 향청건물이 있는 곳으로 현재 나주객사와 나주목 내아의 경우 보수 및 복원이 되었고 동헌의 경우 복원을 한다고 합니다. 동헌을 복원한다면 모형의 모습이 재현 될 것입니다.
▼ 나주읍성의 동헌과 내아의 모습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사진으로 동헌 뒤에는 책실이 보이며 동헌 동측 옆에는 삼문인 정수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객사의 금성관의 경우 망화루의 외삼문을 지나 중삼문을 지나고 내삼문을 지나야 만날 수 있습니다. 객사중 중삼문을 보는 것은 필자도 처음입니다. 망화루 앞에는 홍살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객사 뒤에는 향청의 모습이 살짝 보입니다.
▼ 동점문을 지나 북측성곽으로 가다보면 만나는 곳으로 인덕지인 활터가 보이는데 석당간과 목당간이라는 안내판이 있는데 석당간의 경우 높이 11m의 돌기둥으로 ‘동문밖 석당간’(보물 49호)이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가보지를 못해봤습니다. 나주가 풍수상 배의 형국이어서 돛대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절 앞에 세웠던 당간을 닮아 ‘석당간’으로 불리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옛 지도엔 ‘석장’(石檣)으로 표시돼 있다고 합니다. 원래에는 성밖에 석장을, 성 안쪽(동문 옆)에 ‘목장’(木檣)엔 세웠다고 하나 목장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형에 석당간과 목당간이라는 안내판을 넣어 놓았습니다.
▼ 1872년 지방지에서 본 나주읍성의 모습으로 위가 북측이고 아래가 남측입니다. 지방지를 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석장이 보이고 동문인 동점문의 경우 2층누각이며 홍예문의 모습이 남문인 남고문의 경우 동점문과 같이 2층 누각이며 홍예문입니다. 하지만 서문이 서성문의 경우 1층 누각이며 평거식으로 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문의 경우 1층 누각이며 홍예문입니다. 또 객사와 동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고 객사 동측에 옥이 보입니다. 관청의 경우 객사 동측 옆으로 형성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문인 남고문앞에는 전라우영의 모습과 함께 각종 건물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남산에는 최고정의 모습도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방지를 기준으로 남고문과 동점문을 복원했을 것으로 보이고 서성문의 경우 남고문이랑 동점문과 달리 1층 누각으로 복원을 하면서 성문의 경우 개거식으로 합니다. 이는 지방지를 기준으로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다음지도로 본 나주읍성 성곽의 모습으로 나주읍성 복원계획에 따라 4대문과 함께 성곽도 복원을 한다고 합니다. 현재 서문인 서성문 주위에 일부 성곽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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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부산촌놈 2010/06/14 16:34 #

    동점문이란 문을 보니 비교적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 옹성을 자연석으로 꽤 실감나게 복원해 놓아서 한번 가보고 싶더군요.



  • 팬저 2010/06/15 00:57 #

    남고문과 동점문을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납니다. 동점문의 경우 최근에 지었는데 아무래도 남고문보다는 예전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래도 어딘가 미흡한 것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나주읍성 뒤편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부산촌놈 2010/06/14 16:36 #

    하, 토요일 날에 인생문엘 갔다 왔는데 말입니다, 참담하더군요.

    성문에 누가 수정액을 가지고 낙서를 해놓았더군요.

    벽돌로 된 여장에도 낙서를 해 놓았던데...

    아니, 그게 시급한 게 아니라 정말 잘못된 복원입니다..

    그런데 인생문 양옆 성곽이 원래 그렇게 높은겁니까?
  • 팬저 2010/06/15 00:57 #

    인생문의 경우 일부 허물어져서 다시 복원을 했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돈이 들어 갈 것 같습니다.
  • 부산촌놈 2010/06/14 16:41 #

    가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성문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문 위에 문명석(門名石)이 있잖습니까?

    그게 부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원래 문명석을 탁본해서 쌓아놓은 것인데 인생문은 정말 원래 있던 자제는 하나도 안 쓴것 같더군요.

    복원할 때 기초석들까지 모두 들어내고 공사를 했다고 하니...

    그리고 동래읍성 모형과 동래고지도를 보니 옹성 끝과 치성에 각각 보루가 설치되어 있던데 재정 부족 때문에 복원을 안 하고 있는걸까요?
  • 팬저 2010/06/15 00:59 #

    재정부족보다는 단체장의 마인드와 이를 관리하는 공무원들의 마인드의 부족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도 아니면 문화재위원들이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부산촌놈 2010/06/14 16:44 #

    그나저나 홍살문이 보이는데 홍살문은 보통 어느 격 이상의 도시의 관아 앞에 세우는 거죠?
  • 팬저 2010/06/15 01:00 #

    홍살문의 경우 향교나 객사나 동헌앞에 세우는 것으로 여기서 부터 예를 갖추고 들어오라는 일종의 무언의 이야기라고 봐야할 것 같고요. 어떤 격을 두고는 하지 않습니다.
  • 유진우 2010/06/15 21:32 # 삭제

    건설회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신속하게 시공하고 마무리지을 수 있는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최선의 선택이고 시청 입장에서도 예산을 최소화( 그러면서도 금액을 보면 결코 적지 않은.... 인부들에게 막걸리 사주느라 나갔는지... )하는 것이 우선적이니 나온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콘크리트 수명상 30년 후에는 철거하고 다시 시공해야겠죠

    그 때는 아마 22mm 철근에 옹벽 두께 30cm로 타설 시공할 것 같습니다.
  • 팬저 2010/06/16 10:53 #

    구청이나 시청 문화재위원회에서 이를 다루고 나서 결정을 했을 것 같은데... 왜 인생문을 저런식으로 했을까요?
  • 유진우 2010/06/16 12:35 # 삭제

    오사카성을 벤치마킹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1931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철근/콘크리트에 대한 맹신이 싹텄는지도요.

    그러면서 원래 인생문 위치에서 크게 벗어난데다 시공함은 물론 양측의 놀이동산 입구를 만들어놓은 것은 개그의 극치죠. 양측 능선의 성벽과 비례도 안맞으니 갈수록 답이 안 나오죠

    아무래도 당시 부산광역시장이나 동래구청장이 임기 내로 업적을 하나 남기려했을지 누가 알까요?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 팬저 2010/06/16 16:22 #

    부산 문화재의 경우 저런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부산 자성대에 있는 만공단의 경우도 조선시대때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부산촌놈 2010/06/16 17:00 #

    그러고보니 부산진지성의 장대인 진남대도 격에 맞지 않게 복원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방의 작은 진성의 장대가 말그대로 임금을 지킨다는 수어장대만큼 규모가 크다니 심각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팬저 2010/06/16 17:11 #

    진남대의 경우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부산촌놈 2010/06/16 17:01 #

    그리고 다대포 객사도 사실은 객사 건물이 아니라 다대진 첨사영이라는 설이 있더군요.

    제 생각엔 첨사영 건물이 맞을 듯 싶습니다.
  • 팬저 2010/06/16 17:10 #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객사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죠. 객사의 경우 좌우익공이 있는 것이 정설인데 다대객사의 경우 그런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대진 첨사 안에 있었던 건물이 맞을 것 같습니다. 객사의 경우 제가 다음에 올려드릴 나주객사를 보면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객사의 경우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영,진에 들어가는 것 중 가장크고 위치가 좋고 존경할 수 있는 크기로 만드는데 다대객사의 경우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죠. 통영의 세병관을 축소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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