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의 맨 남측마을인 외양포에 오래만에 보는 일본식 건물들이 들어선 곳을 따라 쭉 올라가면 포대진지가 나옵니다. 일본식 가옥들은 부산,마산,진해 등 도심지에 많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철거가 되었지만 이곳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일본식 가옥에 관하여는 2편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 일본식 가옥을 따라 올라오니 이녀석이 반긴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꼬리를 흔들면서 달라붙는다. 그러면서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인양 포대진지까지 앞장선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마을로 사라져 버린다. 정이 많이 굶주렸는가 보다.
▼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올라오니 조그마한 흔적들이 보여서 그곳으로 올라가 봅니다.
▼ 이렇게 좁은 다리가 있나 싶은데
▼ 사령부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라는 표시석의 경우 일본군들이 세운 것입니다.
▼ 외양포의 포진지는 임시로 축성한 것으로 명치 37년(1904) 8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준공한 것입니다. 보조 건설물이 준공된 것은 1905년 2월이라고 하니. 빨리도 지었네요. 아무래도 러일전쟁 승전 후 진해만으로 들어오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것 같습니다.
▼ 아직도 계단은 남아있어 위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 군데 군데 무너져 내린 것이 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원형 그래도 남아있습니다.
▼ 저 계단이 무려 100년이 지났네요. 계단의 재료들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 일본군 포대진지의 모습입니다. 일본군은 여기에 280미리 유탄포 6문 했는데 포를 설치한 것은 1905년 1월이라고 합니다.
▼ 280미리 유탄포의 모습으로 이미지출처는 사진에 표시하였습니다. 28센치 유탄포의 경우 상당히 큰 구경입니다. 현재 한국군이나 미군들이 사용하는 포의 구경을 보면 155미리인데 이것에 비해 큰 편이죠. 일본군의 경우 이 280미리 유탄포를 러일전쟁때 여순 전투에서 사용하여 유세를 떨칩니다. 일본군의 280미리 유탄포의 경우 이탈리아제라고 하네요.
▼ 일본군은 진해로 들어오는 길목인 이곳 외양포뿐 아니라 거제도 지심도에도 포대를 설치하여 진해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거제도 곳곳에 설치하였는데 견내량,한산도,광이도,앵도,실리도 등에도 설치하였습니다.
▼ 보시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지금으로 100여년 넘는 시대에 콘크리트로 설치를 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것도 두께가 1미터가 넘는 방식인데 저정도면 당시의 무기 공격으로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출입구 앞쪽에 있는 2개의 방중 하나인데 아치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는 4~5명 기거하면 많이 할 것 같더군요.
▼ 붉은 적별돌로 된 그곳 위에는 환기구가 보였습니다.
▼ 조명시설로 보이는 것이 있더군요.
▼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외양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세운 일본군의 포기지를 보고 비행기폭격을 견딜 수 있다고 하는데 라이트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기 이전에 외양포에 포기지를 세웠고 2차 대전 정도 와야 이곳을 파괴할 위력을 가진 비행기가 출현하기 때문에 얼마나 조선침략을 영구히 가져가려고 했는지에 대한 증명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 계단을 올라가서 바라본 외양포의 모습으로 진해로 출입하는 배들을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습니다.
▼ 위에서 아래에 있는 포진지를 바라본 모습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2차대전때 동남아를 보는 느낌을 줍니다.
▼ 이곳에 280미리 유탄포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지나가는 선박을 맞추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사거리와 정확도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 한발 맞는다면 침몰되겠지만요. 사진 출처는 퍼싱의 전쟁영화이야기에서"
▼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 동아2차 아파트에 들어선 일본군 중포병대대의 훈련장면으로 외양포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사용한 포 또한 280미리 유탄포네요. 포부대의 포설치 공간이 외양포와 비슷하네요. 사진출처 : 허정도와 함께하는 도시이야기 이러고 보니 일본군들이 마산, 진해를 중심으로 군사적으로 보호하려고 많은 신경을 사용했네요.
▼ 콘크리트 위에 지붕은 흙으로 덮어져 있으며 그위에 대나무를 심어 놓았습니다. 포대 지붕에 대나무를 심어 은폐하는 것은 일본군 포대 건축의 표준이라고 하네요. 아무튼 이정도의 위장이라면 가까운 곳에서도 찾기가 힘이들 것이고 항공정찰에서 육안으로 관측은 힘이 들 것이고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 알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 우측의 콘크리트 축대의 경우 흙으로 된 진지를 보호하고 지탱하는 역활을 하기 위해서 포진지를 둘러져 있습니다.
▼ 숲이 우거져 정확한 높이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4미터 이상은 되고 흙으로 된 진지부분만 해도 2미터 이상은 될 정도이니 적의 함대 포탄 공격에서도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 맨 끝자락에 출입문이 있었는데 그곳에 포탄을 적재하는 탄약고의 기능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겨우 사람 한명 지나갈 수 있는곳인데 포탄적재를 하는 탄약고가 아니라면 어떤 용도였을까요?
▼ 유탄포의 경우 3문, 3문씩 조를 이루어 앞뒤로 배치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부분과 뒷부분에...
▼ 겨우 1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인데 이곳에 1개 분대 병력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내부의 경우 불을 켜지 않으면 너무 어둡더군요.
▼ 높이를 보면 여기도 적어도 4~5미터 정도 되어보이고 이정도의 콘크리트 두께라면 대단한 것인데 이것을 1904년에 만들었다고 하니 일본군들이 얼마나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려고 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증명합니다.
▼ 안쪽의 경우 너무 어두워서 카메라 플래시로 해도 찍기가 힘이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내부는 크지가 않았습니다.
▼ 콘크리트 두께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 여러군데 있는 계단이 있는데 올라가서 본다면 포대진지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 외양포에서 가덕도등대방향을 본 모습으로 외양포를 오기위해서는 조그마한 콘크리트 도로를 와야합니다. 지금도 겨우 차한대가 지나갈 수 있는데 당시로서는 육지로 가는 것은 힘이 들었을 것이고 배로 왕래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 뒤에 보이는 산에서 포 사격시 측정을 위한 관측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 포진지에서 바라본 외양포 마을의 모습으로 일본군들은 포진지 앞에 마을을 조성하여 거기에서 숙식을 하였습니다.
▼ 포진지 옆에는 아직도 많은 수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대나무를 심어 위장을 했던 것이 100년이 넘은 지금에도 자라고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들은 현재의 진해땅인 웅천을 들어와서 자신의 땅처럼 사용하였고 300여년이 지나 다시 진해땅으로 들어와서 진해로 들어오는 길목에 이런 포진지를 만들어서 영구히 자신의 땅으로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의 한 행동이 정당하다고 하는 일본인들이 우리땅을 노릴지 모릅니다.




































덧글
가슴 아픕니다.
저런 곳을 잘 보존해서 후세들의 호국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교육 현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하네요.
그나저나 일본식 가택이라니... 저렇게 생긴 집들을 가끔 봐왔는데 저게 일본식 가택이라니 새로운 사실이군요.
여정 중 만나신 강아지가 참 귀엽네요, ㅎㅎ.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제가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시고 알고 계시군요! 대단한것 같습니다.
사이트 내용을 보면서 정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것이 있는데요
포진지의 축대에 와플형옹벽이라는 것이 포의 뒤편에 쌓여져 있는데 이것이 소음방지용이라고 하던데
맞는지요?
당시 무기의 경우 멀리 날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저 유탄포의 경우 1900년 이전에 만든 것이라 제가 볼때에는 적의 공격을 막기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능하실까요?
점차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사라져가는 가덕도의 역사를 아이들과 함께 돌아보기 위한 기행입니다.
하지만 저역시 다른 곳에 약속이 있어서 참가하기가 곤란합니다. 이렇게 신경써주시고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산역사교사모임이 잘 진행되고 번창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들 보고 많이 얻어갑니다.
아이들에게 가덕도의 많은 면들을 알려줄수 있을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