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현읍성_06(글자 위주로) 읍성(邑城)



그동안 진해현읍성에 관련된 글을 포스팅하였는데 필자의 글을 적는 특성이 사진을 많이 삽입을 하는편인데 유장근교수의 도시탐방대에 자그마한 책자를 만드는데 글을 넣으려고 하니 너무 길어져서 이전 글을 정리하여 옮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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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현은 조선 태종13년에 개현이 된다. 이전에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고현리에 있었던 우산현의 읍치기능을 현 진동면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옮겨오면서 진해현의 기능을 하게 된다.

고지도를 보면 진해현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데 해동지도에서 진해현성의 모습을 보면 성문은 3개(동,서,남문) 성곽에는 여장을 그려 놓았으며 읍성안에는 객사와 아사의 모습이 보인다. 광여도에서 본 진해현성의 모습으로 읍성은 둥글게 조성이 되어 있으며 성문은 1개가 있으며 읍성안에는 좌측으로 창(서창,동창등으로 사용하는 창고) 아사(동헌,내아) 객사가 보이며 우측에는 봉수대가 보이는데 봉수대는 가을포봉수대이다. 아사의 위치가 위 해동지도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객사좌측이 동문 객사 우측이 서문이며 동헌의 경우 객사에서 서측 방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객사 앞에는 외삼문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주요 도로를 보면 객사에서 남측으로 내려온 남문이 가장 큰 도로임을 알 수 있고 도로가 남문과 동문이 연결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를 보면 진해현성에 관하여 알 수 있는데 진해읍성 밖을 보면 동측과 서측에 숲이 조성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읍성과 광양읍성, 상주읍성의 경우 읍성 밖 숲을 조성하였는데 숲은 풍수지리에 따라 음과 양의 기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비보림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진해읍성 동과 서측에 있는 숲 또한 풍수지리적 성격을 뛴 비보림이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의 경북궁을 만들 때에도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건설한 것처럼 각 지역의 읍치 또한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건설하였다. 보통 읍성의 경우 각종 관아들을 주산을 중심으로 남으로 배치하고 때에 따라서 동서로 배치를 하는 것에 비해 진해현의 경우 주산인 취산을 중심으로 동남방향으로 배치를 하였다. 진해읍성을 보면 주산인 취산으로 남측방향으로 좌측인 옥녀봉의 줄기인 외청룡과 우측인 인성산의 줄기인 외백호가 감싸고 있으며 내수구인 태봉천과 진동천이 좌우로 흐르고 있으나 내청룡과 내백호가 없어서 명당으로 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따라서 내청룡과 내백호를 대신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1872년 지방지에 나온 진해읍성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은 비보림인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 내청룡과 내백호가 진해읍성 좌우에 들어서게 되고 명당 옆에는 해자를 파서 좌우로 물이 흐르게 하여 명당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또 내수구인 태봉천과 진동천이 만나서 바다로 흘러가는 지점에 산이 있는데 고려시대때 현이었던 우산이다. 이 우산이 풍수에서 안산의 기능을 하여 명당으로 기능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객사의 당호도 우산관이라고 사용하였다.


그럼 진해읍성은 어떤 모습이며 읍성 안에는 어떤 건물들이 있었으며 건물의 기능은 무엇이며 누가 있었을까? 진해현 읍성의 기록 중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성의둘레는 1.325척 4촌이며, 시설물로는 높이 3척의 여장과 적대 6개소, 문이 3개소, 옹성이 2개소, 여장382개소, 우물이 2개 있었다고 한다.

 지적도와 고지도를 기준으로 재구성하여 진해현성(진해읍성)의 성곽도이다. 파랑색으로 된 부분이 읍성의 성곽으로 진해읍성의 경우 직사각형으로 된 평지읍성이고 2개의 옹성이 있고 고지도를 기준으로 주 도로인 남,동측에 옹성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치의 경우 성곽의 각이진 곳에 배치를 하고 서측성벽이 동측성벽보다 더 길어서 그곳에 치성을 배치하였다. 파랑색으로 적힌 부분은 현재 잔존하는 관아지와 건물의 모습이고 빨강색으로 적힌 부분은 필자가 추정하는 부분이다.

진해현 읍성중 행정의 중심인 동헌을 보자 진해현 관아 및 관사유지의 경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4호로 조선 순조 32년(1832) 진해현감 이영모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1832년 이전에는 동헌이 없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진해현의 경우 고려 공민왕때 현으로 승격되고 조선개국과 함께 진해현의 기능을 했기 때문에 동헌의 경우 조선 초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고지도를 보면 더욱 더 정확해진다. 해동지도(1750년대에)에도 아사가 표시되어져 있고 광여도(1800년대)에도 아사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동헌이 분명히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해동지도와 광여도, 지방지를 기준으로 봐서 처음에는 서측에 동헌을 건축하고 19세기 초반 서에서 동으로 동헌을 옮기고 1832년에 지금의 동헌자리에 진해현감 이령모가 건립하였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조선읍성의 동헌의 경우 옮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창원읍성의 경우도 서측에서 동측으로 옮기게 된다.) 건립 당시 함께 지어진 건물은 형방소, 이령청, 삼문, 착사, 마방 등이었다고 한다.

그럼 현재의 동헌이 아닌 예전의 동헌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삼진중학교 운동장이 구. 동헌의 자리가 아닌가 추측을 한다. 그렇게 추측을 하는 이유는 해동지도와 광여도에서 나오는 아사의 위치 때문이다. 아사 즉 동헌이 한차례 옮기게 되는데 그 장소가 삼진중학교 운동장으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삼진중학교 운동장에 있는 오래된 나무이다.
 

 동헌은 읍성의 가장 행정의 중심이고 수령의 집무처이다. 이곳에서는 행정을 펼치고 소송, 재판 등을 진행한다. 수령의 경우 부임을 하면 1,800일(5년)을 근무하는데 이때에는 가족을 데리고 오는 경우이고 가족을 데려오지 않는 경우 900일이었다고 한다. 진해동헌의 안내판을 보면 "정면 7칸, 측면 3칸의 일자형 평면이며 양측 1칸의 방과 중앙에 우물마루를 편 대청을 두었다. 건물의 형태는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다. 그러나 마루 기둥 중 일부 각주를 사용한 것이 보이는 바 이는 뒷날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정면 7칸은 기둥이 7개라는 것이며 측면 3칸은 측면에서 보았을 때 기둥이 3개라는 뜻이다. 양측1칸의 방이란 좌,우1개의 방이 있다는 뜻이고 동측의 방을 상방이라고 하고 서측의 방을 협방이라고 하는데 수령은 상방에서 근무를 하고 협방의 경우 통인이나 급창이 근무하는 곳이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생각하는 방위의 서열때문인데 동쪽 방위각이 서쪽방위각 보다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측에 있는 방은 잠을 잘 수 는 있지만 수령은 이곳에서 잠을 자지 않고 내아로 가서 잠을 잤다. “중앙에 우물마루를 편 대청을 두었다“라는 말은 대청마루의 모양이 세로 방향에 짧은 널을 깔고 가로 방향에 긴 널을 깔아서 ‘井’ 자 모양으로 짠 마루를 가르킨다. 팔작지붕목조와가란 ”한문의 八자 모양으로 된 목조건물이고 지붕이 기와로 되어져있다“ 라는 뜻이다.


 동헌의 경우 사법권을 집행하는 장소로 법정이라고 불리운다. 지금도 우리가 법원에 가면 만나는 것이 법정이다. 법정에서도 계급에 따라 서있는 위치가 틀린데 수령의 경우 대청마루에 의자에 앉아있고 수령 옆에는 통인이나 서리가 앉는다. 대청마루라고 해서 똑 같은 것은 아니고 진해현 동헌의 대청마루를 보면 층이 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안쪽이 높고 대청마루쪽이 낮게 되어있다. 높은 곳에 현감이 의자에 앉는 위치이고 낮은 대청마루가 통인이나 서리가 앉는 곳이다. 대청마루와 뜰 사이에 있는 돌로 된 부분을 섬돌이라고 하는데(몇 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공간) 여기에 급창과 비장이 서있는 장소이다. 
 
 뜰에는 협의자들이 끓어 엎드려 있으며 형리와 사령들이 서있다. 통인이란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나이가 어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리는 기록을 적는 사람이고 급창은 수령이 명을 내리면 복창하는 사람이며 비장은 수령의 비서이다. 진해 동헌에 있는 노거수는 동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필자가 삼진중학교에 있는 노거수를 근거로 구.동헌이 있었다고 추정을 하였는데 이는 동헌에서 반드시는 아니지만 노거수를 심는다. 이는 노거수가 재판에 빠짐없이 입회하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진중학교에 있는 노거수를 근거로 그 지역이 구 동헌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동헌을 보면 현판이 있는데 동헌이라고 적혀있다. 우리가 모두 이름이 다른 것과 같이 고을마다 동헌이나 객사를 부를 때 사용하는 명칭이 달랐다. 무장읍성 동헌의 경우 취백당, 고창읍성의 경우 평근당, 낙안읍성의 경우 사무당이라고 불리었다. 이외 많은 곳에서 동헌의 당호를 따로 정해 불리었는데 진해읍성의 경우 그냥 동헌이라고 적혀있다. 진해읍성의 동헌이 무엇으로 불렀을까? 동헌의 당호는 화류헌(化流軒)이라고 한다.


 동헌인 화류헌(化流軒) 서측편에 진동면사무소가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그곳에 내아가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동헌과 내아는 보통 옆에 있고 아주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이고 일제강점기때 내아를 허물고 그곳에 관공서를 세웠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후 해방이 된 후 면사무소가 들어섰을 것으로 보인다. 동헌과 내아의 경우 담장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업무공간과 주거공간의 분리를 위해 했기 때문이고 동헌에서 내아로 출입할 수 있는 작은 문이 있는데 협문이라고 부른다.

 그 협문을 만들 때 네 개의 기둥으로 만든 것이 사주문이라고 하는데 동헌 입구에 있는 사주문이 있어야할 곳은 동헌과 내아 사이의 협문으로 생각이 드는데 왜 동헌입구에 있을까? 화류헌(化流軒) 뒤편에는 현재 진동면사무소 창고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책방 즉 책실로 추정이 되는 곳이다. 책실은 수령의 자제가 공부를 하는 곳인데 책실의 경우 동헌과 내아와 함께 같은 공간에 배치를 많이 했음으로 근거로 추정을 한다. 현재 진해현 동헌인 화류헌의 경우 1981년9월, 1982년7월 보수하였다고 한다.


 진해현 동헌앞에 있는 사주문은 보통 동헌과 내아사이에 난 자그마한 협문을 가르키는데 사주문이 동헌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인다. 보통 이곳에 내삼문이 있어야 하는 것에 비해 사주문이 있는 것은 후세에 복원을 했거나 내아에 있었던 사주문을 이곳으로 옮겨왔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내삼문의 경우 솟을 대문을 사용하여 육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주문과는 크기와 높이에서 차이가 난다. 사주문과 동헌은 바로 일직선상으로 있는데 동헌 앞에 있는 문의 경우 대부분이 내삼문이다. 내삼문은 동헌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곳에 문지기가 항상 있다. 동헌에 수령을 만나기가 쉽지만 않음을 보여주고 동헌 수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헐소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대기를 해야했다. 
 
 내삼문 앞에는 외삼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진해현 읍성안에는 남아있지 않다. 외삼문의 경우 가운데 문은 수령이나 중앙의 높으신 분들이 다니고 좌측문은 양반이나 육방,사령들이 다니고 우측문은 백성들이 다니는 문이었다고 할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문을 통과하는데도 신분에 따라서 다르게 출입을 하였던 것이다.

 진해읍성 동헌을 들어가기 전 먼저 만나는 것이 유허비 또는 선정비, 공덕비인데 16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선정비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있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보통 남문앞에 세워지는 곳이 많기때문이다. 진해읍성이 무너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올 확률이 높다. 원래 선정비의 경우 그동안 정치를 잘하여 백성들이 떠나가는 수령(현감)의 뜻을 기리는 선정비이다. 꼭 정치를 잘한 수령에게 주는 것은 아니고 반 강제적으로 진행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선정비를 위한 모든 세 부담은 백성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선정비가 그리 반갑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들어 내놓고 말은 하지 못하니까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전북 고창군 무장읍성의 경우 선정비가 있는데 선정비의 하단의 거북이 머리가 고개를 돌리고 웃고 있는 표정의 선정비들이 있다. 이는 선정비에 대한 불만을 석공이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나주읍성에도 많은 선정비중 거북이 고개가 돌아간 것이 많이 있다. 또 어사가 출두한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선정비의 글자를 진흙으로 채우기도 하였는데 지나가는 어사가 고을을 잘 다스리는 수령가 많다는 오해를 할까봐 진흙으로 채우기도 했다고 한다. 

 선정비 아래에 거북이 목의 경우 하단에 시멘트와 함께 묻어버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거북이가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관리가 힘든면이 있겠지만 흙으로 했으면 거북이의 모습도 알기 쉬울 것 같은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비석에 거북이가 있는 것은 거북은 수명이 길기때문에 영원과 길상(吉祥)을 상징한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것을 만지면 복이 온다고 한다. 비석 밑에 있는 거북이를 귀부라고 한다.


 진해현감중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 사상의학의 창시자인 이제마이다. 이제마의 경우 진해 현감으로 1887년 부임했다고 하는데 진해현은 물론 웅천,고성 등지 까서 치료를 했다고 한다. 이제마 말고 유명한 사람의 경우 안중근의사의 할아버지이신 안인수가 진해현 현감을 지냈다고 한다. 

 진해현 객사는 우산관인데 우산관의 내력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진동만의 중심은 고현리에 있는 우산현이다. 우리나라의 지명 중 고현이라는 지명이 많이 있는데 거제의 고현, 하동의 고현, 거제의 고현, 수원의 고현, 익산의 고현, 마산의 고현 등은 예전에 현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함으로 한자로 古縣을 사용하는데 진동에 있는 고현도 예외는 아니다.


 객사인 우산관의 경우 남문에서 출발하여 북측 방향으로 걸어오면 가장 처음 만나는 관아 건물지이며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 객사이다. 객사는 임금의 권한을 상징하는 건물로 왕의 사당이며 각 읍치마다 있었다. 주관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대소관헌이 모여 대궐을 향하여 배례하던 곳이다. 이러한 것을 망궐례라고 부른다. 
 
 객사건물의 형태를 보면 한 개의 건물이지만 세 개의 건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가운데 높게 솟은 곳을 주관이라고 하고 좌우에 있는 곳은 익헌이라고 하는데 사신이나 파견된 관리들이 묵었다. 동측 익헌에는 문신이 서측 익헌에는 무신이 사용하였는데 동측 방위가 서측 방위보다 높게 생각한데에서 있다. 익헌은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주관보다 지붕을 낮게 하여 격식을 갖춘 것이 객사의 특징이다. 객사의 경우 임금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곳이자 관리들의 숙소기능 두 가지를 하는 이었다. 

 진해현 객사인 우산관의 경우 1985년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현재는 삼진중학교에 주춧돌만 남아있다. 우산관의 경우 정면 11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낙안읍성의 객사인 낙안지관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인다. 객사에서 남측방향을 보면 기단이 있고 기단에서 객사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객사터의 경우 기단부분이 남아있는데 높이가 대략 60센치 정도 되어보인다. 이렇게 기단을 사용하는 이유는 객사의 위엄때문이다. 객사의 경우 왕권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에 다른 건물보다 높고 크게 만들었기 때문인 이유이다.

 객사터에서 남측을 바라보면 진전중학교 담장과 창고건물이 보이는데 이 부근에 객사의 내삼문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객사 또한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는데 이렇게 내삼문과 외삼문을 사용했던 곳은 동헌과 객사, 향교이다. 나주읍성 객사인 금성관을 보면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중삼문이 있기도 할 정도이다.  

  객사 내삼문앞에는 동헌으로 이어지고 동측성문으로 이어지는 T자형 도로가 나온다. 읍성의 경우 성문에 따라 도로가 달라졌는데 성문이 4개일 경우 +로 된 도로가 성문이 3개일 경우 T자형의 도로가 발달이 되었는데 진해현읍성의 경우 성문이 3개임을 보았을때 T자형의 도로가 발달이 되었다고 본다. 객사에서 남문까지의 거리는 105미터이다.

 객사인 우산관에서 남측으로 내려오면 남문이 나오는데 남문은 진해읍성의 주 출입문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고 수령이 행차시 사용던 곳이다. 이곳에 장이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나라 읍성의 대부분이 남문을 중심으로 장이 서게 된다. 물론 때에 따라서 북문, 서문, 동문을 중심으로 장이 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진해읍성의 경우 남문을 중심으로 장이 섰고 1872년 지방지에 보면 10일마다 장이 열렸다고 한다. 이러한 장의 영향을 받아 현재 남문을 중심으로 진동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위성지도를 보면 옹성의 흔적까지 발견 할 수 있는 것이 진동시장이다.

 진해현 객사의 수난을 보면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전국에 있는 많은 객사와 읍성들이 수난을 당하는데 어떤 곳은 일본 헌병들이 객사를 장악한 후 전패(殿牌)를 불태워 땅에 묻어 버렸기도 하였고 객사를 허물고 각종 관공서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진해현 객사인 우산관의 경우 다행히 객사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면했는데 진동초등학교의 교실로 사용되었다. 그후 진동초등학교가 이전을 하고 삼진중학교가 개교하면서 객사는 삼진중학교 건물로 사용되다가 1985년 화재로 유실되어 버렸다.


 동헌 앞 선정비가 있는 곳 뒷편에 향청이 있는데 현재 진동노인회관으로 사용중이다. 향청의 경우 양반들의 친목단체인 향사당에서 출발하여 수령을 보좌하는 자치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읍치의 관아 건물중 객사와 동헌 다음에 중요한 건물이 향청인데 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는 지방자치기구로서의 기능을 했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지방의회와 같은 역활을 했다. 향청의 우두머리를 좌수(1894년 이후 鄕長)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향청에서 세금을 매기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수령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향청의 우두머리인 좌수는 선거로 추천된 자를 임명하였는데, (지금 지방의회의 의회장의 경우도 선거로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향청의 경우 나이가 있어야 했고 덕망이 있는 분으로 했다.) 좌수는 풍속 교정·향리규찰·정령시달(政令示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향청은 향민을 대표해서 지방관을 감시할 소임을 하지 못하고, 때때로 그 권한을 남용하여 민폐를 끼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수령의 경우 길어야 1800일 정도 근무를 하지만 향청의 경우 고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수령보다 고을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향청건물 옆을 보면 민가와 문구점이 보이는데 문구점옆 민가의 경우 진해현 동헌의 외삼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진해읍성의 경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동헌, 사령청, 마방, 형방소이며 삼진중학교내에 객사유지가 남아있고 진동노인회관은 향청터라고만 전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곳은 없지만 진해현읍성 내에 있어야 할 것 중 하나가 질청인데 작청이라고 하기도 한다. 질청의 경우 아전들이 머물던 곳으로 이방과 함께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들이 근무하던 곳으로 수령의 경우 그 지역사람이 아니고 잘해야 1800일 정도 있다가 가는 것에 비해 아전들이 대대로 살아오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서 실질적인 힘은 질청에서 출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질청에서는 수많은 관아문서를 작성하며 무리한 세금을 거두기도 한다. 아전이란 지방관아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로 무보수로 근무하는데 여러 가지 항목들을 부쳐서 백성들에게 뒷돈을 받아서 생활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을 보면 먼저 사령청이 있는데 사령청의 경우 군령을 출입하고, 형방소의 경우 형방이 근무하는 곳이며, 마방의 경우 말을 관리하는 마굿간이다. 그밖에 관노비가 있는 관노청, 회계업무를 보는 관청, 현을 지키는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이나 병방과 군교들이 군무를 보는 장청, 호적을 매기고 기생을 관리하는 호방청, 심부름꾼들의 대기소인 통인청, 군기청, 포수청. 기생들이 거주하는 교방, 훈련청, 민원대기실인 헐소 등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창고도 포함될 것이고. 

  읍성 안에 또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연못 즉 못인데 연못은 화재가 났을 경우 소화수로 사용하기 위함인데 고지도에서는 보이지가 않는다. 또 필요한 것이 형옥 즉 감옥인데 옥이라 부르기도 한다. 옥의 경우 담장을 두르고 남녀를 구분하여 만들었는데 공간이 있다 보니 구석진 곳에 만들었는데 고지도에선 보이지가 않지만 남문과 서문사이로 추정을 한다.

 이제 성곽을 살펴보겠다. 성문 중 가장 중심인 진남문이다. 진남문의 경우 우리나라 읍성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명칭인데 진해 웅천읍성, 창원읍성, 광주읍성, 해미읍성 등에서 사용되어 지는데 여기서 鎭南問의 鎭을 보면 진압할 진자이다. 군사상 필요한 곳에 설치를 하는 진보성의 진자도 鎭를 사용함으로 진해읍성의 군사들이 진출입을 사용할 때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해현성의 남측성곽에서 해자가 있는 곳까지 거리를 측정하니 대략 33미터가 나오고 옹성지점에서 해자까지는 18미터 정도 된다. (물론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서 정확한 거리는 나오지 않고 위성사진으로 거리를 잰것임을 밝힌다.) 동측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26미터 체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18미터, 북측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도 대략 18미터가 나온다. 따라서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16~20미터 사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제 고현성 해자 발굴시 옹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5.1미터였다고 하고 웅천읍성의 경우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7.8~7.9미터였다고 한다. 거제고현읍성과 웅천읍성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와 다음위성지도에서 측정한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를 토대로 진해읍성의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를 추정을 한다면 체성에서 해자까지의 거리는 10미터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해자의 폭을 보면 북측해자의 경우 5미터, 동,남측 해자의 경우 3미터로 측정되는 골목의 기준으로 본다면 3~4미터 사이로 보여진다. 해자의 높이의 경우 보통 읍성에서 사용되는 3~4미터 정도로 추정이 된다, 해자의 기능을 보면 평상시 해자에 물이 흐르고 해자 안에는 뾰족한 나무로 만든 목익을 촘촘히 설치하여 적의 공격시 해자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조선의 읍성이나 산성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옹성의 경우 읍지의 기준으로 보면 2개로 나타나 있다. 1872년 지방지 고지도를 보면 도로가 동측과 남측에 나있는데 그 기준으로 봐서 왕래가 많은 동측과 남측에 옹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옹성은 편문식으로 되어있을 것으로 추정을 하는데 중앙문식의 옹성의 경우 읍성이 큰 고을에 설치를 하는데 진해읍성의 경우 읍성규모가 작아서 편문식으로 된 옹성일 것으로 추정한다.


 1872년 지방지를 보면 성문위에 누각이 보이는데 2층 누각이 아닌 1층 누각임을 알 수 있다. 또 성문의 경우 평거식으로 된 성문임을 알 수 있지만 해동지도나 광여도에서는 개거식 성문으로 되어있다. 이는 화공이 그림을 그리면서 생략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식의 성문이었다라고 단정을 짓기는 힘이 든다. 다만 진해현읍성의 규모와 진해현의 인구와 통행량을 생각한다면 개거식의 성문보다는 평거식의 성문일 확률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진남문으로 사용된 남문의 경우 평거식 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진해현 읍치에 나온 치성이 6개이다. 치성의 경우 진해현읍성이 남북보다 동서로 길이가 더 길고 남동측보다 남서측의 체성의 길이가 긴 점을 생각해서 남서측과 북서측에 치성을 두었고 체성이 만나는 지점에 치성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성벽의 높이는 현재 알 수가 없지만 조선초기 읍성 축성시 사용한 4~5미터 사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진해읍지에 의하면 높이는 9척(현 2.7미터)였다고 하는데 읍성의 성벽 높이치고는 너무 낮다. 체성의 길이를 측정해보니 대략 650미터이고 면적은 29,118.55㎡ 인데 이를 평으로 계산하니 8,808평으로 나온다.

 동문지 앞에 골목이 있었는데 민가들이 있지 않고 공터가 있다. 실록을 보면 "진해현읍성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진해현읍성을 옮겨야 한다"는 비변사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 기준으로 본다면 동문 앞 골목까지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한다. 서문의 경우 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했는데 옹성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진해현 읍성의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힘이들지만 세종 제임기간중 초기에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1420년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해현 읍치에서 바다쪽을 보면 야산이 있는데 가을포봉수대가 있었다. 가을포 봉수대는 적이 나타나면 알려주는 기능을 하는데 진해읍지에 의하면 봉수대에 봉군들이 있었으며 10명이 교대로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이 가을포봉수의 경우 함안을 거쳐 한양까지 전달이 되는데 빠르면 48시간안에 도달한다고 한다. 


 진해현 읍성안에는 장소도 좁고 각종 관아건물들이 많아서 아전들이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이고 양반들의 경우 수령과 마주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해서 자신들만의 씨족마을을 만들어 생활을 하였는데 진해현의 경우 진해현성 옆 사등리에 보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 사등리에는 진해현읍성을 보좌하는 사등성지가 있었는데 토성이었으며 조선시대때 축성하였다고 한다.

 진해현 읍성 북측에는 진해현 향교가 있는데 지금은 마산향교라고 불리운다. 향교가 있는 동네는 교동리,교동,명륜동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데 마산향교는 현재 마산시 진동면 교동리에 있다.향교의 교자를 사용해서 지명을 지었고 이런 방식이 전국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향교의 경우 보통 읍치 즉 관아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를 하였는데 읍성의 바깥에 설치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읍성내부에 설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산향교는 조선 태종14년(1418)년에 진해현이 설립이 되면서 현 위치에 향교가 들어서게 된다. 그후 임진왜란때 진해현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이 되면서 불타 없어졌는데 인조(1623~1649)때 복원을 하였다가 1920년 일제강점기때 없어졌다. 그러니까 일본에 의해 2번이나 없어진 것이 마산향교이다. 그후 1990년 11월 복원하였다고 한다.

 마산향교의 외삼문으로 기존에 봤던 향교의 외삼문과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향교의 외삼문위에는 보통 누각이 있고 그 밑에 외삼문이 있으며 오른쪽에 있는 익문의 경우 문의 크기가 낮게되어 있으나 마산향교의 경우 틀리다. 문이 요즘에 사용하는 문 처럼 문의 높이가 높고 대문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보통 향교의 경우 문이 3개인데 첫번째가 홍살문이고 두번째가 외삼문이고 마지막이 내삼문인데 마산향교의 경우 홍살문이 없고 외삼문의 경우도 너무나 현대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마산향교를 들어서면 좌측에 서재가 있고 정면에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은 유학을 강의하고 인륜을 밝히는 강당이며, 교육용으로 《논어》《맹자》《소학》《시전》등을 교육했다. 
 

 향교의 대성전에서는 춘, 추 두 번의 제향이 거행되고, 지금도 음력 2월과 8월의 초정일에 유림에 의해 향사가 받들어지고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재정에 의해 설치, 운영된 공립 중등학교격인 교육기관으로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와 유생에게 유학을 교육하는 교학기능과 함께 지방의 문화 향상 등 사회교화기능도 갖고 있다. 향교의 교수, 훈도직은 정규관원으로서 임명 하도록 하였고, 학생정원은 부, 대도호부, 목 90명, 도호부 70명, 군 50명, 현 30명 으로 규정하였는데 마산향교의 경우 진해현 관계로 학생의 정원은 30명이다 . 향교에는 공자 이하 중국의 저명한 유현(儒賢)과 우리나라 역대의 유현을 모시고 있는 대성전과 학업을 강의하는 명륜당을 비롯하여 교생들이 기거하는 동, 서의 양재가 있어, 한양에 있는 성균관을 축소해 놓은 것 같도록 되어져 있다.


 중앙에 설치된 중앙교육기관이 성균관이라면 지방은 향교인 것이다. 지방에 설치된 향교는 지역의 특성에 따라 전학후묘와 전묘후학 등 배치가 약간에 차이가 있는데 전학후묘(前學後廟)란 앞에 공부를 할 수 있는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두고 뒷면에 공자 등을 모시는 대성전을 두는 것이다. 반대로 전묘후학의 경우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는 것이다. 마산향교의 경우 전학후묘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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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부산촌놈 2010/07/15 17:25 #

    성 밖에 숲이 있었다니...

    경북 성주군에 위치한 성주읍성에도 그렇게 숲을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그 숲은 '성밖숲'이라 불리며 성주군민들의 휴식처를 제공해주고 있죠.

    풍수지리를 어떻게 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 흥미로운 것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 팬저 2010/07/15 17:43 #

    조선의 읍성의 경우 다 풍수와 연관이 있다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풍수에 좌청룡 우백호가 약하다면 이런 비보림을 조성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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