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부산진성의 경우 일본 왜성의 성벽기울기와 2중으로 된 구조 그리고 직선으로 된 성벽으로 이루어졌다라고 이야기 하였는데 1909년 나온 지적도를 보니까 흥미로운 것이 발견되어 부산진성의 형태에 관한 글을 적습니다.
부산진성의 경우 저번에도 이야기한 것 처럼 4기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번째가 성종 21년에 지은 부산진성이고 그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반발하면서 열심히 싸웠지만 함락된 것이 1기입니다. 이때까지는 조선초기 연해읍성의 방식으로 축성되었을 것입니다. 장소의 경우도 현재 정공단이 있는 부근이라고 합니다.
2기는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조선초기 부산진성에서 떨어진 곳 현재의 부산진성(자성대)에 자성대왜성을 축성하였습니다.
3기는 7년전쟁이 끝나고 조선군이 자성대왜성을 이용하면서 조선군에 맞는 방식으로 만들어 사용한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모습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그림 고지도나 사진들의 경우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모습입니다.
4기는 해방이 되고 나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74년 서문과 동문 등을 만들면서 만든 부산진지성의 모습입니다.
저번에도 이야기 하였지만 부산진지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부산진은 수군기지를 이야기하고 지성이라는 것은 임진란때 세운 부산왜성을 보조하는 왜성이라는 성격이 지성입니다. 웅천왜성을 보면 웅천왜성이 본성이고 명동왜성, 자마왜성이 웅천왜성의 지성이 됩니다. 그렇다면 명동왜성과 자마왜성을 지성으로 사용했지만 고유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때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왜군들이 임진란때 세운 왜성을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명칭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아직도 사용중입니다. 보시면 왜성의 경우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성보다 많고 중요한 산성의 경우 지방문화재로 지정 받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또 일본군들이 부산자성대왜성을 사용한 것은 불과 7년이지만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경우 400년이 되는 시기인데 불과 7년을 사용한 부산왜성과 자성대왜성을 중요시하여 부산진지성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부산진지성이 아닌 부산진성 즉 조선후기 부산진성으로 표현합니다.
▼ 1872년 지방지에서 본 동래부의 모습으로 상당히 자세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정산성과 동래읍성, 경상좌수영성, 부산진성, 왜관, 다대포진성이 그려져 있으며 두모포진, 서평포진의 경우 간락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부산진성의 경우 영가대가 보이고 포구의 모습이 보입니다.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1872년 지방지에서 본 부산진성의 모습으로 4대문의 모습이 다 보이고 부산진성안에 자성대왜성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부산진성안에 객사(拱辰館 공진관)와 동헌(劒嘯樓 검소루)의 모습이 보이고 영가대의 모습과 포구에는 전선의 모습도 보입니다.또 동천의 경우 전체적으로 부산진성을 둘러싸고 흐르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부산진성을 육지에서 가기위해서는 서측으로 출입을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지도에는 북문에서 나와 좌수영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동천을 지나가야 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고 그림인 김윤겸의 영가대라는 작품으로 이곳에 부산진성과 영가대의 모습이 보이는데 영가대의 경우 조금 높은 언덕위에 있으며 부산진성의 남문과 동문사이에 배들이 정박해 있으며 자성대왜성이 있는 곳에는 산이 높게 그려져 있습니다. 또 서문에서 나오는 곳에 민가들이 모여 있습니다.
▼ 이성린(李聖麟),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1748년경의 부산진성과 영가대의 모습으로 위 김윤겸의 영가대의 모습과 같이 남문과 서문사이에 배들이 있고 서문을 중심으로 민가들이 들어서 있으며 자성대가 있는 곳은 아주 높게 그려져 있습니다. 북문이 있는 곳과 서문에서 북문 방향을 보면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는데 이 부분이 궁금합니다.
▼ 사로승구도중 영가대를 확대해 본 모습으로 영가대 앞까지 성곽이 이어져 있고 서문 앞에는 민가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일본인이 그린 회본태합기의 부산진성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부산자성대 왜성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성 특유의 성곽 기울기와 모습들이 보입니다.
▼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병풍중 한장면으로 동래부사가 왜관으로 가는 행차모습인데 그중 하나에 부산진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 위 병풍중 부산진성이 있는 부분만 보겠습니다. 4대문의 모습이 보이는데 지적도에 나온 4대문과 위치가 비슷합니다. 서문앞에 다리가 보입니다. 그리고 서측성벽의 경우 해자의 모습이 보이고 영가대와 남문사이에 수구의 모습도 보입니다. 부산진성안에는 객사(拱辰館 공진관)와 동헌(劒嘯樓 검소루)의 모습도 보이고 자성대왜성이 있는 곳에는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산진성의 성곽의 경우도 직선을 이용한 성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문과 남문을 지나 동헌을 가기위해서는 2층으로 된 누각을 지나가야 하는데 누각옆에 2중으로 된 성곽이 보입니다. 그리고 동문 앞에 민가와 서문앞에 민가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동래부사접왜사도를 보면 북문이 있는 곳에는 바닷물이 들어와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동래부사접왜사도의 경우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이고 하나는 국립 진주박물관에 있는 것이다. 아래 동래부사접왜사도중 위에 있는 것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이고 아래에 있는 것이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는 것인데 위에 나온 부산진성의 경우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는 동래부사접왜사도를 기준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두개의 동래부사접왜사도를 보면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래읍성의 표현도 그렇고 부산진성의 경우 동측에 있는 동천의 표현이 조금 다르고 영가대 포구 옆 2층 누각의 크기 등 작은 부분이 틀리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합니다.
▼ 부산고지도로 20세기초에 제작되었으며 10폭 병풍에 나오는 부산진성의 모습입니다.
▼ 부산진성이 바다와 인접한 모습을 알 수 있는 그림으로 위에서 나온 고 그림의 경우 남문과 동문사이에 바다와 접한 부산진성의 모습인 것에 비해 부산고지도 병풍의 경우 북측의 경우 바다와 인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동래부중 부산진성의 모습을 보면 서측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바다로 되어져 있습니다. 반도의 모습과 같음을 알 수 있으며 성곽이 2중으로 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이 고 그림도 일본인이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데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부산진성의 모습이 보이는데 왜성 방식의 성곽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 서문과 남문, 영가대의 모습이 보이고 서문 앞에는 다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또 남문 위에 동문이 있는데 잘 봐야 보입니다. 동문위의 경우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데 이 그림을 기준으로 보면 서측과 북측이 육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3중으로 된 성문의 방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 경상좌수영 전체를 그려진 그림중 부산진성의 모습입니다. 부산진성의 경우 부산왜성그림과 비슷하게 왜성 특유의 방식으로 축성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고 북,서측을 제외한 남,동측의 경우 바다와 인접하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1909년 지형도로 지형도의 경우 1909년 지적도를 기준으로 다시 작성하였는데 지적도의 경우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나온 자료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09년의 모습인데 이때 부산진성의 흔적은 확실히 알 수 있고 동문주의에 있는 동천의 경우도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 지적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부산진성의 출입을 하기 위해서는 서문이외에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서문 앞에 파란색으로 그려진 것은 필자가 그렸는데 해자로 추정이 됩니다. 그리고 서문 앞에 철길이 있는데 부산진역으로 가는 철길로 바로 영가대 옆으로 지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당시 부산진성안에 현재의 범일로의 모습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09년 당시 부산진성의 성곽은 남아있으나 객사등 내부 관아 건물들은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을 이 지형도 하나로 알 수 있습니다. 영가대 주위로 포구가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자가 A와 B로 포기를 하였는데 A의 경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바다를 매립하기 위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있어서 표시를 하였고 B의 경우는 육지로 보입니다. 부산진성의 동문 주위에는 전형적인 바다의 모습들이 보입니다.
▼ 부산진성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1905년도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위 1909년 지형도와 비슷합니다. 따라서 이 사진의 경우 1909년~1910년대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가대의 모습이 보이고 자성대왜성이 보이는데 그 위로 바닷가의 모습이 보이는데 지형도와 비슷합니다. (거의 같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영가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인데 이때는 위 사진과 달리 철길이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다. 석빙고님이 보기에는 철길이 지나가는 것이라고 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기찻길이 지나가네요. 따라서 이 사진의 경우 1904년 이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사진의 경우는 위 사진과 비슷한 시기일 수 있겠습니다. 영가대 옆에 보이는 누각의 경우 서문일 것으로 보이네요.
▼ 1925년 그림지도의 모습으로 출처는 우리문화재연구원입니다. 그림 지도를 보면 위 1909년도와 달리 영가대 주변의 포구의 경우 거의 매립이 다되어져 있으며 조선방직회사가 부산진성 북측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부산진성 동측의 경우도 상당부분 매립이 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서문위에도 논으로 되어져 있는데 이부분도 매립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산진성의 경우를 보면 북문,서문,동문의 경우는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 남문과 남측성곽의 경우 무너져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가대주의로 매립이 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문밑에 들어설 매립된 지역에 성남초등학교가 들어서는데 성남초등학교의 개교는 해방이된 이후 1946년입니다. 이미지출처 : 우리문화재연구원
▼ 독립기념관에 보관중인 부산진성의 사진으로 전체적인 부산진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진입니다. 객사(拱辰館 공진관)의 모습과 서문(金壘關 금루관)의 모습이 보입니다.
▼ 서문인 금루관(金壘關)의 모습과 함께 서문앞에 홍살문의 모습이 보입니다.
▼ 현재의 지도에 1913년 부산진성 지적도를 대비한 것으로 부산진성의 규모와 형태를 알 수 있습니다. 고지도와 지형도, 지적도, 사진 등을 기준으로 보았을때 부산진성의 경우 남측은 확실히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동측의 경우 동천이 지나가서 자연적인 해자의 역활을 하고 있었으며 서측의 경우 서문앞에 인공적으로 해자를 만들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측과 북측의 경우 육지와 접하고 있는데 서측의 경우 병목과 같이 좁게 만들어 놓아 육지측 방어에 유리하게 되어져 있으며 북측의 경우 논으로 된 개활지로 보입니다. 따라서 적이 접근하기는 쉬워도 평지라 많은 희생이 뛰따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필자가 왜 지형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자성대왜성때문입니다. 자성대왜성의 경우 임진왜란 발생 후 1593년에 축성을 하는데 왜성의 특징을 이용하여 축성을 한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웅천왜성과 안골포왜성, 죽도왜성 등의 경우를 보면 삼면이 바다이고 한면만 육지와 연결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이는 육지에서 오는 적을 막기위한 것이고 한면만 방어하면 되는 이유도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부산진성의 경우 왜군이 물러나고 나서 조선수군에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왜군이 사용한 성곽을 다시 사용한 곳은 부산진성 말고 서생포왜성을 다시 사용한 서생포진성이 있습니다. 서생포진의 경우도 부산진성과 비슷한 방식이라 봐야할 것입니다. 다만 객사나 동헌 무기고 등 조선군이 사용하기 편리하게끔 관아 건물을 지었고 4대문의 경우도 왜성방식이 아닌 조선군의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다만 성벽의 기울기를 봐서는 왜성의 방식이고 부산진성의 평면도로 봐서는 조선군의 방식이 아닌 왜성의 방식인데 이 부분의 경우 임진란때 축성한 것인지 이후 왜성의 방법을 이용한 축성인지는 현재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부산진성의 경우 임진란이 끝난 후 일본군이 사용한 왜성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부분적으로 조선군에 맞게 사용했으며 방어에 유리하게끔 동측과 남측의 경우 육지에서 접근하기 곤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산진성의 경우 저번에도 이야기한 것 처럼 4기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번째가 성종 21년에 지은 부산진성이고 그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반발하면서 열심히 싸웠지만 함락된 것이 1기입니다. 이때까지는 조선초기 연해읍성의 방식으로 축성되었을 것입니다. 장소의 경우도 현재 정공단이 있는 부근이라고 합니다.
2기는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조선초기 부산진성에서 떨어진 곳 현재의 부산진성(자성대)에 자성대왜성을 축성하였습니다.
3기는 7년전쟁이 끝나고 조선군이 자성대왜성을 이용하면서 조선군에 맞는 방식으로 만들어 사용한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모습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그림 고지도나 사진들의 경우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모습입니다.
4기는 해방이 되고 나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74년 서문과 동문 등을 만들면서 만든 부산진지성의 모습입니다.
저번에도 이야기 하였지만 부산진지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부산진은 수군기지를 이야기하고 지성이라는 것은 임진란때 세운 부산왜성을 보조하는 왜성이라는 성격이 지성입니다. 웅천왜성을 보면 웅천왜성이 본성이고 명동왜성, 자마왜성이 웅천왜성의 지성이 됩니다. 그렇다면 명동왜성과 자마왜성을 지성으로 사용했지만 고유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때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왜군들이 임진란때 세운 왜성을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명칭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아직도 사용중입니다. 보시면 왜성의 경우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성보다 많고 중요한 산성의 경우 지방문화재로 지정 받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또 일본군들이 부산자성대왜성을 사용한 것은 불과 7년이지만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경우 400년이 되는 시기인데 불과 7년을 사용한 부산왜성과 자성대왜성을 중요시하여 부산진지성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부산진지성이 아닌 부산진성 즉 조선후기 부산진성으로 표현합니다.
















1909년의 모습인데 이때 부산진성의 흔적은 확실히 알 수 있고 동문주의에 있는 동천의 경우도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 지적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부산진성의 출입을 하기 위해서는 서문이외에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서문 앞에 파란색으로 그려진 것은 필자가 그렸는데 해자로 추정이 됩니다. 그리고 서문 앞에 철길이 있는데 부산진역으로 가는 철길로 바로 영가대 옆으로 지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당시 부산진성안에 현재의 범일로의 모습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09년 당시 부산진성의 성곽은 남아있으나 객사등 내부 관아 건물들은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을 이 지형도 하나로 알 수 있습니다. 영가대 주위로 포구가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자가 A와 B로 포기를 하였는데 A의 경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바다를 매립하기 위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있어서 표시를 하였고 B의 경우는 육지로 보입니다. 부산진성의 동문 주위에는 전형적인 바다의 모습들이 보입니다.






필자가 왜 지형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자성대왜성때문입니다. 자성대왜성의 경우 임진왜란 발생 후 1593년에 축성을 하는데 왜성의 특징을 이용하여 축성을 한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웅천왜성과 안골포왜성, 죽도왜성 등의 경우를 보면 삼면이 바다이고 한면만 육지와 연결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이는 육지에서 오는 적을 막기위한 것이고 한면만 방어하면 되는 이유도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부산진성의 경우 왜군이 물러나고 나서 조선수군에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왜군이 사용한 성곽을 다시 사용한 곳은 부산진성 말고 서생포왜성을 다시 사용한 서생포진성이 있습니다. 서생포진의 경우도 부산진성과 비슷한 방식이라 봐야할 것입니다. 다만 객사나 동헌 무기고 등 조선군이 사용하기 편리하게끔 관아 건물을 지었고 4대문의 경우도 왜성방식이 아닌 조선군의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다만 성벽의 기울기를 봐서는 왜성의 방식이고 부산진성의 평면도로 봐서는 조선군의 방식이 아닌 왜성의 방식인데 이 부분의 경우 임진란때 축성한 것인지 이후 왜성의 방법을 이용한 축성인지는 현재 알 수가 없습니다.

덧글
여태까지는 남쪽만 매립지였는줄 알았지 뭡니까.
결론적으로 부산진성은 곶에다가 세운 성인 겁니까?
항상 눈팅하며 많이 배우고 관심가지고 놀러옵니다 ^^
(제발 북한정권...조용히 무너져주세요...덴장)
그런데 끝에서 다섯번째 영가대 사진에서 철길이 안보인다고 하셨는데 저가 보기에는 전주와 영가대 사이에 일직선으로 된 것과 영가대쪽으로 축대를 쌓아둔 것으로 볼 때 철길로 보입니다. 참고하십시오.
그듭 감사함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