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당시 울산왜성의 모습은?(울산왜성_01) 왜성(倭城)



울산왜성의 답사가 있고나서 울산왜성의 이야기를 올리려고 보니 여러가지 문제가 있더군요. 첫째가 울산왜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들어난 자료가 많지가 않고 일본에서 들어온 자료들도 있지만 많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이번에 이야기하려고 하는 정유재란 당시의 울산왜성의 모습입니다. 이번 울산왜성에서는 두번째의 이야기인 울산왜성의 모습입니다. 

울산왜성에 관한 사전을 찾아보면

" 1597년(선조 30) 남해안까지 쫓긴 왜군이 방어선을 보강하기 위하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대가 축성한 것인데, 석재는 대부분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울산시의 동남으로 흐르는 태화강의 삼각주에 있는 높이 50m인 학성산의 산정에 터를 만들고 본성으로 삼았다.

성곽은 산꼭대기에 동서 90m, 남북 35m의 장방형 아성을 쌓고 서쪽 산중턱에 한층 낮게 동서 50m, 남북 25m의 외성을 두었으며, 아성의 주변 산중턱에는 참호와 토루를 둘렀다. 성벽은 화강암과 잡석으로 일정한 경사를 주면서 3~8m의 높이로 쌓아올리고 아성에 2개, 외성에 1개의 성문을 북향으로 설치하였다. 아성의 성벽은 비교적 완전한 편이나 외성은 거의 허물어져서 그 기초부만 남아 있다.

석축의 방식이나 성문의 양쪽, 성벽의 네 귀에 모난 축대를 돌출시킨 것은 다른 왜성의 구조와 같다. 특히 이 성은 1597년 12월 조명연합군이 농성한 왜군을 포위하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격전장으로 유명하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일본식 산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라고 적혀 있지만 3면이 바다와 인접했다 또는 울산왜성 양면에 바닷물이 들어왔다 아니면 한면에 바다와 인접했다라는 말이 적혀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현재 울산시의 모습인데 태화강을 중심으로 남북이 나뉘어진 모습인데 울산왜성의 경우 아래 그림지도에 남구청과 태화강 위 야산에 있는데 작아서 보이지 않습니다. 필자가 이 지도를 보여준 이유는 아래 지도에 나올 예전의 모습과 비교 때문입니다.  

▼ 인터넷에서 구한 1928년 울산지도의 모습입니다. 위 다음지도와 비교해보면 태화강의 하류의 경우 거의 바다와 인접하고 폭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에 있는 울산의 경우 조선시대 당시 동헌과 객사가 있었던 읍치인데 울산읍성의 모습과 같이 T자형 도로가 발달이 되어 있으며 동으로 난 도로의 경우 병영성으로 연결이 되어져 있고 병영성의 경우 +자형 도로로 나 있습니다. 울산왜성의 경우 현재 지도에는 보이지가 않습니다만 태화강과 동천강사이에 있는데 알 수가 없네요. 조선시대 삼포개항 당시 염포는 방어진 위인데 현재 현대자동차공장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왜선의 경우 임진왜란 이전에 염포로 많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고 울산만으로 되어진 부분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에는 저런 모양이었을지는 모르겠네요.
▼ 20세기 초 울산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흑백 지도에 강에 파랑색을 모래사장에는 노랑색으로 입혀보았습니다. 울산왜성이 있는 태화강의 경우 삼각주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 지도가 먼저인지 아니면 아래지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 위 지도와 현재의 울산지도를 비교해보니 태화강의 경우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산동의 경우 여천강을 끼고 있는데 여천강의 경우 전부 매립이 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20세기 초 울산의 지도입니다. 울산시내에 많은 민가들이 보이고 울산왜성이 있는 학성주의로 민가들이 보입니다. 이 지도에도 태화강을 보면 삼각주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1967년 울산의 모습인데 사진의 출처는 울산발전연구원 역사센터입니다.파랑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반구동유적인데 울산발전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한 곳인데 여기에 신라시대 당시의 토성이 나왔다고 합니다. 울산왜성 남측으로 민가들이 보이고 전부 논입니다.
▼ 위 사진을 확대해본 모습으로 토성의 흔적이 나오는데 울산왜성의 경우 토성이 지나가는 곳에 위치 하였습니다.
인터넷에서 구한 울산왜성의 상상도인데요. 동천이 있는 곳에 왜성의 외성이 있다고 표시가 되어져 있는데 위에서 이야기 했지만 울산발전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를 해보니 신라시대 당시 토성이 보였으며 중국과 무역을 했던 흔적이 나왔다고 합니다.

반구동 유적 신라시대 최대 무역항

울산 반구동유적은 고대 항구시설

▼ 따라서 외성이라고 표시한 부분에 신라시대 토성이라고 표시하였으며 울산왜성 좌측으로 토성이 보이는데 이부분은 198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를 하였습니다.
▼ 따라서 위 상상도내에 있는 울산왜성의 경우 아래 상상도의 모습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숫자의 경우 필자가 설명을 하기위해서 작성한 것이고 나머지는 본환을 비롯하여 2지환, 3지환은 적어 놓아서 알 수 있을 것 같고 고구치 [虎口] [こぐち] 경우 표시하여 놓았습니다.  
▼ KBS에서 방영한 역사다큐프로그램에서 나온 울산왜성 상상 CG로그려져 있는데 생각보다 산의 높이가 높은 느낌을 받습니다. 
▼ 198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 당시의 모습으로 왜성의 축조방식을 알 수 있는 사진입니다.
▼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할 때 작성한 울산왜성의 도면입니다. 발굴한 곳은 사각형으로 표시하여 놓았습니다. 토성이라고 있는 부분이 보이는데 여기도 조사를 했습니다.
▼ 울산왜성 부분의 도면으로 본환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북측과 동측으로 난 고구치 [虎口] [こぐち]를 통과해야 하는데 북측의 경우 경사가 완만한 것에 비해 동측의 경우 상당히 가파른 것을 도면상으로도 알 수 있고 직접 가보니 그렇더군요. 보라색으로 된 부분이 보이는데 울산왜성 주위에 돌들이 자리잡고 있더군요.
▼ 아래 사진은 울산발전연구원에서 신라시대 토성을 발굴하던 반구동 유적지로 육지인데 상당히 큰 바위들이 보이는데 바닷가에서 보이는 바위들과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울산왜성에도 작지만 있더군요.
▼ 울산왜성 도면에 동측으로 난 고구치 [虎口] [こぐち]아래에 있었던 돌의 모습으로 여기만 아니고 군데 군데 있었습니다.  
▼ 인공적인 가공을 하기 위해서 한 흔적들이 보였는데 언제 바위에 파 놓았는지는 모르겠네요.
▼ 요산대(樂汕臺)'라 새긴 비석인데 요산대는 이수 삼산을 바라보며 즐기는 돈대라고 볼 수 있는데 이수의 경우 태화강을 이야기하고 삼산은 지도에 나오는 태화강 건너 삼산을 이야기 합니다. 요산대의 이야기는 하늘사랑님에 잘나와 있습니다.
▼ 울산왜성 본환에서 본 바위들입니다. 생각보다 작지 않은 바위들이 자리잡고 있더군요.
▼ 또 결정적으로 왜군들이 철수를 할때 울산왜성 선입지(船入址)에서 배를 타고 후퇴하였다고 하는데 선입지가 아래 지도 가장 아래 바위가 있는 부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쪽으로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볼 수 있으며 선입지를 통해 물자의 이동과 병력의 이동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표시하였으며 서측으로 표시한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왜성의 축성의 경우 두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해발 100미터 이내에 축성할때 3면이 바다와 인접하게 하는 것인데 웅천왜성, 안골왜성, 마산왜성, 죽도왜성, 장문포왜성, 송진포왜성, 죽성리왜성, 사천 선진리왜성, 부산증산왜성 지성인 자성대왜성, 남해왜성 등이 그렇기에 울산왜성의 경우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직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농소왜성이나 물금왜성의 경우도 나머지 하나는 산정상에 왜성을 축성하는 것인데 구포왜성, 부산증산왜성, 영등포왜성, 임랑포왜성, 가덕도왜성입니다.   
▼ 울산왜성 주위로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 같다고 하는 이유를 보면 첫째 신라시대 계변성이 있었는데 동천주위에서 무역이 이루어졌다. 신라시대부터 동천이 있는 곳까지 바닷길이 열렸었다.(울산발전연구원 반구동유적 발굴조사에서 나온 자료인용) 두번째가 왜군이 이용한 정박지가 현재 선입지라고 하는 곳인데 그곳으로 병력과 물자를 이동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선입지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 Holocene 해진극상기의 울산모습인데 울산왜성이 있는 곳만 볼록 올라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저 상태에서 계속적인 자연퇴화와 매립이 이루어졌겠지만요.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는데 울산왜성 삼면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느냐에 관해서는 필자도 정확하지 않고 필자의 느낌이나 타 왜성에서 그래서니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울산시에 나온 울산의 이야기를 보면 "조선 중엽 이전에 삼산과 관상의 들은 모두 바다였다. 경주 입암지에 있는 임해전(臨海殿)은 바다에 임해 있는 전당이라는 뜻으로 옛날에는 바다가 입암지 앞까지 접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던 것이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에서 내려오는 토사가 점점 퇴적되어 육지로 변모했다. 삼산들, 관상들이 바다였을 때는 학성공원도 바다 가운데 고개를 쑥 내민 작은 반도였고, 내황동은 내황이 아니라 내항(內港)이었다.

그 무렵 삼산은 삼봉이 나란히 바다 가운데 솟아있는 섬이었으니 상상만 해도 빼어난 풍광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바위가 깎이고 돌이 부서지는 퇴적이 진행되면서 바다가 메워져 태화강 북쪽은 관상들로, 남쪽은 삼산들이 되었다. 퇴적이 멈춘 삼산들 남쪽 낮은 산기슭에는 화진도가 남아 아름다운 이수삼산을 형성한 것이다." 라고 적혀있는것으로 봐서

학성공원 즉 울산왜성이 있었던 곳의 경우 필자가 주장하는 3면이 바다와 인접했을 것이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울산시 이야기에도 학성공원은 바다 가운데 고개를 쑥 내민 작은 반도였다. 

또 문화재청에 글을 보면 "이 울산왜성은 산정상을 중심으로 본성을 두고, 북쪽과 서북쪽에 2∼3겹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벽의 길이는 1.300m이고 높이는 10∼15m이다. 여기에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지은 망루 12개를 만들었으며, 남쪽을 제외한 3면에 흙으로 제방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남쪽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배가 성 아래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었다."

필자가 마산왜성을 설명하면서 웅천왜성, 안골왜성, 죽도왜성이 바다와 인접하고 있는 부분에 관한 발제글이 있습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산왜성 발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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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부산촌놈 2011/01/07 12:46 #

    물자 공급이나 감시, 바다나 강을 통한 퇴로 확보 등 왜성은 진짜 다목적을 염두에 둔 성이네요.

    임란 당시에도 치밀했던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증명하는 요소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니 오싹해지는데요;;
  • 팬저 2011/01/07 14:11 #

    말씀하신 부분이 다 맞습니다. 무엇보다 자국땅이 아니니 적은 병력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왜성 특유의 방식으로 축성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明智光秀 2011/01/08 20:30 #

    애초에 남해안 왜성의 입지조건이, 내륙쪽을 적방향으로 상정하여 방어구조를 배치하고, 해안의 보급항을 끼고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

    뭐, 국민성 문제라기보다... 상황이 그런. ^^;;;
  • 팬저 2011/01/08 22:37 #

    자신들이 일본에서 했다면 왜성 특유의 방식이 아닌 일본성의 방식이 나와겠지만 조선에서는 방어를 해야하는 목적이 있으니 아무래도 그런 지형을 골라서 했다고 봐야겠죠.
  • MessageOnly 2011/01/08 12:11 #

    바다에 인접하였다면 기능적으로도 좋겠지만, 경관도 훌륭했을 것 같습니다.
  • 팬저 2011/01/08 13:21 #

    경관에 관해서는 요산대(樂汕臺)라는 비석이 있는 것처럼 중국의 이수삼산을 꿈꾸었던 것처럼 좋았다고 봐야겠죠.
  • 明智光秀 2011/01/08 20:32 #

    가보니 성내 돌이 특이하긴 했는데, 항공사진으로 볼 생각은 못 했었네요. ^^
    개인적으론 가보고 좀 실망했던 성. ^^;;; (너무 유명하니까)
  • 팬저 2011/01/08 22:35 #

    유명도에 비해 공원으로 되어있다보니 나이드신분들이 많고 왜성들이 많지 않아 실망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일제강점기때 왜성지를 보통 사적지나 공원으로 지정하여 보호하려는 일본인들의 속셈이 숨어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일제 강점기때에는 보호가 잘되었지만 해방이 되고 나서는 더욱 더 무너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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