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왜성의 경우 왜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성전투에서 제일 먼저 승리하고 구축한 왜성 1호 지형입니다. 1592년 9월 1일 이순신함대가 부산포해전을 치룰때 왜군들은 이곳 부산포왜성에서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부산포왜성의 경우 임진왜란당시 왜군의 본거지였으며 조선초기 부산진성의 성곽의 돌을 가져와서 부산포왜성을 만들었는데 4개월안에 축성하였습니다.
부산 동구청 도서관에서 바라본 부산항의 모습으로 보이는 산이 임진란 당시 절영도이고 현재는 영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함대가 이끌고 와서 치룬 부산포해전의 경우 지금 컨테이너 크레인이 있었던 곳 앞 정도 아닐까 추정합니다.
▼ 아무튼 아래 사진에 나오는 좌성초등학교 교실 뒤를 보면 산세가 가파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좌성초등학교에서 부산포왜성 천수각이 있었던 곳 까지 너무나 가파르게 산세가 형성이 되어져 있더군요.
▼ 동구청 도서관에서 범일동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산에 집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부산포왜성을 축성하고 나서 병사들이 숙식할 수 있는 집들을 만들었는데 주로 산노마루(三の丸)아래에 조성하였습니다. 그러한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함대가 부산포해전을 치룰때에도 있었다고 이순신장군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흙을 쌓아 만든집이 3백호가 넘었다고 기록이 되어져 있는데 그렇다면 산에 집을 지은 방식은 형태는 틀리겠지만 범일동 산자락에 있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싶어서 찍은 사진입니다.
▼ 부산포왜성 니노마루(二の丸) 체성 북측방향에서 바라본 모습인데 여기는 생각했던 곳 보다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또 증산둘레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둘레길을 따라 가면 부산포왜성의 니노마루(二の丸) 체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부산포왜성의 천수대의 모습
부산포왜성을 답사하면서 느낀점을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임진왜란당시의 왜군의 본거지였지만 아직 부산포왜성에 관한 자료가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지표조사나 발굴조사 등의 자료가 보이지 않고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블로그나 카페글조차 찾기가 힘이 듭니다. 거기에 비해 서생포왜성, 울산왜성, 기장 죽성리왜성, 안골왜성, 웅천왜성, 구포왜성, 자성대왜성의 글은 찾기가 편합니다.
두번째는 그나마 부산포왜성에 관련된 글을 보면 왜성의 경우 증산공원이 있는 곳에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적혀있는데 필자가 답사를 해보니 이정도로 남아있으면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이 남아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증산공원에 남아있는 부산포왜성의 체성을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산에 있는 마산왜성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부산포왜성도 마찬가지 이더군요. 위 사진에 보면 시멘트로 발라 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번째로는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필자도 확인을 해보아야 하는 것인데... 부산포왜성이 있었던 곳을 답사하면서 산노마루(三の丸)아래 왜군들이 주둔하던 곳을 지나 가니 아래 사진과 같이 배수로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해자로 보기에는 너무 작았습니다. 배수로로 보였는데 넓이의 경우 60~70센치 정도 되어 보였는데 확인한 길이만 적어도 200미터가 됩니다. 사진을 보시면 좌우가 높게 만들어 놓았고 가운데는 낮게 조성이 되어져 있는데 하나 같이 돌을 이용하여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부분이 부산포왜성에 사용된 것인지 모르겠네요. 일단 문화재연구원에 문의를 해보아야 겠습니다.
다섯번째로는 밀리터리 전문 출판사인 영국 오스프리 출판사에서 출판한 일본왜성(城)1592-1598에 부산포해전 장면이 나오는데 과연 맞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작가가 나름대로 고증을 거치고 상상을 더해서 그린것인데.... 상당 부분은 맞을 것 같기도 한데 옆에 한장의 그림이 더있는데 거기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있으면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말이죠.
이미지참조 해보세요. 링크
여기를 보면 왜군의 경우 부산포진성에서 싸우는 것으로 나와 있네요. 이순신함대의 경우 부산포왜성에 관한 글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부산진성에서 왜군들이 이순신함대와 싸우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항상하는 이야기이지만 답사한 내용을 빠른 시간안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부산포왜성의 평면도인데 거리의 오차는 있을 수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부산 동구청 도서관에서 바라본 부산항의 모습으로 보이는 산이 임진란 당시 절영도이고 현재는 영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함대가 이끌고 와서 치룬 부산포해전의 경우 지금 컨테이너 크레인이 있었던 곳 앞 정도 아닐까 추정합니다.
▼ 아무튼 아래 사진에 나오는 좌성초등학교 교실 뒤를 보면 산세가 가파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좌성초등학교에서 부산포왜성 천수각이 있었던 곳 까지 너무나 가파르게 산세가 형성이 되어져 있더군요.




두번째는 그나마 부산포왜성에 관련된 글을 보면 왜성의 경우 증산공원이 있는 곳에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적혀있는데 필자가 답사를 해보니 이정도로 남아있으면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이 남아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증산공원에 남아있는 부산포왜성의 체성을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산에 있는 마산왜성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부산포왜성도 마찬가지 이더군요. 위 사진에 보면 시멘트로 발라 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번째로는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필자도 확인을 해보아야 하는 것인데... 부산포왜성이 있었던 곳을 답사하면서 산노마루(三の丸)아래 왜군들이 주둔하던 곳을 지나 가니 아래 사진과 같이 배수로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해자로 보기에는 너무 작았습니다. 배수로로 보였는데 넓이의 경우 60~70센치 정도 되어 보였는데 확인한 길이만 적어도 200미터가 됩니다. 사진을 보시면 좌우가 높게 만들어 놓았고 가운데는 낮게 조성이 되어져 있는데 하나 같이 돌을 이용하여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부분이 부산포왜성에 사용된 것인지 모르겠네요. 일단 문화재연구원에 문의를 해보아야 겠습니다.

이미지참조 해보세요. 링크
여기를 보면 왜군의 경우 부산포진성에서 싸우는 것으로 나와 있네요. 이순신함대의 경우 부산포왜성에 관한 글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부산진성에서 왜군들이 이순신함대와 싸우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항상하는 이야기이지만 답사한 내용을 빠른 시간안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부산포왜성의 평면도인데 거리의 오차는 있을 수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덧글
도대체 형식을 알 수 없는 짬뽕이라서요
저는 조선 읍성의 장대에 일본성곽의 흙담을 결합한 것인가? 했습니다.
저 장면 외에도 울산성, 순천 신성리성 전투 장면도 수록되어 있지만 고증상 맞는 부분도, 틀린 부분도 있습니다.
아무튼 부산포왜성도 적잖은 부분이 시가지화되어서 아쉽군요
저도 처음에는 저런식의 전투가 벌어질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다가 임란부분을 다시 읽고 생각을 다시하고 있습니다.
부산포왜성의 경우 분명히 발굴조사나 지표조사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올린 평면도의 경우 예전에 나온 평면도에 다음지도를 표시한 것인데 이렇게 표시하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지도의 경우 그림으로 만 있다보니 정확하게 어느지점인지 알 수가 없는 점이 문제이더군요. 그래서 축적을 해서 올린 것입니다.
그래도 부산포왜성의 경우 산노마루까지 어느 정도 남아있어 많이 남아있는 편에 속하겠더군요.
유진우님 혹! 배수로에 관해서 알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근 200미터 정도 남아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 왜성을 축성할때 한 것인지 그 이후 한 것인지
또 왜성에 이런 방식의 배수로를 사용하는지 알고 계신 것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맨 아래 사진이 구마모토성의 배수로입니다.
산성이 아닌 평산성이라 저도 확실히 알기가 애매하군요
아무래도 현장을 직접 가보기 전에는 함부로 단정짓기도 어렵지만요 -_-;;
어제 올렸놓은 사진과 거의 같은 배수로가 있더군요. 사진은 여러장 찍었는데 다음에 올릴께요.
지형을 따라 조성된 것으로 봐서는 왜성의 배수구 같다는 생각이 확실하던데 여기 저기 알아보고 올리도록 할께요.
http://blog.naver.com/sanoramyeon?Redirect=Log&logNo=20061309515
이건 구마모토성의 우도 야구라인데 야구라와 석축의 접합부의 돌출부를 통해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에게 뎃포를 사격하거나 투석을 감행할 수 있습니다.
부산성의 지형과 평면도만 봐도 노보리 이시카키 지역을 제외하면 산노마루부터 각 구획의 폭이 좁고 오로지 방어의 극대화만을 추구한 것을 볼 수 있어 약간의 가능성을 추정해봅니다.
그런데 산마루에 위치한 히메지성 혼마루의 배수로( http://dunkin.tistory.com/3245 )를 봐도 저건 어째 당시보다는 후대에 그냥 주변의 성돌로 조성했을 가능성도 봐야합니다.
해자 자체를 저렇게 돌로 구축하는 건 있는데, 그러기엔 좀 규모가 작고.
부산포해전에서 이순신 함대가 부산포왜성에도 직접 포격을 가했었나요?
이것이 제가 언급했던 공성전 장면입니다.
1990년작 "하늘과 땅과"에서 인용했는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센고쿠지다이 당시 석축성곽보다는 토성이나 목책성곽이 주류를 이뤘다는 점과 더불어 각 구획의 특징도 어느 정도 나타나 있습니다.
장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바위나 통나무가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지 않고 정확하게 적 방향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 군데군데 목책을 박아 방향타 역할까지 수행하도록 치밀한 방어배치를 해놓습니다.
다만 당시 화포의 포탄이 고폭탄이나 작열탄이 아니라 성벽에 얼마만큼 치명타를 입혔을지가 의문이지만요
불멸의 이순신 덕분에 마치 조선군의 포탄에 일본군이 와장창 무너져내리는 장면을 기대하신다면 좀 실망이실 겁니다.
이건 말로 설명하기는 뭐하고 영화 "알라모"로 유명한 1836년의 알라모 요새 전투( 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37177/img_37177_1373615_0?1109408911.jpg ) 당시 운용된 8파운드, 12파운드 포 역시 고폭탄이나 작열탄보다는 단순 쇳덩어리( 흔히 "솔리드샷"이라 불리는 ) 포탄들이 주류를 이루었을 정도로 포는 발전해도 포탄의 발전은 의외로 더딘 편이었습니다.
영상은 여기를( http://www.youtube.com/watch?v=rw_fdgaCWpo ) 클릭하면 감상하실 수 있는데 자세히 보시면 요새 수비대의 12파운드 포 사격에 멕시코군이 우수수 쓰러지기만 하지 포탄 폭발 지점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지는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이순신 제독님이 참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