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역사 철도역사 처음으로 스토리텔링 도입 현대화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나온 이야기를 보면 현재 새롭게 조성될 진주역사를 예전 진주목의 진주객사 형태로 조성하여 일제강점기때 사라진 진주객사를 스토링텔링화하여 새롭게 진주역사를 만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진주객사와 진주역사와는 상관이 없다고 느낄정도인데 왜 스토링텔링이라는 이야기가 나올까요? 진주역사가 진주객사와 같이 "건물 3채가 길게 옆으로 늘어선 모습으로 본건물 좌우에 익사를 배치해 공·사적 공간을 이뤘던 진주객사처럼 설계됐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건물의 형태가 진주객사와 같이 디자인을 하였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진주객사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진주목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도시였고 조선의 개국과 함께 진주목이었다가 임진왜란때 진주성1,2차 전투를 치루어 낸 곳입니다. 이후 경상우병영성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겨와 함께 공존한 곳으로 우병영지도를 보면 진주성(이 부분을 어떻게 적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진주성은 행정구역의 진주에 城을 붙힌 것이고 실제로는 진주읍성 또는 경상우병영성(조선후기)이 맞을 것 같습니다.)의 모습이 나오는데 내성과 외성의 모습과 함께 각종 성문과 장대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우병영지도에는 객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동지도를 통해본 진주목의 모습으로 진주읍성의 모습이 보이고 대사지라고 하는 해자 위에 객사의 모습이 보이고 우측편에 향교의 모습이 보입니다. 객사의 경우 진주성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진주성도의 모습으로 10자 병풍으로 되어져 있는데 진주성의 모습과 함께 객사의 모습도 보이는데 객사의 경우 우측에서 세번째 병풍 상단에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과 함께 진주객사의 모습이 보이는데 진주객사의 경우 진주목의 주산인 비봉산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그림을 기준으로 보니 진주객사와 진주성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파이먼의 홈페이지) 조선시대의 경우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국가이며 지방권력중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는 읍성내의 가장 중요한 위치 즉 주산을 배경으로 하는 중앙 또는 북쪽에 놓게 됩니다.이는 임금이 있는 북쪽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함경도, 평안도 등에서도 북측을 기준으로 객사를 배치하였는데 이는 방위각중 북측을 높게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아무튼 진주는 비봉산이 주산이므로 비봉산 앞쪽에 위치하게 됩니다.
보물로 지정된 진주성도의 모습으로 제작시기는 19세기라고 합니다. 진주성에서 나와 북으로 올라가니 진주객사가 나오며 진주객사옆 동헌의 모습과 각종 관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객사의 경우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와 전패를 안치하고 고을 수령이 아전을 대동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북측을 향하여 향망궐배를 하였습니다.
이는 주기적으로 하는 것이고 수령이 마을을 벗어나기전이나 같다온 후 꼭 객사를 들러서 망궐배를 하였습니다. 임금이 살아있지만 이렇게 망궐배를 하는 것은 사당과의 개념과 같은 곳임을 상징하는 생사당의 개념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객사의 경우 공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쉬고 갈 수 있는 숙박의 개념이 있는 곳이기도 하는 곳으로 중요한 곳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진주성도의 모습으로 이곳을 보면 진주객사의 모습과 함께 동헌의 모습 동헌옆 책실, 내아의 모습도 잘보입니다. 또 각종관아의 모습과 함께 진주성내의 경우 내성은 각종관아 외성은 민가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읍성내부에 객사와 동헌이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진주목의 진주객사의 경우 이상하게 진주성안에 위치하지 않고 외부에 객사가 있으며 동헌도 외부에 있다는 것을 고지도를 통해 보았습니다. 왜 진주성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객사가 있었을까요? 진주객사의 경우 처음부터 저곳에 있었을까요?
진주객사는 문헌기록에 따르면 1403년 이전부터 존재하였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적어도 객사가 700년 이상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진주객관중수소지(晉州客館重修小識)’의 서문에 의하면 “두번의 화재로 다시 짓지 못한 지가 여러 해 지난후 1403년(태종 3년) 목사 광주 안공이 옛터를 찾아 그 구조를 조금 넓혀 새로 지었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진주객사의 경우 조선초 건국과 함께 일제강점기때 사라지기까지 그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경상우병영이 진주로 오면서(1602년 선조 35년) 일시적으로 경상우병사가 진주목사를 겸임하기도 했으나 문관인 목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에 따라 인조 13년(1635) 진주목은 경상우병영과 분리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계급이 높은 병사와 목사가 한 공간에서 활동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런 경우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경상좌병영인 울산도 그러한데 전라병영의 경우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진주목을 다스리는 진주목사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이 진주목이 출범하는 시기 이전부터(고려) 동헌이 진주성안에 있지 않고 객사와 가까이 있어 진주목사는 진주성안에서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고 진주성안에는 경상우병사만 활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즉 조선 후기 진주목은 특이하게도 진주성 안의 경상우병영 진주성 밖의 진주목 치소라는 ‘이원적 공간구조’를 나타내게 됩니다.
진주객사의 경우 어디에 있었을까요? 각종 자료에 의하면 예전 일제강점기때 진주법원자리 이후 진주MBC터 였다고 합니다. 아래 지도는 필자가 진주성의 내성만 있는곳에 외성을 표시하고 객사와 동헌 그리고 향청을 나타낸 것입니다. 노란색으로 칠한 것은 진주성에서 객사까지 연결하는 예전 큰 도로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파랑색은 진주성 해자인 대사지임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림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객사의 모습은 어떻게 했을까요? 현재 남아있는 진주객사의 사진은 아래에 나오는데 1910년경이라고 합니다. 이때에는 예전의 객사와 달리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좌우익사와 오실 등이 벽을 두르고 창문을 달아놓아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보통 객사의 경우 중앙에 궐패를 모신 오실이 있고, 좌우에 익사가 있습니다. 또 양 옆으로는 회랑이 둘러져 있고, 내삼문이 있으며 그 앞에는 다락루 형태의 외삼문이 있는데 진주객사의 경우 이런 외삼문이 있었는데 명칭이 의봉루였습니다. 그 앞에는 홍살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전형적인 객사의 배치구도이며 진주객사 또한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어도(御道)인 모습이 보이고 사진에 다 나오지 않지만 동익헌과 서익헌의 경우 같은 크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객사올라가지전 조금 큰 공간이 보이는데 월대라고 하는데 높이가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주객사의 경우 일반적인 크기로 보여지는데 우리가 잘 아는 낙안읍성의 객사보다는 크고 나주객사인 금성관보다는 작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주객사의 외삼문격인 의봉루의 모습이 보이고 2층누각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있습니다. 문헌에는 비봉루라고 있는데 왜 의봉루로 바뀌었을까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바뀌었나? 아니면 비봉루는 다른 곳에 있나요? 비봉루는 대사지 앞에 있는 것일까요? 아무튼 의봉루 처마 끝에 활주가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객사로 들어오는 길의 경우 다른 곳과 달리 조금 높게 조성되어져 있습니다. 1910년 일제강점기때 진주목의 역사를 말해주는 수많은 비석은 일본인들의 벽돌집 초석으로 사용되어 버렸다고 하니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진주 장날의 모습으로 저 멀리 진주객사의 외삼문격인 의봉루의 모습이 보입니다. 진주객사로 가는 이 길이 바로 진주성에서 객사까지 가는 길으로 보이며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습니다. 사진상의 우측이 현재 진주시 재래시장의 대명사인 진주중앙시장입니다. 보통 읍성의 경우 남문을 따라 장이 들어서는데(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주목의 경우 신북문에서 객사까지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장이 형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이 길이 가장 번화했던 길이었음을 증명해줍니다. 그러니까 진주목의 가장 중심의 성문은 신북문이 기준이 되게됩니다. 아래 사진의 경우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올린 사진입니다.원본 출처에 진주객사라고 하여 필자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울산 태화루 앞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사실을 밝히고자 이렇게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부분에 대한 지적을 해주신 절대긍정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진주객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해체되고 그곳에 진주법원이 들어서고 진주법원이 옮겨가면서 진주MBC가 들어오고 구 진주MBC사옥이 이전하면서 그곳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고 합니다. 진주시민단체들이 진주시에 진주객사복원을 주장했지만 많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서 민간에게 불하되어 지금은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 있다고 합니다.
객사터의 경우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인데 이곳에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풍수의 기를 받았던 곳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진주목 동헌의 경우 현재 KT자리이며 금성초등학교 자리였던 곳에 현재 갤러리아 백화점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이 향청건물이었다고 합니다.
700년이상 되었을 것 같은 객사가 모습만 비슷하게 만든 진주역사로 탄생한다고 하는데 모습만 같은 곳(사실 모습도 콘크리트로 지어서 같다고 볼 수 없지만요) 이고 그냥 KTX 역사로 사용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덧글
어떻게 보면 드문 우리나라 근세건물을 보는느낌 같아서 묘하게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한옥이 계속발전했으면 저런 분위기로 갔을까요?
좋은 글과 사진들 즐겁게 보고 읽고 갑니다
그나저나 지못미 비석...
신진주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 고민이었는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도 아닌데 좋은 정보라고 칭찬을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
그리 많이 소개가 되지 않은듯합니다ㅇㅅㅇ
고향이 진주인 사랍입니다.
제일 밑의 장날 사진은 울산 태화루 앞 장날의 모습을 잘못 인용한 것 같습니다.
국가보훈저 자료에도 동일한 오류가 발견되었는데,아직 아무도 지적해 주지 않은 듯합니다.
필요하다면 비교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ibokorea@naver.com
진주에 관해 관심이 많은 학생인데요.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혹시 글에 올리신 진주성도의 이름, 출처등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괜찮으시다면 heylover326@naver.com 로 메일부탁드리겠슴니당^^
네번째는 국립진주박물관 다섯번째는 출처자를 적어놓았습니다. 여섯번째는 일곱번째는 출처를 잃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