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과 남원부 관아이야기 읍성(邑城)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춘향전의 경우 판소리로 뮤지컬, 드라마, 영화, 만화로 계속해서 생산하고 있는 문화콘텐츠중 하나입니다. 그러다보니 소설을 읽지 않아도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있으며 이 범위에서 잘 벋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원본인 춘향전이 그러하니 수정하기도 힘이 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부패한 탐관오리의 대명사라고 알고 있는 변학도와 이몽룡의 아버지인 이한림의 남원 부사에 관한 이야기 및 남원부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경우 조선 숙종때의 이야기입니다. 숙종의 재위기간이 1674년 ~ 1720년이니 이 시기중 하나였겠죠. 그중  1675년라고 합니다. 숙종 이전 남원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남원전투가 벌어져 남원성이 함락되고 조명연합군4,000명과 7,000명의 남원백성들이 죽음을 당했던 곳입니다. 남원전투에서 일본군들이 조선군과 남원백성들의 코를 잘라서 가져가서 코무덤을 만들기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남원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진행되었죠. 코무덤 아니면 귀무덤입니다.)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가 나오는 광한루의 경우 남원읍성 바깥에 있는 곳이고 이몽룡이 있었던 동헌의 책실과도 가까운 곳입니다. 아래에 나오는 남원관부도(南原官府圖)는 1699년(숙종 25)에 간행된 『용성지(龍城誌)』의 범례 뒤에 실려 있는 지도입니다. 춘향전의 시기인 1675년과 24년차이 나지만 전체적인 남원읍의 풍경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거의 같다고 보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남측이 아래부분이고, 북측이 위쪽입니다. 동측이 우측, 서측이 좌측인데 동헌의 경우 남문과 가까이 있으며 광한루는 남문 바깥에 있습니다. 춘향이가 수청을 거절하고 들어가는 옥의 경우 북문과 아주 가까이 있으며 옥 서측편에 객사가 있습니다. 이몽룡이 어사또 출두를 하고 기거하는 곳이 여기 객사입니다. 객사의 경우 왕의 명령으로 지방에 내려온 관리들이 묵은 곳으로 암행어사나 감영에서 순시차 나온 감사들이 묵는 장소입니다. 또한 객사의 경우 임금의 명을 받고 제일 먼저 들러는 곳으로 이몽룡의 아버지인 이한림과 변학도, 이몽룡 모두 객사에 들러 망궐례를 했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남원읍의 경우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지읍성으로 4대문을 중심으로 되어져 있으며 길 또한 + 자형으로 되어져 있는 구조입니다. 이몽룡의 아버지인 이한림과 변학도가 남원부사로 부임을 하면서 맨처음 남원읍성을 거쳐가는 문이 남문입니다. 변학도의 경우 남원 부사로 부임하면서 전주 감영을 거쳐 광한루를 거치고 남문을 지나 객사로 갑니다. 남문위에 있는 누각의 경우 완월루로 2층 누각입니다. 아래 모형지도와 같이 옹성으로 성문을 보호하고 있으며 남문 옆에는 치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문과 동,서,북문에서 걸어와서 만나는 지점에 객사와 동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몽룡이 공부하고 있었던 곳은 동헌내에 있는 책실로 아래 모형을 보면 객사터 앞으로 + 도로의 가운데로 가장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변학도가 부임을 하면서 기생들을 불러들여는데 기생들이 기거한 교방의 경우 객사 근처 였다고 하며 기생을 관리하는 호방의 경우도 동헌과 가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지출처 : 바람이 머무는 곳님
1872년 지방지에 나오는 남원을 보면 더욱 더 명확해집니다. 광한루와 오작교의 모습이 보이는데 지금의 광한루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객사의 경우 4대문에서 출발하면 모두 모이는 곳인데 이곳에 특이하게 시장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춘향전에서 춘향이가 옥에서 나와 변학도가 있는 동헌까지 가기위해서는 이 시장을 지나가야 합니다. 춘향이가 지나가면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겠죠. 시장의 경우 남원읍성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광한루가 있는 곳에서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남원읍성 동측에 비보림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는데 풍수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몽룡의 아버지인 이한림 남원부사가 부임을 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와서 동헌옆 내아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변학도의 경우 홀로 내려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한림의 경우 남원부사로 부임하면서 가족들과 내려왔는데 임기의 경우 1800일(5년)이고 변학도의 경우 가족들과 오지 않아서 900일입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에 따르면 가족들과 함께 부임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고 홀로 부임하는 것을 권장했다고 합니다. 이는 수령이 가족들을 데리고 부임하면 수령뿐아니라 가족들이 먹는것에 대하여 마을에서 해결을 해야 하기 때문에 민폐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국법으로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또 같이 온 수령의 식구들이 여러가지로 행사를 하면 안들어주기도 곤란하고 모른체하기도 곤란하겠죠. 이몽룡의 경우 동헌 뒤편에 있는 책실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비서사무를 맡은 책방(冊房)이 거처하던 집이며, 고을 원의 자제들이 독서 및 공부를 하는 곳으로 이몽룡이 책방과 함께 있었겠죠. 따라서 이몽룡의 아버지인 이한림의 경우 국법을 어긴 경우이고 변학도는 법대로 한 경우이네요.

▼ 아래 사진은 밀양읍성내에 있었던 밀양관아 중 책실인 매죽당의 모습으로 밀양관아와 함께 복원한 것입니다. 책실의 경우 거의 동헌과 가까이 있으며 남원부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변학도가 부임하면서 기생을 찾았던 곳도 혼자 부임하였던 원인도 있을 것입니다. 원래 기생의 수청은 합법적이지 않았으나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묵인된 관행이었고 기생과 잠자리를 한 경우 장 60대에 처한다고 하니 상당히 큰 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변학도의 경우 이 부분에 관해서는 법을 지키지 못한 경우입니다.

또 이몽룡의 아버지인 이한림과 변학도의 경우 남원부사로 부임을 하려면 한양의 병조에 들러서 문안을 드렸는데 이때 빈손으로 가면 수모를 당하게 되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부임에 필요한 경비를 당겨서 사용했다고 하며 부임을 하는 곳의 아전들이 수령을 직접모시고 오려고 한양까지 오게되며 가는 동안 드는 말과 음식, 잠자리까지 모두 고을 주민의 부담이었다고 하니 이한림과 변학도의 부임은 결코 마을 주민들에게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변학도의 경우 이몽룡에 의해 전주감영으로 조사를 받으러 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몽룡의 아버지인 이한림의 경우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한양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 세우는 것이 선정비요 이것 보다 더한 것이 생사당이었다고 합니다. 생사당의 경우 살아있는 수령을 위한 사당을 세우는 것이니 이 돈이 다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로 백성들의 돈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 아래 사진은 나주목사 행렬도를 기준으로 재현한 모형으로 남원부사의 부임시에도 규모면에서 조금 작을 수는 있지만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몽룡의 아버지 이한림과 변학도의 부임은 같은 방식임에 틀림 없어 보입니다.
변학도의 경우 탐관오리의 대표적인 부분이 있지만 변학도 생일 잔치때 온 순창군수, 임실현감, 옥과현감, 남평현감, 곡성현감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 마을 수령들이 생일잔치에 맞추어 오려면 적어도 반나절 이상 시간이 소요했을 것이고 조랑말에 견마잡이를 대동하고 행차를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공무를 하지 않고 나들이를 한 것이고 인근 고을 수령을 불러서 잔치를 벌였던 것은 자주 있었다고 하니 이래 저래 죽어나는 것은 백성입니다.  

또 소설에 등장하는 이몽룡이가 장원급제를 하고 바로 암행어사로 부임하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있었던 남원이 있는 전라도로 부임해서 갈 확률은 2%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수령인 변학도 보다 계급이 낮고 선배인 변학도에게 동헌에서 죄를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전주감영으로 송치하는 것이 맞습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변학도의 동정이니 두둔하려고 적은 글은 아니며 당시 시대상으로 나오는 수령의 이야기이며 많은 부분을 참조한 것은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안갈정 지음의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입니다. 틀린부분은 지적해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 역사관심 2011/05/09 13:13 #

    관심가는 포스팅입니다. 차근차근 읽어보겠습니다. 10년전 남원에 아는 분과 가서 대낮에 기생(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분들께서 직접 발라주시는 생선이 나오는 집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화들짝 놀랐던;).

    그당시에도 참 운치 있는 고장이었습니다.
  • 팬저 2011/05/09 14:10 #

    ㅋㅋ 전 남원하면 광한루의 잉어만 생각이 납니다. 춘향이나 오작교가 생각이 나야하는데 어찌 잉어만 생각이 나는지...
  • 루드라 2011/05/09 15:37 #

    30년 전쯤 중학교 수학여행 중에 한 번 가봤던 기억 뿐이군요. ^^
  • 팬저 2011/05/09 20:58 #

    저도 몇번 가본적이 없고 읍성을 공부하면서 가보지 못했네요. ^^
  • 解明 2011/05/09 16:51 #

    <남원고사>에서는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해서 남원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김동욱 선생이,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암행어사가 되어 지방수령을 검열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린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3년도 엄청나게 짧은 것이지만, 다른 이본보다는 그나마 '현실적'이지요.

    글 잘 봤습니다. ^-^
  • 팬저 2011/05/09 20:59 #

    그렇겠죠.그래도 3년안에 급제를 했으면 대단한 것인데요. 그러면 3년동안 춘향이는 기다리나요?
  • 解明 2011/05/10 13:58 #

    읽은 지 좀 오래되어서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춘향은 어머니한테 욕 먹고 수청 거부하다가 옥살이하고 옥살이하다가 점쟁이한테 희롱당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내용은 <열녀춘향수절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시간 설정은 그렇게 해 놓았지요.
  • 푸른화염 2011/05/09 18:31 #

    몇몇 창본에서는 그래서 한림, 대교, 권지부정자 등 중앙 견습직을 모조리 거친 뒤에 내려가는 모습이 나오지요. 플러스, 변학도도 이사또 다음으로 내려온게 아니고 말입니다.
  • 팬저 2011/05/09 20:59 #

    아 그렇습니까?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는 바로 이어서 오는줄 알았습니다.
  • 스나이퍼 2011/05/11 17:41 # 삭제

    좋은 정보 잘 읽었습니다 ^^
  • 팬저 2011/05/11 20:59 #

    그렇습니까?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네요. ^^
  • 청산 2012/02/13 00:47 # 삭제

    남원 고지도 잘 보았습니다. 지도에 보면 광한루 앞에 장시 라고 표시되어 있네요. 70년대 까지만 해도 광한루 앞에 남원장이 섯던게 맞습니다.
    남원은 장이 두군데 섯답니다. 동문쪽 장과 남문쪽 장 두군데가 장이 섯지요.
    옛 남원역 앞 파출소 옆에 보면 조그만 표석이 두개가 서 있었는데 북시가 표시되어 있던걸로 기억나는데 아마도 그게 지도상 객사 옆에 섯던 장시가 아닌가 사료됩니다.
    고지도 표시에 보면 구례쪽에서 남원을 들어 오려면 오작교를 건너 남원성 남문으로 들어가는 대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맞습니다.
    아마 숙종시대에는 오작교가 일반이 통행을 하던 대로의 다리였었나 봅니다
  • 팬저 2012/02/13 16:33 #

    고지도상에 나오는 시장의 경우 남문을 중심으로 된 시장과 남원읍성 내부에 있는 시장 이렇게 두개로 나와있는데 읍성안에 있는 장이 동문옆 장인 것 같군요.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 청산 2012/02/15 22:08 # 삭제

    답변 감사드립니다. 남원에는 장시가 세곳이 섯었나 봅니다. 동시, 북시, 남시 이렇게 세곳이었구요.
    광한루 앞 남시는 상설 용남시장을 지어 이전해 갔구요, 성안에 북문 옆에 섯던 장시가 북시 지금도 동문 밖에 시장이 서고 있어요. 북시는 폐지 된것 같구요. 지난 번 말씀드렸듯이 북시 표지석은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남원의 객사터는 용성초등학교 자리라고 합니다. 객사는 6.25 사변때 폭격으로 불탓지만 지금도 사진은 남아있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객사 이름은 용성관 이라 불렸다고 하며 용성초등학교는 용성관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습니다
    숙종조에 남원에 있던 좌영이 운봉으로 이전을 했는데 운봉에는 산성이 두곳 있습니다. 기회되시면 다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운봉은 동학시기 호남 곳곳이 동학군에 접수 되었지만 운봉만큼은 민,군에 의해서 사수를 했던 곳이기도 하며 지금도 그 시절 전투지를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운봉읍지에는 운봉에 주둔했던 군사규모에 대해 언급하고 있구요, 운봉영에서 간행했던 군사훈련서 였던 장조정식을 간행하기도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팬저 2012/02/16 09:40 #

    친절하고 좋은 정보감사드립니다. 좌영의 경우 나주의 우영과 함께 전라도를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죠. 그 좌영이 있었던 만큼 남원이 중요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런 좌영이 운봉이라는 곳으로 옮겨갔군요.
    남원객사의 경우 용성초등학교로 넘어갔다고 하니 이부분 새롭지 않습니다만 용성이라는 명칭이 그래로 남아서 이어졌다는 것은 아주 새롭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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