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이라 부르는 것을 어떤식으로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고유명사로 사용되고 있으니까 필자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진주성의 경우 조선후기 경상우병영성의 기능을 한 영성이라고 봐야하는데 그냥 진주성이라고 하니 쩝...쩝... 현재 병영성의 경우 울산에 있는 경상좌병영성의 경우 그냥 울산병영성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전남 강진에 있는 전라병영성의 경우 강진 병영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가 아니니까 경상우병영이니 경상좌병영이니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다면 지역명을 부쳐서 울산병영성과 강진병영성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진주의 경우 진주병영성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진주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아무튼 경상우병영성의 경우 임진왜란이 끝난후 창원 합포에서 이곳 진주로 경상우병영이 옮겨오면서 자연스럽게 병영성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에 있는 경상우병영성을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진주성의 경우 경상우병영성의 내성만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외성이 남아있었지만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진주성의 모습으로 조선후기 경상우병영성과 진주목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출처 : 나의문화유산 답사기님>


▼ 경상우병영성을 지적도 기준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그림출처 : 논문 : 진주성의 위곽 복원에 관한 연구: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이상호
▼ 지적도를 바탕으로 하니 치성부분이 나옵니다.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치성의 경우 포를 활용하는 포루로 자리잡았는데 이렇게 많이 포루로 활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출처 : 논문 : 진주성의 위곽 복원에 관한 연구: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이상호
1920년대 대사지의 모습으로 상당히 큰 해자임을 알 수 있는 사진입니다. 적어도 30~40미터는 되어 보이는 해자인데 이 대사지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정도의 해자의 경우 필자는 처음 봅니다. 경상남도에 있는 읍성 중 조금 넓다고 보는 해자가 5미터인 것에 비해 경상우병영성의 해자의 경우는 거의 하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정도라면 일본에 있는 일본성의 해자와 폭은 비슷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이정도의 해자라면 거의 남강과 비슷할 정도인데 경상우병영성의 경우 인공적으로 만든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학교건물이 진주초등학교인데 진주초등학교의 경우 1895년 9월 경상우도 소학교 설립이 됩니다. 이듬해인 1896년 1월 진주공립 소학교로 개칭되는데 이 진주초등학교의 경우 일제강점기가 시작하기전인 1895년도에 학교가 들어서다보니 경상우병영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대사지 외각에 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그후 진주초등학교 옆에 1910년 7월 1일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봉양학교 개교가 하는데 봉래초등학교도 대사지 앞에 학교가 들어섭니다. 1910년 이후 접어 들면서 이 넓은 대사지에 경상우병영성의 외성의 돌로 메꾸어 버립니다. 조선의 가장 넓은 해자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나마 이사진이라 남아서 조선의 경상우병영성의 위대함을 전합니다.
▼ 보통 읍성이 해체하는 과정에 객사나 동헌에 학교가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인데 진주의 경우 경상우병영성안이 아닌 대사지 외각으로 학교가 들어서고 나중에 경찰서와 소방서가 들어서는 구조덕분에 현재의 진주성이 남아있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입니다. 진주성안에는 일본인들이 신사를 지어 조선인의 정신적 부분을 빼앗아가려고 했습니다. 물론 진주목의 객사와 동헌, 향청 등 각종 관아지의 경우 법원으로 관공서로 넘어가게 되지만요.
▼ 1910년 촉석루의 모습으로 지금과 같이 체성과 암문 역활을 하는 것이 보이지 않고 촉석루만 보입니다.
▼ 경상우병영성의 외성부분에 관하여는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 필자의 경우 처음에는 동문을 포함한 진주외성을 아래와 같이 표시하였습니다.
▼ 이상호씨의 논문인 "진주성의 위곽 복원에 관한 연구:조선시대를 중심으로"를 기준으로 다시 작성한 경상우병영성 외성의 모습으로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경상우병성의 경우 남측으로 남강 서측으로는 가파른 절벽을 배경으로 축성한 병영성이고 동측과 북측의 경우 평지라는 문제점을 극복하기위해 대사지라고 불리는 인공해자를 둘러쌓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경상우병영성의 경우 섬과 같은 형상이 되게 됩니다. 동측을 제외하고는 자연적인 강과 인공적인 해자를 바탕으로 둘러쌓인 병영성이 되게된 것입니다. 또 임진왜란을 통해서 배운 부분을 적용하여 외성과 내성을 구분하고 외성이 뚤려도 내성에서 방어를 하려는 전술이 포함된 것이 조선후기 경상우병영성입니다.
다만 진주시에서 진주성의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진주성 남측체성을 기준으로 조사한 적이 있고 지금 현재 진주시 교육청으로 사용되는 구 배영초등학교 부지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외성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는 진주시외버스터미널 주위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경상우병영성의 흔적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음지도를 통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경상우병영성의 흔적을 알 수가 있겠더군요. 아래 지도는 위 지도와 동일한 것인데 위 지도에는 체성이 지나가는 곳을 표시한 곳이고 아래는 표시가 되지 않았는데 성곽의 흔적이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아무튼 경상우병영성의 경우 임진왜란이 끝난후 창원 합포에서 이곳 진주로 경상우병영이 옮겨오면서 자연스럽게 병영성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에 있는 경상우병영성을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진주성의 경우 경상우병영성의 내성만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외성이 남아있었지만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 1920년대의 진주의 모습으로 이때까지도 외성의 흔적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의 경우가 경상우병영성의 외성을 알려주고 또 신북문과 객사로 연결되는 길을 정확하게 알려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지도가 자세히 나와있는 것이 있다면 도심 발달에 관하여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자로 사용한 대사지의 경우 남강의 폭의 절반정도가 될 정도로 아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경상우병영성을 지적도 기준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그림출처 : 논문 : 진주성의 위곽 복원에 관한 연구: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이상호

그림출처 : 논문 : 진주성의 위곽 복원에 관한 연구: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이상호

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학교건물이 진주초등학교인데 진주초등학교의 경우 1895년 9월 경상우도 소학교 설립이 됩니다. 이듬해인 1896년 1월 진주공립 소학교로 개칭되는데 이 진주초등학교의 경우 일제강점기가 시작하기전인 1895년도에 학교가 들어서다보니 경상우병영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대사지 외각에 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그후 진주초등학교 옆에 1910년 7월 1일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봉양학교 개교가 하는데 봉래초등학교도 대사지 앞에 학교가 들어섭니다. 1910년 이후 접어 들면서 이 넓은 대사지에 경상우병영성의 외성의 돌로 메꾸어 버립니다. 조선의 가장 넓은 해자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나마 이사진이라 남아서 조선의 경상우병영성의 위대함을 전합니다.
▼ 보통 읍성이 해체하는 과정에 객사나 동헌에 학교가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인데 진주의 경우 경상우병영성안이 아닌 대사지 외각으로 학교가 들어서고 나중에 경찰서와 소방서가 들어서는 구조덕분에 현재의 진주성이 남아있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입니다. 진주성안에는 일본인들이 신사를 지어 조선인의 정신적 부분을 빼앗아가려고 했습니다. 물론 진주목의 객사와 동헌, 향청 등 각종 관아지의 경우 법원으로 관공서로 넘어가게 되지만요.





다만 진주시에서 진주성의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진주성 남측체성을 기준으로 조사한 적이 있고 지금 현재 진주시 교육청으로 사용되는 구 배영초등학교 부지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외성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는 진주시외버스터미널 주위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경상우병영성의 흔적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음지도를 통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경상우병영성의 흔적을 알 수가 있겠더군요. 아래 지도는 위 지도와 동일한 것인데 위 지도에는 체성이 지나가는 곳을 표시한 곳이고 아래는 표시가 되지 않았는데 성곽의 흔적이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덧글
가운데 부분의 음영부분이 현재있는 것과 같은 형태의 암문이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암문 위쪽에 툭 튀어나온 돌이 있는 그것도 비슷한 윤곽을 보입니다.
아마 우병영외성의 남문을 나오면 남강과 대사지로 유입되는 작은 하천에 무지개 다리를 만들어 건널 수 있도록 해 두었던 겁니다.
제가56년생이니까 중학생이던 1969년 무렵 위의 지도처럼 진주교 아랫쪽으로는 모두 백사장이었습니다.
백사장을 낀 소로변에는 군복 염색점포, 백솥을 파는 곳, 백사장에는 시멘트 도관만드는 곳, 양아치 등이 있었고 저 아래에는 옥봉을 끼고 흘러 오는 하천변에 조금씩 남채밭이 있었습니다.
외성의 흔적은 현재와 거의 비슷하나 직선화 되었고 구북문, 신북문, 동장대, 남문의 위치는 대번에 찾아 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외성의 경우 남아있겠지만 현재 표시를 하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옛 기록도 진양지였지 진주지는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조선조 사대모화 사상으로 중국의 진양을 가져다 쓴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