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우수영 임진왜란 당시 13척의 함선으로 일본함선 133척을 막아내었다고 하는 울독목과 너무 가까이 있는 전라우수영. 전라우수영의 경우 남해서 서해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여 위치적으로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수군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전라우수영이 이곳 해남 문내면에 설치한 첫번째 이유일 것으로 보입니다.
▼ 현재 전라우수영 위에 있는 목포에 해군 3함대사령부가 위치하고 있으니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에 나오는 지도에 있는 수군진의 경우 전부 전라우수영 소속이 아닙니다. 전라좌수영 소속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전라우수영의 경우 1377년 고려 우왕 3년에 무안 당곶포에 수군이 처음 설치된 후, 1440년 세종 22년에 해남 황원관으로 옮겼다가 1465년 세조 11년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여 임진왜란 때는 명량해전의 주요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1872년 지방지에서 본 전라우수영성의 모습으로 4대문과 함께 객사, 동헌, 창고, 옥사 등의 건물이 보이고 판옥선과 거북선을 비롯한 전선의 모습이 보입니다.
관사로서 26개의 각종 당청이 있었는데 중요 시설을 보면 선청과 집회소·회의장소로 사용된 12개의 누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전라우수영성 남문 밖에 석축으로 만든 4개의 항구 시설이 있었는데 군선으로는 전선 2척, 귀선 2척, 해골선·방골선이 각 1척, 병후선 8척 등 모두 17척을 보유하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나주·영광·함평·무안·영암·해남·진도 등 7고을을 관할하였고 금갑도·남도포·어란진·고금도·신지도·마도진·목포진·이진진·다경포·법성포·임치진·지도진·주도진·금모포·고군산·선산진·흑산도·청산진·가리포 등 19개 수군의 진을 거느렸습니다.
조선 후기의 전라우수영에는 관사로서 26개의 각종 당청이 있었고, 중요 시설로 선청과 집회소·회의장소로 사용된 12개의 누정이 있었다. 또 전라우수영성 남문 밖에 석축으로 만든 4개의 항구 시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군선으로는 전선 2척, 귀선 2척, 해골선·방골선이 각 1척, 병후선 8척 등 모두 17척을 보유하였으며 여기에 사부·화포수·타공·웅노·기라졸 등의 수군을 배치하였습니다.
▼ 해남군에서는 성곽, 문지(북문지 1동, 성벽 50m), 성지복원(동‧서‧남문지 등 3동, 성벽복원 180m)등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2008년 3월 이며 전라우수영지를 2012년까지 180억원(국‧도비 90억원, 군비 90억원)을 들여 문내면 선두리 일대 전라우수영 성지 6곳의 정비‧복원한다고 합니다. 전라우수영성은 둘레 3,843자, 높이 20자, 옹성 4개, 연못 1개,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라우수영을 가기 위해서는 병목과 같은 좁은 곳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곳이 바로 원문입니다. 원문(轅門)을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군영(軍營)이나 영문(營門)을 이르던 말."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저번에도 이 원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수군의 영성통제영이 통영에 생긴 것은 원문때문이다▼ 전라우수영의 경우도 통영과 같이 원문이라는 공통적인 방어적 성격의 장성과 같은 성곽이 전라우수영 앞을 막고 있습니다. 통영에 통제영이 생긴것과 같이 전라우수영의 경우도 육지에서 오는 적의 경우 여기 원문에서만 방어하면 적이 침입을 하지 못합니다. 적은 인력으로 방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이곳 원문이 전라우수영이라는 영성이 들어설 수 있었던 두번째 일 것으로 보입니다.
▼ 광여도에서 본 해남읍성과 전라우수영성입니다. 일단 전라우수영성을 보면 원문이 확실히 보이고 전라우수영성이 보이는데 성문이 5개가 있습니다. 위 1872년 지방지보다 성문이 많은 것일까요? 아니면 암문을 표시한 것일까요? 또 원문의 경우 원문성(城)으로 보일정도로 장성과 같이 축성한 것이 보입니다. 현재 원문이 있었던 곳의 경우 원문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 여지도에서 본 해남읍성과 전라우수영성인데 위 광여도와 비슷합니다.
▼ 지승지도에서 본 해남읍성과 전라우수영성의 모습으로 성곽에 여장을 그려 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습니다. 다만 원문이 있는 원문성의 경우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 해동지도에서 본 해남읍성과 전라우수영성의 모습입니다. 원문의 경우 상당히 좁은 지역에 설치하여 방어적 성격으로 축성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원문을 만들고 원문성을 만들어 놓으니 전라우수영성의 외성(外城)의 역활을 하게 됩니다.
▼ 원문의 경우 전라우수영이 있는 길목에 있는데 현재의 지도를 보면 상당히 폭이 넓어서 방어상 유리한 지형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형을 확대를 해보면 좌우측 모두 바다를 매립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 현재의 지도에 매립한 토지를 바다로 만드니 폭이 아주 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정도라면 충분히 방어에 유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폭의 경우 가장 넓은 곳이 400여미터인데 이 폭보다 더 좁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라우수영성의 경우도 통영과 마찬가지의 원문이라면 이런식의 장성과 같은 방법의 체성이 전라우수영성을 보호 했을 것이고 이곳을 굳게 지키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사진은 합성으로 이런식으로 되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아래 이미지는 합성임을 알려드립니다. 실제 이렇게 생겼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 원문형식의 방어에 관해서는 따로 발제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1910년 경의 전라우수영성의 모습으로 체성의 높이는 4미터 정도 되어 보이지 않아보이며 바닷물이 전라우수영성까지 들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지도에 전라우수영성의 체성을 표시한 것으로 4대문과 함께 표시된 길의 경우 예전 조선시대때 부터 사용한 길입니다. 전라우수영의 경우 북서측의 산을 낀 평산성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남문앞에 선소도 같이 운영하는 구조입니다. 규모면에서 차이가 있지 방식은 경상좌수영, 통제영성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유는 평산성의 구조와 북측에 장대를 세워 해상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비슷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 전라우수영성의 특징중 하나는 석성과 토성이 함께 어우려져 축성된 진성이라는 것이 특이한 경우입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전라우수영이 들어선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 이외 셋째 좁은 해협에 형성된 울돌목입니다. 울돌목에 관해서는 잘 아실 것이라 패스합니다. 네번째가 전라우수영 앞에 있는 양도섬인데 울돌목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기능을 하였는 것과 같고 멀리서 보았을때 전선을 보여주지 않는 점도 장점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지도에 나오는 빨간색화살표는 수군들의 진출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전라우수영의 경우 전라좌수영, 통제영과 같이 2군데로 진출 할 수 있는 구조인데 이는 조선시대 당시 수군이 있었던 수군진의 보편적인 것입니다. 또 육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녹색으로 된 화살표로 따라가야하는데 이곳은 원문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 전라우수영의 경우 천혜의 자연을 이용한 수군기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전라우수영성의 경우 현재 거의 무너져 있다고 하는데 현재 남쪽 성벽은 심하게 훼손되었고 서외리·선두리에 성축이 약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또 남아있는 것은 우물인데 이 우물이 당시 전라우수영성의 규모를 확인해 주고 있으며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해남군청)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전라좌수영과 통제영에 있는 진남관과 세병관과 같이 상당히 웅장한 객사형식의 건물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적어도 전라우수영인데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그렇네요. 고지도 기준으로 봐서는 분명히 객사가 있었고 객사터로 남아있으니까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진남관과 세병관과 같이 큰 규모의 객사인가? 에서는 필자는 그정도의 규모는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거제에 있는 기성관의 경우 수군진이 아니지만 상당한 규모의 객사형식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라우수영의 경우도 진남관과 세병관과 같은 규모의 객사가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전라우수영성의 복원이 한다고 하는데 관련된 기사나 뉴스는 보기가 힘이 드네요.
(자료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다음지도, 다음 우수영카페(
http://cafe.daum.net/usuyeongcafe)
덧글
잘 보고 갑니다.
오늘 제가 답사한 충청수영성( 보령 오천성 )의 경우에는 북벽은 해안 절벽지대가 연한 능선을 따라 축성하고 동쪽 역시 능선을 활용하되 서문과 남문은 능선을 끼고 평지까지 체성이 이어지는 구조더군요
비록 서문지 옆부터 남문지, 동문지까지는 훼손이 심한데다 토루 형태로 남은 부분이 많아 다 보고 오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동벽도 북벽으로 이어지는 회각로가 복원되는 등 꾸준히 복구 노력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주 계획은 있지만 현재로서는 힘들다고 합니다( 오천면사무소 당직 공무원에게 직접 들은 답변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난중일기에 의하면 일본군은 울돌목을 이미 돌파해 우수영으로 갔고, 이순신 장군은 별도의 망꾼을 통해 그걸 알아낸 후 바로 출격하자
일본수군 100여척이 겹겹이 포위했다고합니다. 그런데 일본수군은 이순신 장군 말처럼 쉽사리 접근해오지못했고 조류가 바뀌자 일본수군은 30척이 파괴당하고
이순신 장군은 그 위험한 바다를 유유히 떠납니다. 실록 수정실록 징비록에도 하나같이 이순신 장군이 벽파정 앞바다에서 싸웠다고하는데
난중일기는 우수영 앞바다라고 적고있습니다. 우수영 앞바다와 벽파정 앞바다 두게 다 맞다고 한다면 결국 원문 앞바다가 아니겠습니까? 일본수군은 후미를 찔린거지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잘난체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제가 생각하는 것이 정말 맞는가 전 항상 알고싶습니다. 틀리다면 바로 수정할건데. 아무도 논박을 안하니 답답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