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포성지에 관한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면 "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경상우도(慶尙右道) 병영성(兵營城)의 터로, 성은 부원수(副元帥) 배극렴(裵克廉)이 왜구를 막기 위해 고려시대인 1378년(우왕 4) 3개월에 걸쳐 돌로 쌓았다.

1426년(세종 8)에 경상 좌·우도 병영이 합쳐지면서 경상도병영성이 되었다가 1430년에 고쳐 지었다. 1437년 경상좌·우도로 다시 분리된 뒤 1583년(선조 16)에 경상병사(慶尙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우도병영을 진주로 옮긴 후로는 합포진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합포는 신라시대의 골포현(骨浦縣)을 경덕왕(景德王)이 개명한 것으로 뒷날 회원ㆍ창원을 거쳐 마산으로 되었다.
성의 규모는 둘레 4,291자[尺], 높이 15자, 너비 10자 7치[寸]였다고 전해지며, 《축성기(築城記)》에 따르면 성 위에 2자 간격으로 여장(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쏘거나 침)을 설치하고 여장마다 방패와 창을 하나씩 배치했다고 한다. 또한 동에 원인문(元仁門), 남에 회례문(會禮門), 서에 회의문(會義門), 북에 용지문(勇智門)이 있었으며 성 안에는 의만창(義滿倉)·회영고(會盈庫) 등의 건물이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북쪽 성벽의 내벽 바깥에 벽의 폭을 줄여 배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건물터가 있는데, 일부 훼손되었으나 무문전(無文塼)을 한 번 깔고 좌우 측면과 뒷면에 토담벽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성벽 바깥 10∼20m 떨어진 지점에 U·V자형 구(溝)인 해자(垓字)가 둘러져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 라고 적혀있습니다.
또 합포성지에 관련된 안내판에 적혀있는 것을 보면 " 기록에 의하면 이 성은 1378년(고려 우왕4)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곳에 부임한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이 병사와 주민을 동원하여 쌓은 다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慶常右道 兵馬節度使영)으로 사용하였다.
성(石城)의 둘레는 1.3km이고 높이는 4m이며, 성위에는 60cm간격으로 요철(凹凸)의 성가퀴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성에는 4대문이 있었고 성 안에는 의만창(義滿倉)과 회영고(懷盈庫) 등의 건물과 함께 5개의 우물이 있었다. 당시 창검과 기치를 세우고 감시병이 밤낮으로 감시하면서 위용을 과시하였기 때문에 왜적이 감히 넘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성은 1593년(선조26)에 병영을 진주로 옮기면서 합포진(合浦鎭)의 진성(鎭城)으로만 남게 되었다.
성의 외벽은 아랫부분에 큰 받침돌을 두고 견고하게 쌓아올렸는데, 이런 방식은 조선 전기 남해안의 읍성축조(邑城築造)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성벽은 바탕 돌 위에 다듬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는데, 상단부로 오를수록 돌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 현재 성벽은 일직선상으로 80m 정도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창원도호부 산천조(昌原都護府 山川條)에는 고려 말 원나라의 일본 정벌 전진기지가 합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책의 고적조(古蹟條)를 보면 그 기지가 이곳에서 서쪽으로 1km 더 떨어진 자산동(玆山洞) 지역에 있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이 성이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기지와 관련이 있는 지는 불명확하다.』"고 써놓았습니다.

첫번째 오류는 경상우도병영성이 진주로 넘어간 시기입니다. 백과사전과 안내판에는 1583년과 1593년에 적혀있는데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1583년의 경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데 이부분은 명확한 오류인 것으로 보입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수정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36년(1603) 진주읍성이 요해지로 다시 인식되면서 창원 합포(合浦)에 있던 경상우병영성이 진주성 안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임진란 당시 복잡한 그 상태에서 경상우병영성이 옮겨 간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으며 임진왜란 후 옮겨가는 것이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부분은 선조실록 등에 남아있으니까 큰 문제는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두번째 오류로 보이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어디까지 필자의 추정임을 알려드립니다. 위 내용에 나오는 것 중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면 "우도병영을 진주로 옮긴 후로는 합포진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라고 적혀있고 합포성지 안내판에도 "이 성은 1593년(선조26)에 병영을 진주로 옮기면서 합포진(合浦鎭)의 진성(鎭城)으로만 남게 되었다. "고 적혀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두번째 오류라고 추정되는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위치입니다. 아래에 나올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창원부의 지도로 지승지도에 나오는 부분인데 여기를 보면 창원읍성을 크게 그려 놓았고 왼쪽편에 구 병영이라고 아주 작게 적어 놓았는데 바닷가와 인접하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에 있는 선소와 거리가 제법 멀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덕동 근처에 바닷물이 들어왔다면 가정을 두고 그린 지도입니다. 여기에 선소를 추정한다면 표시하였는데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저 정도의 바닷물이 들어온다면 선소는 저곳이지 않겠나 하는 것일뿐입니다. 저렇게 선소를 두어도 직선거리로 1.4km가 되더군요. 이 정도라도 조선시대 세운 수군진의 선소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게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경상우수영과 경상좌수영내에 있는 수군진과 선소와의 거리를 적어 놓은 것으로 현재의 지도에 선소까지의 거리를 다음지도에서 측정한 것으로 오차범위는 대략 30미터 내외일 것입니다. 선소까지를 측정한 것은 수군진의 객사나 동헌터 기준으로 작성한 것으로 수군진성 성문에서 측정했다면 이 거리보다 더 짧은 거리로 측정이 나옵니다. 그래서 일괄적으로 동헌터나 객사터의 기준으로 측정한 것입니다. 항상하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부분은 좀 더 정확한 측정을 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려드립니다. 아래에 표에 나오는 수군진에서 선소까지의 거리의 경우 보통 2~300 미터 내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군진성의 성문에서 한다면 거의 100미터 내외입니다. 다만 조선시대 당시 웅천현에 있었던 천성진의 경우가 직선거리로 1km이고 둘러서 간다면 적어도 1.3km정도 될 것입니다. 여기가 가장 선소와 멀리 떨어진 곳이고 상주포보와 경상좌수영성의 경우 대략 500미터 내외며 나머지는 아주 가까운 곳에 선소가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합포성지의 경우 직선거리로 4km라면 가장 멀다고 하는 천성진의 거의 4배의 거리이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수군진의 성(城)으로서는 낙제점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선소와 멀리 떨어진 곳에 수군진을 세운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군진 | 선소와 거리 | 당시 행정구역 |
제포진 | 100m | 웅천현 |
안골포진 | 100m | 웅천현 |
가덕진 | 300m | 웅천현 |
천성진 | 1,000m | 웅천현 |
영등포진 | 200m | 거제현 |
장목진 | 300m | 거제현 |
옥포진 | 300m | 거제현 |
조라진 | 200m | 거제현 |
지세포진 | 200m | 거제현 |
가배량진 | 200m | 거제현 |
삼천포진 | 300m | 고성현 |
당포진 | 150m | 고성현 |
사량진 | 300m | 고성현 |
소을비포진 | 100m | 고성현 |
남촌진 | 100m | 고성현 |
통제영 | 350m | 고성현 |
구산진 | 400m | 칠원현 |
적량진 | 150m | 진주목 |
미조진 | 200m | 남해현 |
상주포보 | 500m | 남해현 |
평산진 | 200m | 남해현 |
다대진 | 200m | 동래부 |
서평포진 | 100m | 동래부 |
부산진 | 300m | 동래부 |
경상좌수영 | 500m | 동래부 |
세번째는 성(城)의 크기입니다. 합포성지의 경우 경상우병영성으로 사용될 정도로 아주 큰 영성입니다. 이정도라면 적어도 1,000명 이상의 병사가 상주해야 하는 곳으로 보여집니다. 수군진의 경우 규모에 따라 틀리지만 100명에서 500명 전후인데 그것보다 더 규모가 큰 경상우병영성의 경우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합니다. 진주로 옮겨간 경상우병영의 병사를 보면 주진군 4,200여명의 병력과 수성중군영 소속 1,400여명의 수성군, 취타수 100여명이 존재하였다고 하니 적어도 5,000명의 병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합포성의 경우 이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방어를 했다고 하면 3,000명 전후 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규모의 경상우병영성을 수군이 지킨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수군진 중 크다고 하는 만호의 경우 병사수가 대략 500여명입니다. 만호가 아니면 이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지킵니다.
창동에 있는 합포진성의 크기와 합포성지의 경상우병영성과 크기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산진과 제포사이에 풍덕포보가 있는데 현재의 해군사관학교 자리입니다. 즉 구산진, 제포진, 풍덕포보의 수군진이 먼저 나와서 적을 맞이하는 것에 비해 합포성지의 경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군의 방어적인 입장에서도 합포성지의 경우 수군진으로서의 위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번째로는 합포진성이라고 하는 부분이 조선초기까지 사용한 곳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창동에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합포진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선소가 있고 이곳의 경우 일제강점기까지 형태가 남아있었던 곳이며 지금도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합포진성이 있었던 곳을 놓아두고 합포성지에 수군진을 세운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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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회원현성은 자산동에 있는 창원시립박물관(예전 마산박물관)자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