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천성진성에 관한 글을 다 올리지 못했네요. 천성진성을 갔다온지 대략 1년이 지난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가덕대교 접속도로가 완료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생생 잘 달리고 있죠.

천성진성이 있는 바닷가인데 천성진의 경우 바닷가와 인접한 곳에 선소를 두지 않고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선소를 두었습니다. 직선거리로 대략 1km정도 됩니다. 수군기지인 진성에서 1km정도 떨어진 곳에 설치한 수군 선서의 경우는 처음 보는데 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했을까요? 무엇보다 파도에 의한 방파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공간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 아래에 보이는 것 처럼 지금도 천성에 사용하는 선소의 경우 예전부터 사용하는 곳에 사용중입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장비가 좋았졌음에도 예전에 사용하는 곳에 사용하는 이유는 파도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1872년 지방지를 보면 선소와 천성진성의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선소위에 있는 관아건물지가 현재 가덕도에서 거제도로 가는 휴게소근처로 보이는데 그곳에 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을까요? 잘모르겠네요.

이번 천성진성의 4번째이면서 마지막편입니다. 이번편에 갈 곳은 남문주위와 남문에서 서문까지 이어지는 체성입니다. 또 일부는 남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체성부분입니다.

남문 옹성 외각 체성부분으로 일부는 잘 남아있는 것에 비해 일부는 무너져 내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데 군데 무너져 내려져 있는 곳과 앞부분에 보이는 체성부분이 있는데 언제 축성한 것인지 몰라도 아래부분에 있는 것은 근대에 밭으로 사용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남문지에서 동문지로 이어지는 체성의 일부로 풀이 너무 많이우거져 있어서 전체적인 형태파악이 곤란합니다. 아마도 지금쯤 이럴 것으로 보입니다.
밭과 이어져 있어서 그런지 철망으로 보호 아닌 보호를 하고 있더군요.
밭에 사용한 돌로 담장을 만든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동문지 옹성안의 모습으로 겨우 겨우 남아있는 부분이 있는데 너무 많은 교란이 되어서 발굴조사를 해야 정확한 형태가 나올정도입니다. 그런데 옹성안에서 보면 그래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동문지로 나오는 부분의 경우 형태는 알아볼 정도이지만 전체적인 파악은 힘이들더군요. 아무래도 잡풀때문입니다.
위 사진과 마찬가지인데 체성의 일부인지 아닌지는 파악이 힘이드는데 근세에 텃밭을 가꾸기위해서 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풀에 가려져 있지만 그래도 체성의 흔적이 나오는데 위 사진과 비교하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위 사진의 경우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근세에 축성한 느낌을 주지만 아래에 나올 사진은 예전에 축성한 느낌을 줍니다.
이 정도 풀이 많이 자라서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성곽탐방은 늦가을에서 봄까지 인것 같습니다.

동문지 옹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잡풀들 사이에 당당히 있는 체성의 모습이 마치 나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체성의 방식을 보면 잔돌끼움 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문지에서 동문지 방향으로 가다 본 남측체성인데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체성의 경우 그래도 쭉이어져 있어서 겨울철에 방문하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측체성중 가장 잘 남아있으며 전체적인 천성진성의 체성 형태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담쟁이풀 사이로 보이는 체성으로 왜 저렇게 노랑색으로 도색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높이는 잘 남아있는 부분이 4미터정도 그렇지 않는 부분이 3미터 정도인데 하단부를 발굴한다고 가정하면 4미터 20센치에서 5미터정도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의 체성입니다.

하단부를 보면 상당히 큰 돌이 있는데 같은 크기로 정교하게 잘라 놓았던 느낌을 받습니다.

하부에 무사석과 성돌이 보이는데 무사석의 경우 성돌보다 조금 더 외각으로 돌출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창원읍성 체성에서 발굴조사한 체성과 같은 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았을때 직선형성벽이며 단경사형태의 체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체성의 경우 담쟁이나무 때문에 잘 보이지않지만 돌의 경우 형태가 비슷한 크기로 되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남동측 각루가 남아있습니다.
그나마 보이는 치성인데 이부분의 경우 많이 무너져 있네요.

서측체성으로 보이는 곳의 경우 교회 담장으로 사용중인데 이곳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입니다. 돌의 크기가 정말 큽니다. 그런데 돌의 경우 노랑색으로 채색되었다가 도색이 벗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본 체성의 돌의 색은 교회에서 칠 한 것일까요?
여기도 마찬가지로 도색이 되어져 있네요. 그런데 이곳은 기단석과 성돌 아래에 돌이 보이는데 이부분의 경우 기단석 아래 부분 모두 돌출된 형태임을 알 수 있네요.

이정도 오니 돌의 크기가 장난이 아닐정도로 큽니다. 대략 70센치 이상으로 보여집니다.

노랑색으로 도색된 돌과 돌과 돌사이에 있는 잔돌이 위태롭지만 무너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 상태로 오랜세월을 버티고 있겠죠.

기단석으로 사용하고 있는 돌의 크기도 결국 작은 크기가 아닙니다.

교회건물 옆에 있는 천성진성의 체성으로 돌의 크기와 형태 각도 등을 보았을때 아주 잘 남아있습니다.

일부는 이런식으로 되어져 있는데 체성앞 부분앞에 있는 데 이부분의 경우 왜 이런 모습인지는 모르겠네요.
교회 교육관을 벗어나자 남아있는 체성인데 담쟁이나무 때문인지 형태가 보이지 않습니다.

동문지로 가까이 오면 올수록 체성의 경우 돌도 작고 높이도 낮습니다.
서문지에서 바라본 체성으로 돌의 경우 같은 크기로 위 아래에 있는 것이 보입니다.
천성진성의 경우 체성을 돌아보니 조선초기 연해읍성의 방식과 조금 다른 방식의 수군기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 이후 축성한 시기여서 그런 것으로 보여집니다.
덧글
적의 공세가 누그러지면 경상좌수사 이순신은 각 진장과 회의를 소집하여 피해 상황과 적의 규모를 파악한 다음, 육군, 의병 등과 상의하여 상륙한 왜적을 어떻게 소탕할 것인지 논의하겠죠. 또한, 경상좌수영의 본진을 이동시키고 경상우수사와 협동하여 추가로 있을 적의 상륙을 최대한 저지시켰겠죠.
명량해전 때에도 수군의 해체시키라는 선조의 명령을 뿌리치고, 왜의 수군을 저지시키려고 한 것을 보면, 왜적의 상륙 저지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행운이라 생각되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문화재들은 전쟁으로 거의 없어져서 고대와 중세 역사를 알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아쉽네요.
덧붙여 일본에 가면 볼 것이 많고, 우리나라에는 볼 것이 없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