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토탈워 카페 멀티님 왜성관련 논쟁을 보면서 왜성(倭城)

지난 추석연휴동안 아케치님이 필자의 블로그에 댓글을 남겼는데 아주 흥미로운 댓글이 있었습니다. 아케치님 또한 토탈워 카페에서 이어진 왜성 토론을 늦게 보고 글을 적었는데 바로 아래 글입니다.


필자도 무슨일인가 싶어서 토탈워 카페에 있는 왜성 논쟁을 보았습니다. 상당한 수준의 글과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자 또한 아마추어라 뭐라고 정의 내리기 힘이 들지만 저런 토론에 관해서는 뛰어드는 것이 예의 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런 떡밥은 물어주어야 되겠죠.


위 두 개의 발제글을 보시고 필자의 글을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멀티님의 여러가지 중 아래에 나올 필자의 이야기는 주로 왜성에 관련되어서만 이야기함을 양해바랍니다. 







웅천왜성과 안골왜성등을 북쪽 육지방향이 아닌 바다의 기준으로 표시하여 보았습니다. 
토탈워 카페 멀티님의 경우 아주 해박한 지식으로 논쟁에 불을 지폈는데요. 몇가지의 경우 필자가 생각하는 부분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적습니다. 순서는 멀티님이 적으신 글 순서대로 틀리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군이 조선에 장기간 눌러앉아 있을려고 지은 성이라는데에는 아무런 의견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며칠 또는 몇 달만 있다가 가려고 지은 왜성은 아니라는 것이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조선군과 명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성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만 위에서 이야기한 장기간 있을려고 했다는 것도 맞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멀티님이 이야기하기를 “일본식 성인 왜성도 이와 같은 형태를 지녀, 초기에는 군사적인 요새의 형태를 띄지만, 점차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성곽마을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웅천왜성의 일러스트를 올려놓았으며 그곳에 “웅천왜성: 성마을로 변보해 갔고, 무역도 활발했고 시장도 있었으며, 굉장히 번창했습니다.”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 부분이 경우 논쟁이 있을 것 같더군요. 먼저 웅천왜성에 관해서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웅천왜성이 있는 위치는 현재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이며 있는 위치는 남산입니다. 그래서 웅천왜성 또는 남산왜성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웅천왜성이라는 지명을 많이 사용합니다. 남산이라 참으로 많이 들었던 지명이죠. 애국가에도 등장하는 지명이니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물론 애국가에 등장하는 남산의 경우 서울에 있는 남산을 이야기하겠지만요.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흔히 듣고 보는 지명입니다. 이 남산이라는 지명은 웅천읍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웅천읍성 동헌이나 객사에서 본다면 분명히 남쪽에 있는 산이니 남산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창원의 창원읍성에도 남산이 있는데 이 또한 창원읍성에서 바라본 시각에서 지어진 이름이죠. 읍성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으면 서면, 동쪽에 있으면 동면, 남쪽은 남면, 북쪽은 북면, 읍성안에 있으면 성내리, 읍성외각에 있으면 성외리 등 읍성을 기준으로 지명을 정한 것인데 웅천에 있는 웅천왜성이 있는 남산도 이 같은 지명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웅천왜성의 경우 왜 이 남산에 지었을까요? 조선군과 명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라인 구축을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니까 생략하고 왜? 이곳에 지었을까요? 그것도 웅천왜성에서 직선거리 3km안에 명동왜성, 자마왜성이 있으며 직선거리로(뱃길포함) 4km안에 안골왜성 직선거리(뱃길기준)로 8km이내에 성북왜성과 눌차왜성, 직선거리(뱃길기준)로 9km 이내에 영등왜성이 조성된 것은 왜일까요? 우연히 지은 것일까요?  
자세히 살펴보면 왜성이 있는 곳에는 하나같이 조선군의 읍성이나 수군진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군의 입장에서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목책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석성으로 튼튼히 지어야 되는데 이 돌들을 어디에서 가져와야 할까요? 쉽게 공급이 가능한 곳이라면 조선군의 읍성이나 진성이 있는 곳에서 가져오는 것이 편하다는 결론이 도달합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직전에 있었던 진성과 읍성이 없어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성의 명칭

읍성

진성

동래왜성

동래읍성

 

부산왜성

 

부산진성

자성대왜성

 

부산진성

기장 죽성리왜성

기장읍성

두모포진성

서생포왜성

 

서생포진성

울산왜성

울산읍성, 경상좌병영성

 

신답왜성

김해읍성

 

웅천왜성

웅천읍성

제포진성

명동왜성

                  웅천읍성

제포진성

자마왜성

웅천읍성

            

안골왜성

 

안골진성

고성왜성

고성읍성

 

영등왜성

 

영등포진성

장문포왜성

 

장문포진

남해왜성

남해읍성

 

마산왜성

경상우병영성, 창원읍성

 구, 합포진성

가덕왜성

 

가덕진성

눌차왜성

 

가덕진성

양산왜성

양산읍성

 

호포왜성

양산읍성

 

예전 토성터를 이용한 왜성

사천왜성

                  사천읍성

선진리토성

구포왜성

                  동래읍성

 


웅천왜성의 경우 직선거리 1km로 되지 않는 곳에 자신들이 오랫동안 교역의 장소였고 3포왜관 중 가장 큰 제포왜관이 있었던 곳이며 2km도 되지 않는 곳에 제포진성과 웅천읍성의 경우 삼포왜란 당시 점령을 했던 곳입니다. 이런 이곳에 장기간 주둔을 목적으로 웅천왜성을 축성한 것입니다. 그만큼 웅천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봐야 할 것입니다.  

멀티님이 이야기하신  “웅천왜성: 성마을로 변보해 갔고, 무역도 활발했고 시장도 있었으며, 굉장히 번창했습니다.” 했던 글 중 무역도 활발했고 시장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웅천왜성이 아니라 웅천왜성에서 1km 떨어진 제포왜관을 이야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즉 왜군이 웅천왜성을 지은 것은 바로 이 제포왜관과 제포왜관에서 거래하는 도자기 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성마을로 변모했다는 부분인데 이부분도 현장을 방문하시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웅천왜성 아래편을 보면 와성마을이 있습니다. 현재 30여호 모여서 살고 있는 이 마을이 왜 와성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와성을 한문으로 적어보면 瓦城입니다. 즉 성안에 기와를 굽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성의 경우 조선의 산성과 읍성, 진성과 달리 기와가 상당히 많이 필요했습니다. 이 기와를 전부 일본에서 공수를 할 수 없는 입장이라 보니 현장에서 직접 기와를 굽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그렇게 시행했던 것입니다. 다른 블로거들의 왜성 탐방기를 보면 기와조각을 봤다는 탐방기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그만틈 왜성에 기와가 많이 필요했고 400년도 지난 지금도 아직도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성의 발굴조사에서 나오는 기와의 경우 조선의 기와라고 합니다. 이 와성마을의 끝 자락이 왜군의 전선들이 정박하는 곳인데 이곳을 지나 웅천왜성 방향으로 올라가면 성곽진과 같이 끝없이 이어지는 축대와 같은 곳이 나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축대가 아니라 성곽진으로 왜군의 병사들이 숙식을 하는 병영진지가 기거하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웅천왜성에 왜군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경우 1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1만명이면 지금으로 치면 사단급보다는 작지만 여단급보다는 큰 병력입니다. 그런 병력들이 웅천왜성이 머물렀다면 병영진지가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서 그 부분이 성마을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 병사들이 숙식을 하는 곳이지 주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병사들이 모여있었던 곳의 경우 웅천왜성 말고 부산왜성, 서생포왜성, 안골왜성 등 많이 있었으며 현재도 그런 형태가 잘 남아있는 곳이 부산왜성지입니다.    
멀티님이 이야기한 “특히 일본군의 한성 퇴각 후 조선내 일본군의 근거지가 된 부산포 왜성에는 300호가 넘는 흙집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라는 부분의 경우 바로 민가가 아닌 병사들의 병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필자가 부산포 왜성지를 답사하고 아직도 글을 올리지 않지만 병영임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이 상당히 있더군요. 그 부분은 아래에 사진으로 올리겠습니다.   

부산왜성지를 답사하고 나서 게을러스 올리도 못했는데 멀티님의 논쟁이 이런 사진을 봉인해제하게 되었네요. 세상의 빛을 보게 한 멀티님에게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아래에 나오는 사진은 부산왜성지에 있는 좌천아파트로 지도 검색하시면 나옵니다. 아파트 담장 비슷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의 경우 부산왜성의 체성의 일부이면서 산노마루[三の丸]입니다. 큰 아파트는 아니지만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설 정도라면 임진왜란 당시 많은 병사들이 상주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물론 현재의 방식으로 보수를 했는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왜성의 체성의 일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좌천아파트가 뒤로 보이죠. 좌천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인데 이곳에도 병사들이 주둔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옵니다. 우리로 치자면 적어도 1개 소대 병력정도 머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계단을 따라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군데 군데 아파트도 있습니다. 
▼ 좌천아파트 옆에 있는 좌천1동 어린이집인데 현대식으로 지은 축대인데 경사며 각이 꺽여지는 부분을 보면 왜성의 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부산왜성에 병사들이 주둔하였다는 것은 이종락 지음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왜성]" 책자 부산왜성편을 보면 나옵니다. 이종락씨가 그린 부산포왜성의 모습을 보면 좌천어린이집옆에 병사들의 주둔지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필자가 위에 소개한 곳입니다.
▼ 이렇게 병사들이 장기 주둔을 위해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해서 이렇게 조성했는지는 몰라도 배수구가 상당부분 연결되어져 있었습니다. 이 배수로같이 생긴 것은 위 사진에 나오는 병사들이 주둔하는 곳 아래에 있었습니다. 
▼ 아래에 등장할 사진은 부산왜성이 아니라 웅천왜성입니다. 웅천왜성의 정상부분이 아니라 바닷가가 있는 아래 부분입니다. 여기를 가보면 군데 군데 성곽진의 형태를 보여주는 체성이 있습니다. 이런것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바로 병사들의 주둔때문입니다. 
▼ 흰색으로 된 부분이 성곽진으로 저런곳에 병사들이 막사를 만들고 생활하였다고 봐야합니다. 
▼ 왜성의 특유의 성곽기울기와 축성으로 한눈에 봐도 왜성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 웅천왜성의 나성(羅城)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 끝부분으로 경사와 함께 병사들이 주둔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서생포왜성에도 병사들이 주둔하는 곳에 위와 같은 방식으로 조성이 되어져 있는데 필자에게는 사진이 없네요. 순천왜교성에도 상당한 공간에 병사들이 주둔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곳이 있는데 필자의 블로그 왜성편을 참조하시면 필자의 이야기를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또 멀티님이 적어 놓았는데 “김해의 경우도 김해 왜성이 생긴 후 왜성 벽 바로 바깥에서 조선인들이 600호가 넘는 가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성왜성, 동래왜성 (동래읍성에는 군민이 당시 2만명 거주하고 있었습니다)이나 부산왜성처럼 규모가 크고 특히 동래왜성처럼 원래 성곽도시(읍성)인 점을 생각하고, 부산 읍성은 특히 16세기 초부터 약간의  일본인들이 살던 지역으로, 나중에는 조선 상인들을 위협할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김해를 비롯한 몇몇 왜성은 성곽 마을을 형성했다는 것은 매우 안전한 추측일 것입니다. ”라는 부분 중 김해왜성의 경우 어디를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죽도왜성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죽도라는 지명을 봐도 아시겠지만 죽도는 말 그대로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도왜성이 있는 곳은 현재 부산시 강서구 가락동이며 현재는 섬이 아니고 평야가 있는 곳인데 고지도와 현재 지도를 비교하면 섬이던 것이 매립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지도나 네이버지도에서 부산 강서구 가락동주민센터를 검색하시고 위성으로 보시면 이곳에 과연 600가구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이런 곳에 병사들이 상주하고 있는 왜성에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 시켜도 장소가 협소한 곳에 주민들이 찾아왔다면 다른 곳은 몰라도 식수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것인데 왜군들이 조선민들을 환영하면서 받아들였는지 알 수가 없네요. 또 고성왜성의 경우 고성읍성과 바로 연결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성읍성 바로 옆에 고성왜성이 있는데 성곽도시로 또 연결된 셈인데 여기를 성곽마을로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필자로서 이해하기 힘이 드네요. 


왜성의 경우를 자세히 보면 몇몇 왜성의 경우 반도형태로 된 높은 곳에 왜성을 지었습니다. 이는 장기적인 주둔을 위해 방어에 초점을 두고 한 것을 나타냅니다. 아래에 그림을 보면 더욱 더 이해가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웅천왜성, 안골왜성, 서생포왜성, 마산왜성, 순천왜성, 남해선소왜성, 사천선진리왜성, 김해죽도왜성, 거제장문포왜성, 거제송진포왜성 등의 경우 육지에서 공격해오는 조선군과 명군을 막기 위해 반도와 같은 곳에 왜성을 축성했으며 이도 불안한지 나성(羅城)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을 쌓아서 방어를 합니다. 이런 부분은 일본에서는 보기가 힘든 방식이라고 하더군요.    
마지막으로 진주읍성의 경우 멀티님이 이야기한 것이 있는데 진주읍성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이어오는 천혜의 자연을 이용하는 읍성이었습니다. 남쪽으로는 남강이 서쪽으로는 아주 가파른 절벽이 북쪽으로는 대사지라고 하는 해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왜군의 많은 병력도 공격할 수 있는 곳은 동측성벽만 있었습니다. 이 상태로 병사들이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는 수가 정해져 있고 조선군의 입장에서 방어하기 좋은 곳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포스팅 된 것이 없어서 조금 문제가 될 것으로 보여지지만 대충 이해하는데 도움은 될 것입니다. 

진주읍성에 관련된 포스팅 보기   중간에 보면 대사지 사진이 나오는데 우리가 알고 있었던 조선의 해자와 차원이 다르고 아주 큰 해자가 나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조선은 1. 읍성에서 산성으로 방어 전략이 바뀌고 2. 기존에 하나의 성벽으로 된 곳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고 또 그것도 부족하면 성을 나누는 방식으로 방어 전략이 바뀝니다. 3. 또 기존에 축성된 왜성을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도 사용되었습니다. (서생포왜성을 서생포진성으로 자성대왜성에 조금 변형하여 부산진성으로) 4. 왜성의 체성 기울기인 경사진 부분을 도입 5. 조총의 활용 등 많은 변화를 보여줍니다.      


끝으로 본 아무 영양가 없는 블로그를 자주 방문해주시는 헤르모드님, 유진우님, 초록불님, 明智光秀 님, 부산촌놈님, 역사관심님, Warfare Archaeology님, postvideo님, 경상문화재연구원의 박세원님, 부르릉님, wiselessnesscaller님, 료료님, 기장군청에 근무하시는 sara님, 독일인이면서 왜성에 관심을 가지시고 열정적으로 답사하시는 Jens-Olaf님 등이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주시면 재미가 있겠네요. 카페의 글을 소개해준 아케치님께 감사드리고 해박한 지식으로 토론을 이끌어주시는 멀티님에게도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필자가 적은 글에 관하여는 언제든지 태클 들어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틀린 부분 지적도 해주시고 본인의 생각도 알려주세요. ^^




덧글

  • 초록불 2011/09/15 11:05 #

    잘 보았습니다. 왜성 축조 이유에 대해서 늘 궁금증이 있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따로 드릴만한 의견은... 후ㅡ다닥~)
  • 팬저 2011/09/15 12:47 #

    응.... 초록불님이 아시는 범위에서 이야기해주시면 좋은데 말이죠... ^^
  • JOSH 2011/09/15 13:57 #

    돌공사란 참 대단하군요.
    몇백년이 흘러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니...
  • 팬저 2011/09/15 16:41 #

    조선의 성곽의 경우 내외협축방식을 사용하여 600여년이 지나도 남아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만 일본 왜성의 경우 한쪽만 돌로 축성하는 경우가 많아서 상당히 무너져 내린 것이 많습니다.
  • 천하귀남 2011/09/15 14:38 #

    일본식 축성법을 보면서 드는 생각중 하나가 조선이 어느정도 경제기반이 남아있어서 화기를 대량주조할수 있었다면 왜성의 방어력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특히 비격진천뢰 같이 성벽을 넘어 공격 가능한 무기라면 왜성의 타격이 크지 않을까 합니다.

    석환이나 조총수 보호용 토담등은 총기류는 몰라도 화포류에 상당히 취약해 보입니다.

    하긴 왜성이 순수 방어용이 아니라 시간벌이 하는동안 주변 지성이나 본성에서 후진이 오는걸 상정하고 만든것이니 주요 전투는 결국 야전이 되긴 하겠군요.
  • 팬저 2011/09/15 16:42 #

    어차피 왜성이던 읍성이던 간에 포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활과 칼, 창으로서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함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화포류가 발달하면서 성곽은 사라지게 되죠. ^^
  • ttttt 2011/10/05 22:19 #

    대포가 많이 쓰이면서 유럽 성채가 난장이 똥자루(?)같은 모양이 된 것도 그래서라죠?
  • 팬저 2011/10/06 11:31 #

    아무래도 공격측의 무기에 수비측에서도 연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나타나긴 하지만 한계성에 직면하여 .,,,,
  • 천하귀남 2011/10/06 10:06 #

    유럽 성채의 경우가 대포에 대응한 성곽의 발전형인데 돌이나 벽돌보다 대량의 흙과 높이는것보다 파고드는 해자등이 대포에 대한 방어가 용이하다보니 그렇게 됬다고 하더군요.
  • 팬저 2011/10/06 11:30 #

    잘 배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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