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안내판 오류에 관하여 조선시대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 있는 기양루의 모습으로 기양루는 조선시대 당시 삼가현의 동헌앞 삼문으로 기능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화재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삼가 기양루(三嘉 岐陽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
합천군 삼가면 금리 622-2
 
『이 누각은 동편에 관아 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삼가현성(三嘉縣城) 안에 있었던 관청의 부속 건물로 보인다. 조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건물에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지방 관공서 건물이 15세기에 많이 지어졌으므로 그 무렵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기양루라는 명칭이 이 지역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의 지명이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 재위) 때 삼기현(三岐縣)에서 강양군(江陽郡)으로 바뀐 적이 있는데, 이 지명에서 기(岐)와 양(陽) 두 글자를 따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시대 관청건물의 이름을 지을 때 흔히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현재 합천 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기와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 졌다. 2층 마루 둘레에는 닭 벼슬모양의 난간을 둘러 안전과 미학을 같이 고려하였다. 2층 마루가 넓고 사방이 트이게 만들어 졌으므로 주로 연회용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함양군 안의면에는 조선 태종 때 세워진 광풍루(光風樓)가 있는데 기양루와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여기를 보면 주로 연회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 적어 놓을 가망성이 많습니다. 이에 대하여 나주 정수루와 삼가 기양루를 비교한 것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이것 말고 하단부에 나오는 "함양군 안의면에는 조선 태종 때 세워진 광풍루(光風樓)가 있는데 기양루와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라는 부분도 건축양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용도에 관하여는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기양루의 경우 동헌의 출입을 하기위한 아문으로 기능을 하는 것이고 광풍루의 경우 고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거나 연회를 배푸는 곳으로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함양의 학사루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인데 아문인 기양루와 형태가 유사하다는 것은 필자로서 이해를 하기 힘이 듭니다. 

건축양식이나 모양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위에서 이야기한 연화용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양루의 안내판에 적혀있습니다. 삼가읍성내에 기양루의 아문과 다르게 연회를 한 곳이 있는데 바로 객사 앞에 있는 관수루입니다. 이 관수루의 경우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수루에서 연회를 했을 것이고 모양이나 기능의 경우 함양 학사루, 안의 관풍루와 같은 기능을 했을 것입니다.   
저번에 찍어 놓은 사진에서 삼문역활을 했을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사진을 보니 이런 흔적이 나오는데 이것이 과연 삼문의 역활을 한 것일까요?
얼마전에 이야기한 거제관아에 있는 기성관의 이야기입니다. "기성관의 경우 영남의 4대누각이라고 한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얼마전 필자의 경우 영남의 3대, 4대누각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김해객사 후원지에 적혀 있는 안내판입니다. 내용을 보면 "김해객사는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부속건물로서 중앙에서 내려온 관원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주로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하여 연회를 즐기거나 숙소로 사용하였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일부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일부는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부속건물로 중앙에서 내려온 관원들이 숙소로 사용한 것은 맞지만 연회를 즐기는 곳은 아니지요. 아시다시피 객사의 경우 고을의 가장 중심적인 건물이고 왕권을 상징하는 건물인데 여기서 연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지방 수령이나 관원들이 고을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찾아가서 망궐례를 하는 곳에서 잔치가 벌어진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요. 

보통 객사근처에 좋은 경치가 있는 곳에 누각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연회를 배풀었는데 그것이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것이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함양 학사루, 안의 광풍루, 삼가 관수루, 양산 쌍벽루, 울산 태화루 등의 누각입니다. 이들의 공통적으로 객사근처에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에 객사의 후원지가 될 수 있겠죠. 그런곳에 대한 설명을 하거나 아니면 객사와 후원지에 대한 설명을 따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밀양읍성 안내판에 적혀있는 내용인데 밀양읍성이 사라지는 과정에 관한 설명인데 밀양읍성의 경우 "1902년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파괴되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단지 그 내용뿐입니다. 경부선 철도와는 대략 6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밀양역과는 직선거리로 2.3km입니다. 경부선 철도를 놓기위해 읍성의 성곽돌을 가져갔다는 것인지 아니면 철도의 노선이 밀양읍성을 관통하면서 없어졌다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고 그냥 경부선철도 건설이라고만 적혀있습니다. 읍성의 경우 대부분 읍성철거령에 의해 헐리게 되는데 그부분에 관하여는 적혀있지만 밀양읍성의 경우는 이 부분과는 다르다라는 말로 적혀있습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에 있는 진해현 관아 및 객사유지 안내판입니다. 몇번 이야기하였는데 "진해현 관아와 부속 건물들은 1832년(순조32)에 진해 현감 이영모가 건립하였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이부분에 관하여는 이곳을 참고하세요. 진해현은 조선 태종13년에 개현이 됩니다. 이때부터 동헌과 객사가 있었고 그 이후 몇번에 걸쳐서 동헌이 이전을 하게 되는데 그부분은 생략을 하고 1832년에 건립하였다고 해버리면 그 이전의 역사는 어디에 가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동헌이 몇번 이전하다가 현재의 위치에 동헌이 건립된 것은 1832년(순조32)에 진해 현감 이영모가 건립하였다"가 맞는 내용인데 그렇게 적혀있지 않아서 처음오는 관광객의 경우 진해현의 경우는 1832년에 현이 생긴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인용하여 사용하는 오류 중 하나가 바로 부산진성(부산진지성)의 서문 및 성곽우주석인데 이를 살펴보면 
"부산진 지성의 서문인 금루관 성곽 양쪽에 끼워 놓은 돌에 '남요인후(南 咽喉) 서문진약(西門鎭)'이란 글을 새겼는데, 이것은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국경이요, 서문(西門)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 즉 이곳을 잃게 되면 나라를 잃게 되고 여기가 열리면 도적이 창고를 연 것과 같이 된다는 뜻으로 이 지역이 지니고 있는 국방상의 중요성을 나타낸 것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부산진성은 조선(朝鮮) 성종(成宗) 19년(1488)에 축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제1차 공격목표가 되었으며, 부산진성이 함락되자 이어서 다대포진(多大浦鎭)과 동래부가 잇달아 떨어진 것으로 보아서도 부산진성(釜山鎭城)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왜적은 임진왜란 동안에 부산포를 그들의 본국과 연결을 위한 거점으로 삼아 성을 다시 쌓기도 했었다. '남요인후(南 咽喉) 서문진약(西門鎭)'이란 글구는 임진왜란후 이 성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성을 다시 쌓으면서 우리 군·관·민(軍·官·民)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새겨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돌은 원래의 서문자리였던 성남국민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1975년 서문을 복원하면서 옮겨온 것이다."
서문자리라고 하는 성남초등학교의 경우 학교 명칭에도 나오는 것처럼 서문이 아니고 성의 남쪽 즉 남문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런 아주 기초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적어놓은 내용을 계속해서 퍼가고 있습니다. 부산진성이야기를 참고 해보시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성남초등학교모습입니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내용들이 틀린부분의 경우 하루 빨리 수정하여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문화재에 관하여 정확하게 알고 가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 내용을 알고 가는것도 문제이고, 이를 바탕으로 인터넷에 올려 계속해서 잘못된 내용들이 가득채우는 것도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각지역의 문화재위원들이 모여서 우리고장에 있는 문화재안내판에 문제는 없는지 한번쯤 점검을 하고 수정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덧글

  • 에로거북이 2011/11/22 10:54 #

    2004년도 기억인데 한산도 제승당 가는 길에 보면
    " 이곳은 임란 당시 700 명의 조선 수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
    이렇게 씌여진 안내판이 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고쳐졌는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 팬저 2011/11/22 11:01 #

    가는길이라면 어디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제승당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노천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 에로거북이 2011/11/22 11:10 #

    한산도 선착장에서 제승당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제승당 경내는 아니구요. 매표소 바로 지나서 포구에 위치한 허름한 안내판 입니다.

    통영사람이래도 막상 한산도 갈 일이 없어서 2004년도에 한 번 가본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팬저 2011/11/22 11:33 #

    포구라.... 포구에 이 정도 병력이라면 대단한 것인데.... 과연 주둔했을까요?
  • 에로거북이 2011/11/22 12:05 #

    표지판이 서 있는 자리가 작은 포구라는 뜻 이구요.

    사진이 지금 컴에 없습니다만 표지판은 포구 하나를 말하는 게 아니라 " 임란 당시 한산도 전체에 700 명이 주둔 했다 " 는 식으로 서술 하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인지 숫자상 단순 오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씌여 있어서 약간 놀랬었습니다. 전성기 삼도수군의 위용을 생각하면 숫자가 약간(?) 맞지 않아서 말이죠. ^^;
  • 팬저 2011/11/22 13:36 #

    말씀하신 것처럼 인원에 관하여는 확실히 적다는 느낌을 주네요. ^^ 적어도 7,000명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말이죠.
  • 진성당거사 2011/11/22 13:27 #

    이런 일이야 너무 비일비재해서 이제는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지자체에서 이런걸 신경 쓰는 사람도 거의 없구요.
  • 팬저 2011/11/22 13:37 #

    지자체에서 신경을 쓰지 않는가요? 그럼 이런 관광지 안내판은 누가 작성하며 누가 만드나요? 그냥 아무렇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은데 말이죠..
  • 진성당거사 2011/11/22 15:32 #

    대부분은 지적하신 대로 1970년대에 쓰여진 문화유적총람 같은 책의 내용을 대충 긁어다 놓은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은 아예 몇몇이 임의로 글을 써서 사비로 세운 것도 있습니다. 관에서 세운다고 하더라도 정작 세워 놓기만 하고, 완전히 망가지거나 삭아 부서지기 전까지는 거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나마 돈이 많은 지자체라면 최소한 몇 년에 한번 내용을 바꾸는 건 몰라도 최소한 새 것으로 교체는 하지요.
  • 팬저 2011/11/22 18:11 #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니 궁금점이 해소되는 것 같습니다. 지자체에서 다하는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松下吹笙 2011/11/25 15:08 #

    보통 건축물의 안내판 경우는 건축물의 연혁과 관련 인물의 역사, 건축물의 건축사적 특징과 구조, 관련 설화등을 복합적으로 기술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한사람 작성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류가 발생하지요. 예를 들어 건축사 전공자라면 연혁이라던가 역사성은 어디서 카피하고, 건축구조나 양식을 매우 자세히 적을테고... 사학과의 경우는 건축양식을 매우 간략하게 표현하겠죠. 이과정에서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왜곡이 발생하던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윗분이 지적하셨듯이 매우 오래전에 작성된경우가 많아서... 최신연구결과라던가 제대로 된 연구결과가 반영안된 경우도 많죠
  • 팬저 2011/11/25 15:43 #

    왜곡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아무래도 이런 문제는 하루 이틀 걸릴일이 아니네요.
  • 松下吹笙 2011/11/25 15:09 #

    암튼 문제는 큰 문제입니다. 문화재청에서 이제서야 문화재명을 하나둘씩 바로잡아 가는데.. 저런 안내판은.. 언제쯤 이루어질련지.... 까마득 하네요
  • 팬저 2011/11/25 15:44 #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명을 한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네요. 또 안내판의 경우는 상당히 더 오래 걸리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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