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C초의 동래읍성의 모습 읍성(邑城)



일제강점기 당시의 동래읍성 모습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등장하는 사진을 기준으로 동래읍성 당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동래읍성 남문 앞에 있었던 세병교로 이 세병교를 통해 부산진성과 부산왜관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세병교의 경우 원래 나무로 된 목교였으나 1930년경에 세병교를 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 아래에 등장하는 사진의 경우 동래읍성 남문의 모습입니다. 동래읍성 남문의 경우 2중으로 된 성문이었는데 이렇게 2중으로 된 성문을 가지고 있는 읍성의 경우 찾기가 힘이 들 정도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수원에 있는 화성입니다. 수원 화성의 경우 원형의 옹성에 성문을 한개 더 내어서 하였고 동래읍성의 경우 원형이 아닌 사각형의 옹성에 성문을 하나 더 만든 것이 수원 화성과 틀립니다. 보이는 성문은 2중으로 된 익성의 성문중 처음 만나는 누각과 성문으로 성문의 명칭은 세병문입니다. 누각과 여장, 그리고 성벽은 군데 군데 무너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문의 경우 홍예로 된 성문이며 성벽에는 석조형 누혈이 4개가 보이고있습니다. 남문 바깥에서 볼때 성문의 경우 홍예로 되어져 있지만 성안에서 보면 평거식으로 되어져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성벽에 사용된 돌의 경우 틈에 면도칼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틈이 보이지 않는 식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성문 위 여장에 두개의 판문이 보이는 것이 조금 다른 곳과 틀린 느낌을 줍니다. 이제 성문안으로 들어갑니다.  
▼ 사진을 보면 왼쪽에 있는 누각은 1층이고 오른쪽에 있는 누각의 경우 2층으로 된 누각입니다. 1층의 누각의 문 즉 앞쪽 문은 세병문(洗兵門)이고 뒤쪽 문은 주조문(朱鳥門)이라 했다고 합니다. 주조문엔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의 무우루(無憂樓)를 현판으로 달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략을 당한 상태라 보니 더욱 더 성문을 튼튼히 하기 위해 성문을 2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기를 씻는다는 세병(洗兵)의 의미를 담은 세병문인데 남문 앞에 있는 다리가 세병문입니다. 세병문의 세병(洗兵)의 경우 통영에 있는 통제영의 본영 건물이 세병관인데 이름과 뜻이 똑 같습니다.     
▼ 세병문과 주조문을 지난 상태에서 남문인 주조문을 바라본 상태인데 주조문에는 무우문이라는 현판이 달려져 있습니다. 주조문의 경우 홍예로 된 성문이고 세병문의 경우 평거식으로 된 성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조문에는 벽돌로 된 여장이 되어져 있으며 주조문에 사용된 성벽의 경우는 장방향의 돌로 되어져 있는 것을 봐서 임진왜란 이후 복원(1731년(영조7년))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병사들의 모습은 신식군인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병사들의 키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주조문을 거쳐 쭉 올라가면 나오는 것이 객사이며 동래시장입니다. 주조문을 지나자 마자 나오는 것이 바로 내주축성비인데 사진에 좌측에 있는 사주문으로 보이는 문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내주축성비입니다.  
▼ 남문인 주조문 안에 있는 내주축성비의 모습으로 위 사진과 비교하면 대략적인 위치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네이버 지식사전 자료를 보면 이 내주축성비의 경우 남문 밖에 있었다고 적혀져 있는데 사진을 봐서는 분명히 잘못 적혀있네요. 지식사전에 적혀져 있는 내주축성비의 내용을 보면 " 1731년(영조7년) 동래부사(東萊府使) 정언섭(鄭彦燮)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축의 내력을 적어 1735년에 건립하였다. 비명(碑銘)에 의하면 읍성의 원둘레가 3,090척, 높이가 13척이었는데 1731년 정월에 성터를 측량하여 경상도 64개군에서 5만2000명의 민정(民丁)·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연인원 41만7050명, 전(錢) 1만3454량(兩), 포(布) 1,552석(石), 미곡(米穀) 4,585석으로 동년 4월에 성벽을 축조하고, 이어 5월에 성문, 7월에 문루를 완공하고 난 뒤 둘레 1만7291척, 높이 17척의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 자료만 해도 충분히 동래읍성에 관하여 기본적인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남문을 지나서 올라오면 객사와 동헌이 있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장이 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동래읍성 모형사진을 올려 놓겠습니다. 남문인 세병문을 지나서 올라오면 보이는 객사와 동헌앞이 동래장이 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객사의 경우 동래 동헌보다 뒤쪽에 있고 가장 큰 건물이라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객사 앞에 있는 누각이 식파루이고 동헌앞에 있는 누각이 망미루입니다. 사진을 보아서 좌측에 있는 누각이 식파루 우측이 있는 누각이 망미루입니다. 그리고 식파루와 망미루 가운데 있는 누각이 바로 정원루입니다.  
▼ 동래장의 모습으로 좌측에 있는 누각이 바로 식파루인데 객사의 출입을 하는 외삼문입니다. 식파루 뒤에 어렴풋이 객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측에 보이는 누각이 회의나 연회를 하는 누각인 정원루입니다. 밀양의 영남루, 진주 촉석루, 함양 학사루, 남원 광한루 등에 있는 누각과 같은 기능을 하는 누각입니다. 
▼ 위의 사진을 확대한 사진으로  정원루와 객사와는 아주 가까이 있지만 한 건물안에 있지 않고 독립적인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객사의 외삼문 역활을 하는 식파루의 모습으로 장초석이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식파루의 경우 나주객사 금성관의  아문이며 외삼문인 망화루와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복원된 망화루보다 웅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식파루를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식파루 뒤에 보이는 내삼문의 모습과 내삼문을 지나서 만나는 객사의 모습도 보입니다. 식파루의 장초석의 경우 정말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비교한다면 2미터 정도의 높이와 지름이 1미터가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 식파루를 지나고 내삼문을 지나면 만나는 것이 객사인데 현재 동래객사의 사진은 많이 보이지 않네요. 보이는 사진의 경우 동래보통학교 교사로 사용되고 있는 객사의 모습입니다. 좌우익랑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익랑의 경우 정면 6칸의 기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네요. 측면은 적어도 3칸이상 되어 보이는데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네요. 이정도 익랑이면 작은편은 아니라고 봐야겠죠.
▼ 객사가 아닌 동래동헌의 외삼문인 망미루의 모습으로 동래도호아문이라는 현판이 보입니다. 위 사진에 나오는 식파루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초석의 경우 식파루보다는 작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래동헌이던 동래객사 모두 아문을 들어가기전에 경사가 조금 기울어져 있는 땅을 지나가야 합니다. 망미루의 경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아문과 같습니다.  망미루의 경우 객사앞 식파루와 달리 다른 기능이 있는데 바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기능과 성문의 개폐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 것이 틀립니다. 망미루의 경우 영조 18년(1742) 동래부사 김석일이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본 정원루(靖遠樓)의 모습으로 축대와 같이 조금 높은 곳에 정원루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정원루에 있다고 할때 동래읍성 모두를 볼 수 있는 조망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정원루가 아무래도 대내외적인 동래읍성의 행정,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사진을 정리하면서 보니까 정원루인 것 같아서 발제글에 정원루라고 작성하였는데 부산촌놈님이 댓글로 정원루가 아니고 망미루인 것 같다는 의견을 보고 사진을 분석해보니 필자가 이야기 한 부분이 잘못 된 것 같아서 이렇게 수정합니다. 부산촌놈님이 이야기한 망미루가 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위 사진에 나오는 망미루보다 시기적으로 봐서 늦은 것 같네요. (혹 틀린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필자가 이야기한 망미루가 맞다면 현재 많은 사람들이 걸어오는 곳으로 가면 남문이 나오겠네요. 
▼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망미루는 원래 있었던 동래동헌 앞에서 금강공원 입구 자리로 옮겨와 현재까지 있습니다.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남아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하루빨리 원래의 자리로 옮겨가서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 외삼문인 망미루를 지나면 만나는 내삼문인 동래독진대아문의 모습입니다. 내삼문의 경우 상당히 위협적이면서 기품이 있는 모습을 그려 놓아 동래동헌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 위에 있는 독진대아문 사진과 아래 사진을 기준으로 보았을때 주로 우측문으로 출입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보아왔던 내삼문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지만 전체적으로 멋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운데 있는 문의 경우 3미터를 넘어 3미터 50센치 정도 되어 보입니다.  
현재 금강공원에 있는 독진대아문의 경우 문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동래부 동헌의 위상을 알려주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으며 현재 동래부 동헌에 있는 내삼문을 철거하고 독진대아문을 옮겨와야 할 것입니다. 

이미지출처 :  부산 관련 희귀엽서 40여점, 일제 강점기의 사진집 '부산대관'




핑백

  • 20C초의 동래읍성의 모습 | Appenheimer 2011-12-05 06:38:16 #

    ... sp;세병교, 주조문, 무운문, 독진대아문, 망미루, 식파루, 정원루, 내주축성비, 읍성 팬저의 국방여행 Posted on December 4, 2011 by acousticlife. This entry was posted in Rssx01 and tagge ... more

덧글

  • 이 감 2011/12/02 21:55 # 삭제

    확실히 동래읍성이 남아있었다면 남한읍성들보다 복잡하고 규모가 큰 북한읍성들에도 못지 않을 거고요. 또 품격과 건축다양성에서는 수원화성보다 한 단계 아래일지라도 현대에는 수원화성만큼 주목받았을 만한 읍성이 되었을 겁니다. (비슷한 경우로는 진주읍성이 있지만 복원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도 활용을 너무 못하고 있으니...)
  • 팬저 2011/12/02 22:24 #

    동래읍성의 경우 아무래도 일본과 직접적인 대면을 하는 곳이라 여러가지로 잘 만들어 놓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 아직 동래읍성에 관한 연구가 많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많은 연구가 있었으면 하네요.
  • 이 감 2011/12/02 22:13 # 삭제

    동래객사는 객사들 중에서도 규모가 크기로 유명합니다. 서른 아홉 칸 건물이라고 하고요. 백제계 건축물처럼 지붕도 넓고요. 옆에 풍판의 크기를 봐도 그렇죠. 고건축이나 문화재 관심있는 부산사람들이 복원되길 바라는 건물 1순위라고 들었습니다.
  • 팬저 2011/12/02 22:25 #

    와 39칸이라면 장난이 아니네요. 그정도라면 유지하기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 객사에 관련된 자료가 있었으면 하네요.
  • 이 감 2011/12/02 23:36 # 삭제

    저도 다른 자료는 없습니다. 그저 해설사(?)분께 한 번 사진과 함께 들은게 다라 말입니다. ^^;;
  • 팬저 2011/12/02 23:37 #

    해설사라면 동래읍성에 있는 해설사인가요? 그렇다면 동래읍성 전반에 관련된 자료가 있을것 같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이 감 2011/12/03 03:49 # 삭제

    그럴 것 같습니다. ^^
  • 팬저 2011/12/03 09:46 #

    역시~ 해설사라면 자료가 있을 것 같은데 한번 가보아야 겠네요.
  • 이 감 2011/12/03 15:29 # 삭제

    그런데 그 분이 해설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 글에 물음표를 붙인 것이고요. 동래성 관련 축제 때에 만난 분이었는데 부산에서 문화재 관련 일을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성함도 모르고요.
  • 팬저 2011/12/03 16:23 #

    예... 아무래도 한번 알아보면 좋은 내용들이 나오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번동아제 2011/12/02 22:51 #

    옛날 성곽 사진은 평소 거의 다 챙겨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올리신 사진에는 처음 보는 사진이 수두룩하네요. 친절한 설명과 사진 잘 봤습니다.
  • 팬저 2011/12/02 23:14 #

    이런 사진들이 더 볼 수 있다면 예전 읍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소장가들이 봉인해제 시켜주었으면 하네요.
  • 동사서독 2011/12/02 22:51 #

    세병교가 집 근처에 있는데 (온천천 따라 쭉 걷다보면 나오죠.)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 팬저 2011/12/02 23:15 #

    아하 그렇습니까? 지금으로 부터 100년전이라면 거의 1,000년보다 더 많이 변했을 것 같습니다.
  • 부산촌놈 2011/12/02 23:03 #

    크으... 동래객사는 지금 유실된 게 참 아쉽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성초등학교가 그 자리를 계속 학교터로 쓰고 있다면 연구가 좀 더 수월할 텐데 말입니다.

    하필 동래시장 상가건물이 드러서서 말이죠;;

    객사 이름은 봉래관(逢萊館)이라고 하는데 옛날 지명을 쓴 것 같지는 않고 동래(東萊)의 별칭이거나 유래라고 할 수 있는 '동쪽의 봉래산'에서 따온 이름 같습니다.
  • 팬저 2011/12/02 23:20 #

    객사의 경우 아직까지 남아있었다면 거의 국보급이라 봐야겠죠. 국보급이 아니라면 보물급이라도 될 것인데 아쉽습니다.
    봉래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으면 하고 부산이라면 적어도 조선시대의 문화재를 복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못하네요.
  • 부산촌놈 2011/12/02 23:11 #

    독진대아문도 아까운 것이 저 보기 드문 문짝의 그림이고 또 규모인데 금강공원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기둥이 어느 정도 잘려나가서 높이가 낮아진 듯했습니다.

    양성도 없어지고 일반 기와로 대체돼버렸지요...

    첫번째 사진은 본 적이 없던 사진인데 좀 퍼가도 될까요?
  • 팬저 2011/12/02 23:17 #

    독진대아문의 경우 진짜로 동래동헌 앞에 세워놓아야 되는데 안타깝습니다.
    동헌의 내삼문을 상징할 수 있을 정도일 것인데....
    예... 저도 퍼 온 사진이라...
  • 부산촌놈 2011/12/02 23:26 #

    망미루의 경우는 현재 구청에서도 동래부동헌 학술용역조사를 언급하면서 이 사업의 일환으로 망미루의 제자리 찾는 사업을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그나저나 열번째 사진도 정원루가 아니라 망미루의 사진입니다.

    규모 면에서나 용마루, 추녀마루에 얹어진 부재로 보나 정원루는 아니에요.
  • 팬저 2011/12/02 23:29 #

    글을 적을때는 몰랐는데 이야기 듣고 다시 보니 정원루가 아니네요.
    아무래도 망미루가 맞을 것 같네요. 수정을 해야겠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
  • 부산촌놈 2011/12/03 01:06 #

    충분히 부산에는 그런 역량이 충분할 것입니다.

    제가 사는 금정구만 해도 복원 기술이 미숙해서 엉터리로 복원하거나 정권 정당성 홍보를 위해 역사유적 정화/선양작업이 진행되던 군사정권 시절에 되도 않게 현대적으로 지어진 몇몇 구조물만 제외하고는 아름답게 가꾸어진 금정산성이 있습니다.

    부산의 명찰 범어사에도 요즘들어 건물 안에 베인 일제 강점기의 잔재들을 뜯어고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고 이는 범어사 측과 금정구 측에서 협동해서 하고 있는 사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부산 역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동래에서 금정보다 약간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약간 실망스럽습니다.

    사실 동래의 복원된 문화재들은 인생문을 제외하고는 정화작업의 일환으로 복원된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시대현실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국이 역량을 다하지 않은 책임을 물을 수가 없지만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들이 적은 것 또는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요.

    게다가 개발도 문화재 복원의 걸림돌인데 현재 동래향교부터 시작되는 성곽구간 밑에 새 아파트단지의 건설이 진행 중에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아래의 성곽을 들추어내는 것은 꿈에도 못 꿀 것이고 그것보다 심한 것은 동래읍성 성곽이 아파트로 인해 가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희망을 갖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동래구청에서 현재 동래부동헌에 대한 학술용역조사를 진행 중에 있고 어쩌면 이 사업을 토대로 동래부동헌 원형 찾기의 청사진이 갖춰질 수도 있을 거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사건을 시작으로 동래구청이 활발하게 활동했으면 싶습니다.
  • 팬저 2011/12/03 01:17 #

    말씀하신부분은 동래뿐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입니다. 제가 볼때에는 동래구청에서 나서는것 보다 부산시에서 나서는 것이 빨리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예산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부분은 단체장의 관심이 하루빨리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부분을 지적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 부산촌놈 2011/12/03 01:18 #

    그죠, 역시 돈이 제일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ㅋㅋ;;;
  • 팬저 2011/12/03 01:27 #

    웅천읍성 복원하는데 엄청 많은 예산이 소요가 되더군요. 그러다 보니 10여년에 걸쳐서 복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산을 투입하고 시민들에게 욕을 먹지 않을려고 하면 아무래도 시민들의 관심과 단체장의 적극적인 의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1/12/03 13:25 #

    찬찬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만, 일단 사진상으로 충격은 '바늘하나 들어가지 않는' 성벽이 조선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이네요.
  • 팬저 2011/12/03 16:22 #

    예.... 세병문의 성벽의 경우 그렇다는 것이고 또 동래읍성 내부의 모습을 생생히 알 수 있다는 것이죠. ^^
  • 진성당거사 2011/12/03 23:03 #

    동래 객사의 경우는 익랑이 정면 다섯칸에 측면 다섯칸의 거의 정사각형 구조였던 것으로 압니다. 어쨌든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 팬저 2011/12/03 23:11 #

    정면이 다섯칸에 측면이 다섯칸이면 상당한데요.
  • poiu9632 2012/05/25 04:40 # 삭제

    저 사진 과제에 써도 될까요?
  • 팬저 2012/05/25 08:28 #

    예^^... 일부 사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터넷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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