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읍성_04 복원하기전 마지막 남은 북측체성 읍성(邑城)



언양읍성에 관한 자료들은 다 올린줄 알았는데 북문지를 끝으로 올리지 않았더군요. ㅠㅠ 그래서 봉인되어 있던 언양읍성 북측체성과 서측체성에 관한 자료들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사진이 많은 관계로 이번편에는 북측체성만 올리고 다음편에 서측체성의 자료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편은 북문지에서 서측편에 남아있는 체성입니다. 아래 항공지도를 보면 북문지에서 서측체성까지 가는 길을 보면 치성이 보이는데 치성이 끝나는 지점에 새롭게 조성된 체성이 보입니다.새롭게 복원한 체성까지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북문지 옆에 남아있는 체성으로 겨우 1~3단 정도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양읍성 2,3편에도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언양읍성의 축성은 조선전기와 중기의 방식이 함께하는 곳인데 북문지옆의 경우는 조선전기때의 방식입니다. 
사실1단 정도 남아있는 체성의 경우는 참으로 애매한 경우입니다. 여기를 체성으로 하자니 너무 낮고 담벽으로 치자니 돌의 크기가 크고 참으로 애매합니다. 
적어도 3단이상 5단 정도 되어야 어느 시대때 축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인데 말이죠. 
그래도 체성에 있는 돌의 크기를 가지고 축성한 시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위 사진에 있는 체성 바로옆의 경우 위 사진과 달리 축성한 시대상이 틀립니다.  광해군 9년(1617)때 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옆의 경우  광해군 9년(1617)이 아닌 그 이전인 연산군 5년(1500)에 축성한 체성의 흔적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조선초기 연해읍성에 사용한 방식의 축성법으로 보이고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이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돌까지 체성의 일부로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편은  광해군 9년(1617)인지 연산군 5년(1500)때인지 헷갈리기도 한 체성도 보입니다.  
담장으로 사용되었을까요? 체성위에 조그마한 돌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단에 있는 체성의 경우 아주 크고 튼튼한 돌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조선초기 연안읍성의 방식이기도 한데 잔돌로 메우는 방식이지만 조금 틀리게 보이네요. 아무래도 1400년대 방시과는 조금 비슷하면서 틀립니다. 
세종때 축성한 연안읍성의 경우 하부에 언양읍성에 있는 돌보다 더 크고 웅장한 돌들로 메우고 그 위로 가면서 작은 돌들이 자리잡는 것에 비해 여기 있는 언양읍성의 경우 큰돌과 작은돌의 경우 2~3배 차이가 납니다. 
큰돌위에 있는 중간돌의 경우도 하단에 있는 돌보다 큰 돌도 있습니다.
북문지가 있는 방향(즉 서측방향)을 바라본 모습으로 그래도 체성의 흔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북측체성이 서측체성보다는 잘 남아있는 편입니다. 
가운데 있는 성돌의 경우 무너졌는지는 몰라도 빠져서 없습니다. 하지만 협축방식으로 가운데 돌을 넣다보니 성돌이 빠져도 안측에 돌이 지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양읍성만의 축성방식(물론 다른 읍성에도 이런 방식이 있겠지만 세로방향으로 돌을 세워둔 읍성은 잘 보지 못해서 이렇게 부릅니다.)의 세로된 성돌이 체성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치성 옆의 경우 사람들이 왕래를 위해서 체성을 무너트렸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체성이 무너져 내린 것이 보입니다. 
이제 북측에 있는 치성 두개중 북동측 치성이 보입니다. 
치성의 경우 하단부와 상단부가 엄청난 차이를 보여줍니다. 하단부의 경우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한 치성임을 알겠지만 상부의 경우 언제인지 모를정도로 아주 작은 일정한 크기의 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시 답사를 할때 아주 아주 추워서 물이 꽁꽁 얼었습니다. 
치성의 경우 하단부와 상단부의 차이가 너무 심해서 복원을 할때 상단부의 돌의 경우 거의 들어내어야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해방 이후 새롭게 조성한(복원은 아니고 주민들에 의해 돌을 메꾸는 방식)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그래도 치성의 경우 높이는 3~4미터  정도 됩니다. 
치성옆 체성으로 여기는 그래도 체성이 잘 남아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쯤오자 새롭게 복원한 체성과 현재 남아있는 체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새롭게 복원한 체성의 경우 높이는 3미터 정도 되고 조선시대때 축성한 돌과는 색상이나 돌의 크기면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단부의 경우 아주 큰돌이 자리잡고 위로 가면서 작은 돌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하단부의 경우 1400년경에 축성한 방식으로 보입니다. 
돌틈을 채우는 잔돌채움 방식으로 된 복원된 체성의 경우 위에서 본 예전부터 있었던 체성과는 확연히 축성방식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잔돌채움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체성앞에 조그마한 물 웅덩이가 있는 곳이 해자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이 됩니다. 
한편으로 자연스러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예전의 방식과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착각일까요? 성벽의 높이가 낮아서 그렇는지는 몰라도 뭔가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네요. 하단부에 가장 큰돌이 자리잡고(원래 조선시대때 축성한 방식) 중간부분에 는 가장 작은 돌들이 있고 상부에는 중간부분보다 큰 돌이 자리잡고 있네요. 이상한 복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수평으로 된 돌의 크기의 차이도 그렇고 상단에 자리잡고 있는 돌의 크기 그리고 잔돌채움시 사용한 돌의 크기 등 여러면에서 조선시대때의 방식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사진에 보이는 체성의 경우 하단부도 무너져 내린 상태에서 하단,중단,상단 모두 복원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북문지 방향을 바라본 것으로 치성이 보입니다. 
복원한 체성의 경우 5~6단 정도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으로 새롭게 복원할 언양읍성의 경우 조선초기방식으로 이루어진 곳은 조선초기 방식으로 복원하고 중기때 축성한 곳은 중기때 방식으로 복원하였으면 합니다. 이렇게 시대별로 다르게 축성한 읍성의 경우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래 사진에 나오는 중,상단부의 경우 일정한 정방향의 돌로 자리잡고 있는데 하단부와 조금 어울립니다. 
여기의 경우 그래도 하단부와 어울리다 보니 제법 자세가 잡힙니다. 다만 축성된 체성의 높이가 낮는 것이 조금 거슬립니다.
여기의 경우 장방향의 돌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부분의 경우 복원할때 아주 신경을 쓰면서 복원한 느낌을 줍니다. 하단부와 제법 어울립니다.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하단부와 중간과 돌의 크기차이가 너무나네요. 
복원한 체성의 경우 어느 한부분은 아주 잘 복원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떤 곳의 경우 복원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런 부분을 교훈 삼아 새롭게 복원할 언양읍성의 경우 조선전기, 중기때의 방식으로 잘 복원하였으면 합니다. 




핑백

  • 언양읍성_04 복원하기전 마지막 남은 북측체성 | Appenheimer 2011-12-10 08:09:17 #

    ... 우 조선전기, 중기때의 방식으로 잘 복원하였으면 합니다. tag : 읍성, 언양읍성, 울산언양, 언양, 언양읍성지 팬저의 국방여행 Posted on December 9, 2011 by acousticlife. This entry was posted in Rssx01 and tagge ... more

  • 팬저의 국방여행 : 전국의 읍성_01 경남전남편 2012-07-04 21:21:38 #

    ... 양읍성-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지읍성으로 읍성의 다른 축성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언양읍성_01다양한 축성방법의 언양읍성_02북측체성_언양읍성_03복원된 북측체성_언양읍성_04부산시 기장읍성 - 최근 본격적인 복원이 결정된 기장읍성기장읍성_01 동문지와 동측체성기장읍성_02 남문지와 남측체성기장읍성_03 무너진 서측체성동 ... more

덧글

  • 이 감 2011/12/10 03:32 # 삭제

    복원한 부분의 성벽이 애매한 느낌이기는 하네요. 돌 크기의 차이가 거의 없는데, 남아있는 성벽도 그러하다면 모르겠지만 남아있는 성벽과 대비가 크니 더 그렇군요.

    - 부산 인생문 근방에 갈일이 있어서 오랫만에 내려가 봤는데 인생문을 처음으로 접해봤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다 했는데 수원에 가면 수원화성 덕분에 곳곳에 수원화성을 이미지화한 구조물들이 있지요. 육교라든가 광장의 조형물이라든가요. 꼭 그것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 서울 오면서 강릉에를 들렀는데 강릉객사지를 방문했습니다. 고구려 양식이 남아있는 강릉객사문은 여전히 명품이었고 복원한 관아와 객사 임영관도 꽤 정비를 잘 해 놓았더군요. 객사 임영관의 구한말 사진자료는 꽤 본 것 같은데 강릉읍성의 사진자료는 보질 못했군요.
  • 팬저 2011/12/10 10:21 #

    이래 저래 복원한 곳과 남아있는 곳과는 차이가 있죠. 이왕 복원할 것 같으면 높이라도 높게 복원을했으면 했는데 그렇지 못하네요.
    강릉객사지의 경우 사진을 보니 좋더군요. 저도 한번 가보야겠네요.
  • 부산촌놈 2011/12/10 15:04 #

    강릉객사문은 배흘림기둥과 주심포계의 고려양식의 건물이 아닌가요?
  • 팬저 2011/12/10 15:17 #

    강릉객사문의 경우 이야기하신 부분이 맞을 것입니다.
  • 이 감 2011/12/11 00:24 # 삭제

    강릉객사문은 물론 고려후기 건물이고 고려양식 건물이 맞습니다만 고구려계 고건축 양식의 특징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해서 고구려계 건축양식이 담겨있는 건물이라고도 합니다. 비슷한 건물로 이번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하앙식 공포를 사용한 화암사 극락전을 들 수가 있죠. 조선시대 건물이지만 공포와 지붕이 백제양식의 건물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백제계 건축양식 건물이라고도 하지요.

    고려시대까지는 지방색이 강하게 건물들이 지어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양식들이 전해져서 건물들이 지어졌고 이 경향이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어느 정도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 팬저 2011/12/11 15:08 #

    좋은 정보와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
  • 역사관심 2011/12/10 03:39 #

    읍성들의 하단부 돌크기에 새삼 놀라고 있습니다. 고대-중세 성벽들의 돌크기가 새삼 궁금해지곤 합니다.
  • 팬저 2011/12/10 10:20 #

    언양읍성에 사용된 돌의 크기의 경우 큰 것은 거의 1미터가 넘는데 저정도면 중간크기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성읍성지에 가보니 그곳에는 2미터로 보이는 돌이 있더군요. 그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http://panzercho.egloos.com/10485748
    함안읍성지의 경우도 네모모양에 1미터 크기가 있더군요. http://panzercho.egloos.com/2768348
    삼국시대때의 돌의 경우는 작은 것을 수평으로 놓고 축성하는 방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돌이 작다고 볼 수 있죠.
    조선전기때 가장 큰 돌이 하부를 지탱하고 위로 가면서 작은 돌을 사용했고
    조선중기 이후는 같은크기의 중간돌로 축성했더군요.
    그러다보니 조선전기때 축성한 곳에 가장 큰돌이 남아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 역사관심 2011/12/10 11:23 #

    답변 감사합니다. 고려시대도 궁금해지네요. 조선 전기의 건물지가 경복궁에서도 많이 나오는데 건축물자체도 크더군요.
  • 팬저 2011/12/10 11:39 #

    고려시대의 경우도 삼국시대와 별차이가 없더군요 아무래도 산성이라 돌을 구하기가 힘이들어서 그렇는지 모르겠네요.
    다만 돌들이 조금 더 크지만 조선시대 연안읍성 초기 축성방식에 비하면 너무 작더군요.
  • 역사관심 2011/12/10 12:47 #

    그렇군요. 정보 고맙습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