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등성(구.영등포진성) 진성(鎭城)



예전에 성곽탐방기때 올렸던 구영등성 구 영등포진성에 관한 이야기를 이제 올려보겠습니다. 거제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구영등성의 경우 임진왜란때까지 영등포진성이었고 북으로는 제포진 북서측으로는 안골포진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남측으로는 구율포진성(임진왜란 당시 율포진)과 장목진이 위치하고 있었던 곳입니다.  
▼ 구영등포진성의 기록을 살펴보면 문헌에의하면 진성의 둘레는 1,068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길이 550m, 높이 3m, 너비 4m라고 하는데 현재 거의 기단부만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체성의 축조수법은 조선중기 일반평지 읍성 축조수법과 같이 협축하였는데 외벽은 자연대석으로 겉쌓기 하고 , 내벽은 막돌로 지면에 중첩하게 쌓은 두 적석은 대소석을 차곡차곡 겉쌓기 하였습니다. 축조시기는 성종 21년(1490년)에 석축을 축조하기 시작하였으며, 중종,선조조에는 잦은 왜구의 침입을 받아 크게 훼손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 인조 원년(1623년)에 지금의 거제시 둔덕면 영등으로 진이 이동되고 이곳은 구영등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 구영등포진성은 만호가 지휘하였으며 불멸의 이순신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우치적으로 등장하는 이재포씨가 연기하였습니다. 구영등포진성의 경우 바다와 어느정도 거리(직선거리로 북문에서 180m)가 떨어져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현재의 바다보다 더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래에 나오는 구영등포진성의 평면도로 199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거제시 성지 조사보고서"에 있는 구영등포성 평면도를 지도에 삽입한 것입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1995 거제시 성지 조사보고서"의 경우 안측에 있는 체성이고 필자가 직접 방문하고 보니 외각부분에 체성이 지나갔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구 영등포진성의 경우 사각형에 가까운 진성이고 성문이 남북두개가 있는 형태이고 성문주위로 옹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또 치성이 4개 성우가 4개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구 영등포진성의 경우 북측이 낮고 남측이 높은 상태인 산성(산성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형태)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평지성이라 부르기도 그런 상태입니다.    
 구영등포진성을 가기 위해서는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되는데 이정표는 구영교회입니다. 
 올라가자 마자 민가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체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도에 나오는 A지점입니다. 
 위 사진에서 조금 걸어오면 만나는 북측체성으로 여기가 잘남아있는 체성중 하나입니다. 이 구영등포진성의 경우 조선군이 축성한 구영등포진성과 왜군이 쌓은 영등포왜성이 있다보니 주민들도 잘 모르시고 체성부분을 이야기하니 위에 있는 영등포왜성을 이야기하시더군요.
 이부분은 북문의 옹성부분으로 위 사진의 맞은편이고 지도상에는 C지점이 됩니다. 확연히 옹성임을 알 수 있겠더군요. 
▼ 이렇게 남아있는 옹성위에 민가를 지어놓았습니다. 
 구영등성에 관한 안내문이 있었습니다. 저번에 마산에 있는 회원현성 안내판과 같이 QR코드로 작성해놓으면 편리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불멸의 이순신장군에 나온 이제포씨의 사진은 필수입니다. 그래야 아 이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북문지 근처에서 바라본 구영등포진성의 남문입니다. 길이 보이는데 그곳이 남문지이고 뒷산이 있는 곳이 영등포왜성이 있는 곳입니다. 
 구영교회로 교회 축대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 구 영등포진성의 체성입니다. 
 구영교회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옹성의 흔적이 지나가는데 사진상에는 도로의 주황색천이 있는 곳 정도 됩니다. 
 옹성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려주는 체성의 일부입니다. 이제 겨우 하단 1~2단 남아있지만 구영등포진성의 옹성입니다. 그림지도에서 본다면 D지점입니다. 
 옆에서 본 것으로 발굴조사를 한다면 확실하게 나올 것 같습니다만 상단부는 도로로 개설한 관계로 이제는 옹성은 볼 수 없겠죠.
 옹성과 체성이 만나는 부분의 경우 근대에 축성한 돌들이 보이더군요.
 구영등교회의 축대로 사용중인 북측체성으로 이곳이 그럭저럭 잘 남아있는 곳이고 길이의 경우 대략 50여미터 잘 남아있으며 산으로 올라가는 체성의 경우 흔적을 찾기가 힘이 듭니다. 
 축성방법을 보면 생각했던 것 보다 조선초기 연해읍성에서 보던 축성방식과 조금 틀리더군요. 
 사진상 보시면 큰돌이 하단에 자리잡고 있지만 돌들이 일정한 크기와 일정한 규격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축대로 사용중인 이곳이 구영등포진성의 체성인데 구영등성을 소개할때 빠지지않고 소개되는 장면입니다. 
 이부분의 체성의 경우 위에서 본 체성과는 조금다르게 조선초기 연해읍성에서 축성한 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상단부의 경우 너무 작은돌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예전에 있었던 성돌인지 근대에 사용한 돌들인지 알 수가 없네요.
 이제 구영교회옆으로 길을 가서 서측체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조그마한 오솔길옆 우측에 돌출된 돌이 체성이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내외협축방식임을 증명하는 성돌로 이 돌의 경우 성외부의 돌이 아닌 내부의 돌입니다. 그림지도에서는 F지점입니다.
 위 사진의 경우 성의 내부에 있는 돌이었다면 현재 보이는 부분의 경우 구영등포진성의 성 외부 체성입니다. 
 기단부와 겨우 1단 정도 남아있는데 보기에 안스럽습니다. 그림지도에서는 G지점으로 북측체성과 서측체성이 만나는 성우부분입니다. 
 성우부분에서 구영교회를 바라본 모습으로 사진을 보면 성우부분이 지형적으로 높은 곳이라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본다면 웅천에서 나오는 배의 모든 것을 바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금 더 올라오자 확실히 돌출된 치성과 같은 성우부분이 보입니다.
 G지점에서 서측체성을 바라본 모습으로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는 모습이 보입니다. 
 조금 내려와서 본 북측의 체성부분
 조그마한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이제 서측체성을 볼 차례입니다. 
 조금 올라가자 서측체성에 사용한 돌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습니다. 마치 필자를 반기는 것처럼 양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오면 만나는 서측 치성부분입니다. 그래도 용캐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치성에서 다시 올라가보니 현재 남아있는 서측체성부분이 보이는데 사진과 같이 겨우 1단 정도 남아있습니다.
 여기저기 남아있는 곳도 겨우 기단석과 1단 정도 남아있습니다. 이거라도 남아있어서 여기가 영등포진성 자리였음을 증명합니다.
 체성의 폭을 알 수 있는 사진으로 회각로의 경우 겨우 1미터 2~30센치 정도 되어 보입니다. 
 겨우 남아있는 서측치성의 모습입니다. 
 동측을 살펴본 모습으로 동측체성의 경우 산을 끼고 형성되어져 있으며 민가위로 올라가면 보이는 수평으로 된 지형이 남측체성이 지나가는 곳으로 나무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민가로 보이는 저 부분이 구 영등포진성의 동헌자리였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보이는 축대의 경우 근대에 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치적으로는 나중에 소개할 영등포왜성의 체성과 같은 위치입니다.  
 위태 위태 남아있는 구 영등포진성의 체성부분입니다. 
 서측체성이 지나가는 곳에서 북측을 바라본 바다로 저 멀리 창원의 불모산이 보입니다. 
 서측체성에서 내려와서 구영교회를 지나서 동측체성을 향해갑니다. 아래에 보이는 부분의 좌측이 체성이 지나가는 곳으로 그림지도에서 본 A지점의 위지점입니다.
 동측체성의 경우 흔적을 찾기도 힘들고 지형도 조금 힘들어 보여서 가보지 않았습니다. 
 줌을 통해서 보면 군데 군데 체성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돌들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좌측의 경우 상당히 가파르게 형성이 되어져 있어서 적의 입장에서는 동측체성의 경우 공격하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이제 남문지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보이는 민가 앞이 형옥자리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구영교회에서 길이 난 방향으로 쭉 올라오면 만나는 것이 바로 우측에 보이는 부분으로 영등포왜성의 일부입니다. 필자의 경우 이 부분을 보자마자 서생포왜성에서 보왔던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 가 생각이 났습니다. 
 일본의 아마추어 성곽 연구가들은 이곳 구 영등포진성을 와서는 대수문(大手門 (おおてもん) 오테몬으로 읽는다))으로 추정한다고 하는데 어느것이 정답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구 영등포진성안에 왜성의 흔적이 있는 체성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은 드문경우입니다. 물론 고성왜성의 경우도 고성읍성과 바로 연결이 되었지만 말이죠. 
 민가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왜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성 특유의 기울기를 알고 싶어서 찍은 사진입니다. 
 민가로 이어진 곳에는 작은돌들이 있는데 이곳은 아니고 그 뒤에 왜성의 축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랑이 밭과 같이 축대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워낙 작아서 왜성의 체성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무가 있는 부분이 남측체성입니다. 
 조금 더 걸어와서 본 민가로 축대에 자리잡고 있는데 축대의 경우 왜성의 체성 기울기와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영등포왜성의 체성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에 축성한 방식과 근대에 축성한 방식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큰 돌이 하단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체적인 축성방식만 보아도 왜성특유의 축성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등포진성이 있는 곳에 영등포왜성을 축성한 것은 바다로 침입하는 조선군을 막기위해서 축성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근처에 자신들의 배가 출입하는 선착장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산정상에 있는 영등포왜성에서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온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도 한몫했던 이유때문에 이곳에 대수문(大手門)을 세웠을 것입니다.  
▼ 왜성의 기울기와 함께 구영교회의 모습이 보입니다. 
▼ 영등포왜성의 대수문으로 생각된다고 했을때 왜성이 긴편에 속하는데 이부분은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로 보이는데 학계에서는 조사된 것이 없다보니 뭐라고 단정하기 힘이 드네요. 
▼ 높이가 3미터 ~3.5미터 정도 되는데 서생포왜성에서 보았던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와 너무나 비슷한 느낌이어서 필자는 한눈에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라고 생각했는데....
 영등포왜성 체성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담장이 있는데 이는 민가에서 근대에 축성한 것 같습니다. 
 영등포왜성의 체성이 끝나는 부분의 경우 왜성특유의 방식인 기울기가 나타납니다. 문제는 필자가 이야기한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라는 부분의 경우 겨우 29미터 정도라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길이가 작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일본 아마추어 성곽연구가에서 이야기한 대수문(大手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옆에 작은 계단이 있는데 이부분의 계단의 경우 예전부터 있었는지 근대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돌의 색상으로 봐서는근대에 축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수문이었다면 민가의 출입구가 있는 곳이 성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영등포왜성의 채성의 길이를 알 수 있습니다. 민가가 있는 곳에 왜군들의 막사가 있었겠죠. 
 근대에 축성한 축대로 전체적으로는 영등포왜성의 방식과 비슷하게 축성되어져 있지만 왜성과 다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축대 옆에 있는 우물로 예전부터 이곳에 우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제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것이 바로 남문지입니다. 남문지의 경우 보이는 전봇대보다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남측체성의 모습을 찍으려고 했는데 사진과 같이 잡풀들이 너무 많아서 찍기가 곤란했습니다. 
 남문지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또하나의 영등포왜성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부분에 왜군들의 주둔지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구 영등포진성의 경우 거제도 최북단에 있으면서 웅천과 가까이 있었던 진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싸워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왜군들에 의해 영등포왜성으로 다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왜군들은 자신들의 영등포왜성을 축성하면서 많은 돌들을 영등포진성에서 가져왔을 것입니다. 임진전쟁이 끝난 후 영등포진성의 경우 무너져 내린 체성이 많아서 현재 거제시 둔덕면으로 수군진이 옮겨갔을 것입니다.  

현재 기단석과 겨우 1~4단 정도의 체성이 남아있지만 역사적으로나 문화재적으로 중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구 영등포진성의 이야기를 하면서 남아있는 영등포왜성의 이야기도 많이 등장하게 되었네요. 



덧글

  • 요플레 2012/04/20 16:37 # 삭제

    진성도 잔존 체성의 성돌 위에 집을 짓거나 축대로 사용하는 건 읍성과 비슷한 양상이네요. 경주읍성도 남원읍성도 마찬가지고.. 많은 수의 성곽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저도 실제로 처음봤을 때는 신기했었습니다 ㅎㅎ
    아마도 집을 지을 때 번거로움 없이 가장 수월하게 지반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런지요? 왜성 특유의 기울기라는 건 어떤 말씀이신지요?
    왜성만의 기울기 수치가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독특한 조성방식을 가리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보통 외면부를 기울여서 체성을 쌓는걸로 알고 있는데요.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 팬저 2012/04/20 16:49 #

    왜성의 경우 기울기가 70도 내외이고 조선성의 경우 80~90도 정도라 한눈에 보기에 차이를 느낄수가 있습니다.
    조선성의 경우 내외협축식으로 쌓는 것에 비해 왜성의 경우 외각에만 돌로 채우고 나머지는 보통 흙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물론 축성할때 흙을 먼저 쌓고 돌로채움닙니다만.... 아무튼 왜성의 경우 협축이 아니다보니 무너져 내린 곳의 경우 복원이 하기 힘이 듭니다.
    읍성의 경우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무너져 내렸고 왜성은 보존하였지만 축성방식의 차이로 인해 왜성이 남아있는 곳은 드문이유도 축성방법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 요플레복숭아맛 2012/04/20 17:09 #

    영등포진성의 경우 모든 체성의 쌓기 방식이 협축식으로 되어 있는건가요? 실제로 가보지를 않아서 선뜻 감은 안오지만

    산지와 평지 모두 나타나는 걸로 봐서는 언뜻 협축과 편축이 같이 사용되었을거라고 생각이 들기도 해서요.

    서천에 있는 장암진성의 경우 산지부분은 편축, 평지부분은 협축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
  • 팬저 2012/04/20 17:12 #

    영등포진성의 경우 현재 제가 본 것은 내외협축식의 방식이었습니다. 영등포교회가 있는 곳의 경우 아직 발굴을 하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영등포교회에서 서측체성을 올라가면서 보니까 내외협축식의 방식이 보였습니다. ^^
    나머지 동측체성의 경우는 흔적이 많이 없어서 정확하게는 알수 없었습니다.
    정확한 것은 발굴조사를 해보아야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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