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 완료된 웅천읍성 동측체성을 가다_03 읍성(邑城)



몇번 올라온 웅천읍성 동측체성의 회각로이지만 복원을 하고 나서 올라오니 또 다른 맛을 주는 것 같습니다. 
동측체성과 체성앞에 있는 해자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동측체성의 경우 내외협축식으로 축성되어져 있고 가운데 잔돌로 채우는 방식인데 위에는 조금 큰돌로 자리 잡고 있네요. 
동문인 견룡루를 바라보면서 부산진해신항만을 본 모습입니다. 저멀리 보이는 곳에 부산진해신항만이 보이고 저곳으로 웅포해전 당시 이순신장군의 함대가 들어왔어 전투를 하였고 정유재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소서행장)]가 진출하던 곳도 저곳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소서행장)]가 배로 들어오고나서 바로 웅천읍성 동문측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아직 민가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지 웅천읍성 동측체성 전체를 개방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사생활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보입니다. 
들어가지 않고 웅천초등학교 뒷편에 있는 내탁을 찍었습니다. 웅천읍성의 경우 내외협축식이 아니라 저것과 같이 내탁식으로 축성하였습니다. 사진과 같이 ㄱㄴ 식 계단식으로 돌로 축성하고 그위에 흙으로 덮는 방식을 채택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의 경우 언양읍성에서도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웅천교회 옆에 있는 체성의 경우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견룡루 좌우에 이런 돌들을 갔다 놓았습니다. 저번에 한번 이야기한 석환입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런 돌을 전문적으로 던지는 부대가 있었으며 삼포왜란 당시 왜인들이 웅천읍성을 점령하고 있자 김해에 있는 투석부대를 데리고 와서 웅천읍성에서 전투를 치루었다고 합니다. 당시 투석꾼이 던진 돌에 왜인의 방패가 부서지기도 하였다고 할 정도로 돌의 위력은 강했습니다. 투석꾼의 경우 사거리가 얼마나가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선봉에 서서 돌을 던졌다고 합니다. 김해에 있는 사람들이 돌을 잘 던졌는지 아니면 김해에 석전부대가 존재하였는지는 몰라도 김해 석전부대의 이야기는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김해에서는 석전놀이라는 민속놀이를 발전계승하고 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석전이 바로 투석꾼들이 던졌던 돌에 관한 이야기를 꾸민 것입니다. 이 석전놀이의 경우 김해뿐 아니라 조선시대 전국 어디에서나 자주 볼 수 있었던 놀이였습니다.
견룡루의 모습으로 사진과 같이 우측에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오면 되는데 여장이 없기도 하고 우측에 안전시설이 없다보니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견룡루를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고 견룡루안에는 북이나 종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동문에 북이 설치되었는지 아닌지에 관하여는 웅천읍지에 기록이 되어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북의 경우 보통 읍성안 누각이나 성문 누각에 설치를 하는데 현재 복원한 곳이 동문인 견룡부뿐이라 이곳에 설치하면 어떠할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견룡루 바닥의 경우 우물마루형식입니다. 
견룡루위를 바라본 모습으로 대들보와 종도리가 보입니다.  
너무 많이 갈라진 곳이 많이 있네요. 저번에도 이야기하였지만 충분한 시간을 두고 말리었으면 이런 현상이 덜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종도리뿐 아니라 서까레도 쩍쩍 갈라져 있어 조금 불편하였습니다. 
이제 옹성으로 나가려고 견룡루를 나섰는데 안전시설이 없어서 그런지 어린아이들의 경우 위험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옹성으로 가는 회각로의 모습이고 보이는 산의 경우 저곳에 자마왜성이 있었습니다. 자마왜성에서 웅천읍성을 바라보면 대략 어떤 모습이고 웅천읍성 내부의 모습이 어떤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웅천읍성 동남측 체성과 주차장, 해자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보이는 산봉우리가 웅천왜성이 있었던 곳이고 웅천왜성의 경우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가 있었던 곳이라 산아래에도 웅천왜성이 있었습니다. 웅천왜성과 웅천읍성과 직선거리로는 대략 2km내외로 도보로 30분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용두의 모습입니다.
견룡루 야간모습을 위해 설치된 조명시설 
옹성의 회각로의 경우 바닥이 불규칙하지만 그래도 고르게 돌을 얹어놓았습니다. 
옹성안으로 주민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출입을 하는 것 같더군요.
옹성에서 바라본 견룡루의 모습입니다. 
옹성에서 조교를 바라본 모습으로 옹성에서 조교를 올리거나 내렸다고 합니다. 
견룡루에 북이 달려 있다면 조금 더 현실적이기 한데 관광객들이 자주 북을 친다면 살고 있는 주민들이 골치아프겠죠.
미석위에 여장과 같이 조금 높게 설치하였으며 그 옆에 시멘트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발라놓았습니다. 양성바름은 아니고 마사토나 삼합토인가요? 
생석회, 강회, 마사토, 모래 등을 혼합한 삼합토겠죠. 
옹성에서 바라본 동측체성과 해자의 모습입니다. 해자 옆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S자형식으로 재미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취두 그리고 용모양이 용두입니다. 취두 밑에 하얀색으로 칠해진 것이 전통적 방식의 양성바름입니다. 
견룡문의 현판 모습인데 과연 누가 적었을까요?
옹성에서 동남측 체성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체성의 높이를 알 수 있으며 해자의 물의 양도 알 수 있겠죠.
미석을 잘 알 수 있으며 설치된 조명인데 앞으로 웅천읍성 동측체성의 경우 야간조명을 많이 설치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웅천읍성안에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밤늦도록 조명을 밝게할 경우 민원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높이의 경우 4~5미터 정도 되어 보입니다. 
석환에 대한 설명문으로 주로 웅천읍성 발굴에서 나온 이야기만 적어 놓았습니다. 위에서 필자가 이야기한 석전부대나 웅천읍성에서 석전부대의 활동에 관하여도 적어 놓았다면 더욱 더 좋았을 것인데 말이죠. 
석환의 모습으로 우리가 고갯길을 갈 때 돌을 몇개씩 던져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석전용 돌감을 모아두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동측과 남측의 성벽의 경우 내탁식으로 완전히 처리하여 놓았습니다. 멀리보이는 산 뒷편이 제포왜관이 있었던 곳입니다. 직선거리로 3km 내외라 왜인들이 한양을 가기위해서는 이곳 웅천읍성에 들러서 현감에게 신고를 하고 창원으로 떠났습니다. 왜인들 입장에서 웅천읍성을 들어오는 것은 보통이 아니죠.  
읍성내부의 모습입니다. 
너무 갈라지어서 보기가 안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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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초효 2012/05/10 19:14 #

    충분한 기간을 두고 목재를 가공해도 저렇게 갈라지는 것은 피할 수 없지요. 보기 좋게 하려고 일종의 충전재로 매끈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저렇게 칠까지 다 해놓고 허옇게 갈라지는 모습이 나온 건 목재를 제대로 가공하지 않았다는 증거죠.
  • 팬저 2012/05/10 22:04 #

    목재를 가공하지 않았다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 초효 2012/05/12 17:28 #

    원래 건축하기 전에 목재는 충분히 건조시켜야 합니다. 뒤틀림이나 부식 같은게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바닷물에 오래 담궈두기도 하고, 소금을 바르기도 하고, 햇볕에 오래 말려두기도 하지요.

    이렇게 가공이 잘된 목재는 수백년을 너끈히 버팁니다. 서양의 경우도 고성의 목재들 중에 800년 가까이 된 것도 있다고 하지요.
  • 팬저 2012/05/12 17:44 #

    그렇군요. 그렇게 해야하는데 그냥 대충하니까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군요.
  • 이 감 2012/05/10 20:40 # 삭제

    용두와 취두를 바꾸어 말씀하셨네요. 용마루에 얹는 맹금의 머리에서 목부분 모습에 옆면에 귀면, 용, 날개 등을 부조 한 것이 취두,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 얹는 용머리 모양이 용두입니다.

    해자는 좀 더 채워지면 좋겠네요. 기둥은 확실히 칠하고 갈라진 거군요. -,.-;
  • 팬저 2012/05/10 22:04 #

    그렇습니까? 하하 수정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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