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여도에서 본 흥양읍성의 모습입니다. 성문은 두개로 되어져 있으며 서문과 남문만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문옆에 동헌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문을 지나 위로 올라오면 보이는 것이 객사이며 향교의 경우 서문을 지나서 가야 있습니다. 또 서문앞에 고읍면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봐서 예전에 고읍면에 읍치가 있다가 다시 옮겨 갔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고읍면을 지나면 원문이 있는데 원문에 관해서는 여기를 참고하세요.
▼ 해동지도에서 본 흥양읍성의 모습으로 광여도와 마찬가지로 성문은 남문과 서문만 자리잡고 있으며 서문옆에 동헌 그리고 그옆에 객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광여도와 달리 여장이 표시되어져 있으며 원문이 자리잡고 있는 곳의 경우 상당히 땅의 폭이 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여지도에서 본 흥양읍성으로 위 고지도와 마찬가지로 읍성은 둥글게 형성되어져 있으며 성문은 서문과 남문 그리고 서문옆에 동헌이 있으며 객사의 경우 우측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 지승지도에서 본 흥양읍성으로 둥근 흥양읍성에 성문은 두개이며 위 고지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 1872년 지방지에서 본 흥양읍성으로 읍성은 둥글게 그려져 있으며 홍교도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또 이때까지 보아왔던 성문의 경우 두개였었는데 이 지도에는 3개가 그려져 있습니다. 또 서문옆에 있었던 동헌의 경우 객사옆 우측으로 이동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미루어보아 서문옆 동헌의 경우 한차례 이동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헌의 경우 자리를 가끔식 옮기게 되는데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풍수지리 때문일 것입니다. 성문의 경우 서문과 남문만 있다가 북문이 보입니다. 북문에서 내려오는 하천을 방어하기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용도였을까요? 보시면 서문이나 남문과 달리 길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수구문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문과 남문옆에 있는 수구문인 홍교와 달리 누각이 되어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림을 보면 개거식으로 된 누각이 보이는데 그 밑으로 물이 흘러갑니다. 수원화성의 방화수류정처럼 누각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 흥양읍성의 평면도입니다. 위 고지도에서 본 둥근 형태의 읍성은 아니고 타원형에 가까운 읍성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북측과 서측일부와 그리고 동측일부를 낀 평산성의 구조임을 알 수있습니다. 노랑색으로 된 것은 흥양읍성의 성곽도이고 녹색선은 예전 도로이며 하늘색으로 된 것은 현재의 하천입니다. 1872년 지방지에 나온 형태의 동헌과 객사를 표시하였고 객사의 경우 외삼문과 내삼문 모두 없기에 여기쯤 되지 않을까 싶어서 표시하였으며 동헌의 외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동헌의 내삼문의 경우 현재 있는 자리를 표시하였습니다. 평면도에서 동헌을 보면 동측으로 많이 치우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광여도, 해동지도, 지승, 여지도에서 본 고지도에는 동헌이 서측에 있었습니다. 예전 동헌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고흥의 경우도 남문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어졌습니다. 남문주위가 중심 상업지더군요. 현재 흥양읍성에 남아있는 체성을 보면 북측체성과 서측체성 일부입니다.
▼ 흥양현 동헌과 객사터 그리고 예전길을 표시하였으며 객사의 내삼문 및 외삼문, 홍살문을 추정하는 것이며 동헌의 외삼문의 경우도 추정하는 것입니다. 동헌터 옆에 있는 현재 고흥군청자리가 예전 흥양현 내아자리로 추정합니다.
▼ 고흥군 청사 정문 옆에 자리잡고 있는 흥양읍성 아문인데 필자가 방문 했을때에는 보수중이었습니다. 흥양아문 대신에 고흥아문으로 적혀져있습니다.
▼ 공사장 가림벽 사이로 본 고흥아문의 좌측 문입니다.
▼ 고흥아문 뒷부분으로 조선시대 내삼문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고흥아문과 동헌인 존심당에 관한 안내문
▼ 고흥아문에서 바라본 동헌인 존심당의 모습으로 벤치가 있는 부분이 죄인들이 부복하고 앉아있는 장소와 비슷합니다.
▼ 좀 더 가까이 가서 바라본 존심당의 모습. 존심당의 경우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팔작지붕의 경우 지체가 높은 건물에 사용중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런 동헌과 같은 곳에 사용했겠죠. 존심당을 가만히 보면 상방과 협방이 나란히 붙어져 있습니다. 보통 상방이 우측에 협방이 좌측에 있는 것에 비해 특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왜 이렇게 했는지 궁금하네요.
▼ 존심당의 현판입니다. 보통 동헌에 사용하는 당호의 경우 수령이 백성들에게 임하는 태도를 표시하였는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동헌의 당호로 사용한 것 중에 많이 사용한 것이 근민헌과 평근당, 안민헌, 제민헌 등이 있습니다. 백성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리겠다하여 평근당(平近堂),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겠다하여 안민헌(安民軒),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겠다하여 제민헌(濟民軒)으로 사용했는 것에 비해 흥양현에는 존심당(存心堂)을 사용했습니다. 존심당은 과연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요? 명심보강에 나오는 존심편에 "사람은 누구나 양심이 있다. 양심이란 세상사,인간사를 올곧게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움직이면 옳은 행동이며, 선한 행실이 혹 양심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곧 악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자신의 행위가 양심에 따른 올바를 행동인가를 생각하고, 반성하여 결코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지방 수령으로 옮은 행동을 취하라고 하는 뜻이 내포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 그 좋은 뜻도 중요합니만 현판을 못으로 고정 시켜 놓았네요.
▼ 밀양읍성 관아에 있는 매죽당의 현판으로 새롭게 복원한 것입니다. 여기에 현판을 고정시키는 것과 못을 친 것은 확실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물론 매죽당의 현판의 경우 양각을 해놓아서 조금 보기에 민망합니다만.....
▼ 이 구멍의 역활은 무엇일까요? 이글을 발행하고 난후
松下吹笙(송하취생)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松下吹笙(송하취생)님 이야기한 내용을 옮겨보겠습니다. " 이야기한 것이 바로 환기구입니다. 마루를 깔게 되면 마루 아래 환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구멍을 내게 되지요. 경회루 같은 경우는 마루 아래가 탁 트여 있으니까 상관없지만, 존심당 같이 기둥 사이를 막아야 할경우에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구멍을 뚫어 놓습니다. 구멍을 하나만 내기도 하고, 아니면 격자창 처럼 하기도 하고, 벽돌로 구멍을 내기도 합니다. 답사다니시면서 다양한 구멍을 보는 것도 한가지 묘미죠" 그러니까 공간이 있는 상태인 마루에 구멍을 내어서 환기를 시킨다는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 아무래도 사람이 사용하면 지금과 같은 먼지가 잔뜩 낀 모습은 아닐 것 같은데 말이죠.
▼ 단청의 경우 너무 화려하게 사용은 하지 않았습니다.
▼ 상방에 들어가는 기둥때문에 대들보에 크게 구멍을 내 놓았네요.
▼ 재질면에서 비슷하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네요.
▼ 예전의 댓돌과 현재의 댓돌로 확실하게 차이가 나 보입니다.
▼ 댓돌에서 바라본 흥양아문의 모습으로 아문에서 조금 걸어와야 할 정도입니다.
▼ 초석과 기둥인데 기둥의 경우 틈이 많이 갈라져 있네요.
▼ 존심당 천정으로 단청이 얼룩달룩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 천정의 경우 격식있는 단청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 존심당중 상방과 협방의 모습으로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 현감이 거주하면서 업무를 집행하였을 것 같은 상방
▼ 도깨비인지 용인지 잘 모르겠지만 용으로 보이네요. 그 용이 몹시 화가 난 표정입니다.
▼ 반대편에서 본 존심당으로 대청마루만 보입니다.
▼ 죽담의 경우 2단으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이 2단이 높이는 작지만 무서운 힘을 발휘합니다. 제판이 있는 법정에서 죄인의 경우 수령을 보기위해서는 목을 높이 들어야 하는데 이 죽담에 서있는 형리들이 얼마나 크게 느껴질까요?
▼ 존심당의 뒷편입니다. 굴뚝도 보이는데 굴뚝의 경우 다시 한번 손을 본 것 같네요.
▼ 뒷 편에 보니까 엄청 복잡하게 되어져 있네요. 이런 경우는 몇 번 나무를 잘나 낸 것인가요?
▼ 협방의 아궁이
▼ 협방에 작은 창문이 있습니다. 보통 협방에는 통인이나 급창 등이 기거하는 것으로 지금으로 비교하면 당번이나 비서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상방과 협방 모두 문을 닫아놓 아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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