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에 합포진성이 있었을까? 진성(鎭城)



마산의 중심지인 창동의 경우 조창의 창(倉)자를 가져와서 창동이라는 지명을 사용중입니다. 창동의 경우 오랫동안 마산의 명동으로 마산의 중심지로 활동해오다가 요즘 들어 도심공동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골목에 있었던 점포들은 하나 둘씩 떠나게 되고 빈 점포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빈 점포를 좀 더 활용하면서 창동 및 오동동에 도심재생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창동예술촌입니다.  최근에 창동예술촌을 만들어 놓았는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반가운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의 경우 2011년 “창동예술촌 바닥 공사하기 전에 합포진성의 흔적이 있을 수 있으니 먼저 발굴조사를 해야한다“라고 주장 했습니다만 그냥 공사가 들어갔고 현재 포장을 해놓았습니다. 합포진성이라는 곳이 있었다는 것을 사실적인 증명이 된다면 이를 토대로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되기 때문에 하자고 했으며 2007년에도 창동상인회에 이야기하였으나 답변이 없더군요. 


정규식 창원도시재생센터연구원에 의하면 합포진성에 관한 문헌조사를 고고학 관련자들이 조사하다가 그만두었다고 하더군요. 왜 그만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헌에 많이 등장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두서없고 부족한 글이지만 창동과 조창 그리고 합포진성에 관한 글을 조사하여 적어보기도 하였습니다. 조금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여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틀린 사항이 있으면 댓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조창은 무엇인가?

조창에 관한 백과사전을 살펴보면 “전근대사회(고려, 조선)에 국가가 징수한 곡물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다시 경창(京倉)으로 운송하기 위해 해안이나 강변에 설치했던 창고”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조창은 고려나 조선에 있어서 없어서는 곤란한 곳이죠. 여러지방에 있는 곡물들이 조정으로 올라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조창은 세곡의 수납·보관·운송의 세 가지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대규모 물류창고 및 세무서, 화물회사인 것입니다. 조창은 고려와 조선에 있었는데요.
고려시대를 보면 13개 조창이 있었습니다. 강원도 1곳(원주 흥원창), 충청도 3곳(충주 덕흥창, 아산 하양창, 서산 영풍창), 전라도 6곳(부안 안흥창, 군산 진성창, 영광 부용창, 나주 해릉창, 영암 장흥창, 순천 해룡창), 경상도 2곳(마산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 있었고 뒤에 황해도의 안란창을 두었습니다.

덕흥창에는 200석 적재량의 평저선이 20척, 흥원창에는 21척,  석두창, 통양창, 하양창, 해룡창, 해릉창, 안흥창에는 적재량이 1천석(石)인 초마선(哨馬船) 6척을 보유하였다고 합니다. 
 
중앙에서 감창사(監倉使)를 파견하여 횡령 등 부정행위를 감독·조사하였다고 하니 조정에서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습니다. 판관 아래에는 조세를 거두고 운송하여 경창에 입고시키는 일을 담당하는 색전(色典)이라는 향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조세 등을 거두고 개경의 창고로  옮기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이들 이외에 곡물을 나르는 짐꾼, 배를 저어서 가는 노꾼 등이 조창에서 근무하였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조창에서는 운반비를 통해서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는데요. 운반비는 곡식량과 출발 지역에 따라 책정하였다고 합니다. 즉 개경까지의 수송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달랐는데, 개경에서 가장 먼 남해안 지역에서 쌀 5석에서 6석의 운반비는 쌀 1석이었다. 전남 서해안 지역에서 옮길 때에는 쌀 8석에서 9석의 운반비가 쌀 1석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개경에 가까울수록 운반비가 싸져서 13석에서 15석, 20석에서 21석의 운반비가 쌀 1석의 운반비가 쌀 1석으로 매겨졌다고 하며 이 정도라도 상당한 금액이었다고 볼 수 있을것입니다. 석두창의 경우 개경에서 가장 먼거리이니 쌀 5석에 운반비는 쌀 1석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정도라면 엄청난 수송비를 받게 되는 셈이였고 이것이 합포에서 소비된다면 상업도시로서의 기능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을에 조창에 수집된 세미는 이듬해 2월부터 한강과 서해를 통하여 개경으로 운송되었는데, 개경에 가까운 조창은 4월까지, 먼 조창은 5월까지 운송을 끝내도록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석두창의 경우 가장 먼 거리이니 5월까지 운송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조창의 경우 왜구들에게는 가장 좋은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공민왕 때 왜구는 거의 대부분 조운선의 약탈과 조창의 약탈로 나타났습니다.

창동의 창은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고 있을까?

창동이라는 지명의 경우 조창의 창(倉)자를 가져와서 사용중인데 이와 비슷한 형식의 지명은 다른 곳에서 사용중인 것은 없을까요? 

창동의 창(倉)자의 경우 고려시대 석두창이 아닌 조선시대 조창의 창자를 가져왔는데 고려시대 석두창이나 조선시대 조창이나 남해안의 곡류 등을 조운선에 이용하여 개경이나 개성으로 가져가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한문도 같은 창(倉)자를 사용합니다. 창고니까 똑 같겠지만 말이죠.

고려시대 13조창 중 덕흥창, 해릉창이 있는데 그곳에서 창동의 지명과 같은 지명을 사용중에 있습니다. 현재 덕흥창이 있었던 곳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인데 마산의 창동과 같은 지명인 창동입니다. 여기서 한문의 경우도 같은 倉洞里입니다. 

또 나주의 해릉창이 있었던 곳의 경우 나주시 이창동에 속하는 곳인데 한문으로 二倉洞입니다. 또 진성창이 있었던 곳의 경우 군산시 성산면 창오리(倉梧里)인데 여기에 창도 창고의 창(倉)이 들어갑니다. 

순천 해룡창은 현재 순천시 해룡면 해창리(海倉里)로 창(倉)도 조창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줍니다. 충청도 서산에 있었던 영풍창의 경우 현재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로 창개(倉浦)마을입니다. 

부용창이 있었던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성리 성촌마을의 경우 예전에는 창촌이었다고 하며 창은 바로 조창을 의미하는 창(倉)인 것입니다. 서울 양천구에 있는 창동의 경우도 한문으로 倉洞里였다가 창동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곡창고가 있어서 창동이라는 동명을 사용 중에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 거리가 멀어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당시 조창이 있었던 곳의 경우 창(倉)를 사용중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창에 성곽은 가지고 있었을까?

이왕기, 이정수, 임초롱의 공저 논문인 “조선시대 아산 공세곶창성의 배치 특성에 관한 연구”를 보면 창성이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성에 관한 글을 살펴보면 “창성(倉城은) 성곽의 기능에 따른 분류이며 창고를 보호하기 위한 성 혹은 창고의 역활을 하는 성을 뜻한다. 말하자면 창성은 조세 창고를 보호할 목적으로 이에 필요한 관설 건물과 일부 주거 및 망루, 성문 등이 설치된다. 대부분 창성은 하운이나 해운의 기능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성벽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에 반해 읍성은 주민의 거주를 보호하고 외적으로 부터 관아 방어를 목적으로 성을 쌓아 만드는데 읍성 내에는 주거 외에 각종 관아시설과 문루가 만들어진다. 성의 위치에서 읍성과 창성의 근본적인 차이는 읍성은 대부분 해안이나 하천과는 떨어진 내류기역의 평지나 산지에 있는 반면 창성은 해안이나 하안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성벽의 기능과 구조는 조금 다를 수 있으나 성벽 쌓는 기법은 읍성이나 창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창성으로는 아산의 공세곷창성, 익산 덕성포창성(익산시 웅포면 고창리 고창마을), 영광 법성포창성, 강음의 조읍포창성, 사천 통양창이 있었던 선진리성이 있으며, 고려시대 진성창이 있던 군산시 성산면 일대에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다.”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를 미루어 봐도 조창 주변에 토성을 쌓거나 조창에 직접 성곽을 축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곳의 조창은 창성을 축성 했을까?

일본의 왜구들은 서, 남해안의 고을을 중심으로 약탈을 하거나 사람을 잡아가 노동력을 약탈했습니다. 왜구들은 식량을 모으는 조창을 중점으로 약탈을 해왔는데 조창에서 나오는 식량과 재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왜구의 침입이 있자 조창이 있는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방어를 위해 성곽을 축성하는 것이 당연했는지 모릅니다. 

군산 진성창

군산 진성창의 한문을 보면 鎭城倉인데 진압할 진(鎭)과 재 성(城)의 한문을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 여기에 성(城)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성창에는 조창을 보호할 목적으로 토성을 쌓았는데 입구부터 토성으로 축성되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토성의 명칭이 창안토성인데 고려말 왜구들이 진성창까지 와서 약탈을 부리자 조정에서 왜구의 약탈을 막고자 최무선 장군을 동원하여 화포로 최초 사용하여 왜구를 막아낸 곳도 바로 진성창이 있는 곳입니다. 창안토성의 경우 판축식으로 축성되어져 있으며 성곽의 둘레가 10여리가 된다고 합니다.



사천 통양창

사천 통양창은 고려시대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토성을 축성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토성보다 작게 석성을 축성한 것이 사천 선진리왜성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삼천포에 있었던 삼천포진이 수군진성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선진리가 있는 통양창은 고려시대에부터 조운선을 이용하여 개성까지 세곡을 날랐습니다. 개성에서 통양창이 있는 곳까지 거리가 삼천리라고 해서 삼천포라는 지명을 사용했다고 하니까 삼천포의 지명은 생각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남발전연구원에서 이 토성을 발굴하고 한,중,일 국제대회에서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천통양창의 포구로 추정하는 곳

부안 안흥창

안흥창은 현재 전북 부안군 진서(鎭西)면 진서리이고 예전 진이 있었던 곳은 구진리(舊鎭里)가 안흥창이 있었던 곳입니다. 현재 곰소항이며 조선시대 검모포진이 있었습니다. 진서(鎭西), 구진리(舊鎭里)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수군진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1872년 지방지나 기타 고지도에도 표시되어져 있습니다. 검모포진에는 건조됐다 전선 1척, 방선1척, 병선1척, 사후선 1척 총 5척이 보유하고 있었으며 고려시대 1274년 여몽연합군의 전선 900척을 4개월 이내에 대선 300척, 중선 300척, 보급선 300척이 건조했습니다. 이 건조한 곳이 바로 검모포진이 있었던 안흥창에서 건조하였습니다.

서산 영풍창

영풍창의 경우 현 충남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로 팔봉면 이전에는 팔봉창면이었고 그 이전에는 영풍창면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창은 조창의 창(倉)을 의미합니다. 영풍창(永豊倉)은 난파사고 다발 지점인 안흥량(安興梁)을 피해 그 북쪽에 설치하였는데 여기에 토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폭 3m, 높이 1.5m 규모의 토축이 토성 모양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영암 장흥창

장흥창은 현재의 전남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또는 해남군 마산면 송석리 둔주포 부근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죽성포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며 죽성포에 토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해남의 마산면의 경우 현 창원시 마산의 馬山과 한문도 똑 같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그내용도 아래 신문기사 참고하세요. 경상도와 전라도의 마산의 경우 원님이 있었다! 재미있네요.


영광 부용창

부용창의 경우 현재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성리 성촌 마을로 백제시대 때부터 있었던 성촌토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촌토성이 있는 용성리엔 당시 관아(官衙)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고 합니다. 그 옛날 법성의 원님이 이곳에 살면서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다고 하는데 영광현 원님이 아닌 법성포진과 같은 수군진의 원님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영광굴비를 대표하는 법성포에 법성포진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법성진성의 경우 1514년(중종 9)에 건립한 석성인데 용성리 성촌마을과는 직선거리로 4km가 되지 않습니다.


이 밖에 해릉창, 해룡창, 하양창의 경우 강 건너이거나 아주 가까운 곳에 토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평택 하양창

하양창의 경우 현재  평택군 팽성읍 본정리로 안성천과 둔포천이 만나 삼합류로 되는 지역입니다. 


나주 해릉창

해릉창의 경우 나주시 이창동으로 해릉창이 있었던 곳에서 강건너편에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회진토성이 있는데 백제시대때 축성한 토성입니다. 토성의 규모는 동~서 직선거리가 약 750m, 남~북 직선거리는 약 800m, 전체 둘레는 약 2.4km로서 약간 긴 타원형에 가까운 반원형의 토성입니다.


순천 해룡창

해룡창은 순천시 해룡면 해창리로 순천만입구와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해룡창으로 오고가기 위해서는 현재 순천만의 수로를 따라서 가야 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해릉창, 해룡창, 하양창, 부용창, 장흥창, 영풍창, 안흥창, 통양창, 진성창의 경우 바다를 따라 움직이는 배를 중심으로 하는 해로 조창이고 흥원창과 덕흥창의 경우 남한강을 따라 움직이는 수로 조창입니다. 수로를 따라 움직이는 조창에는 토성과 관련된 것이 없습니다. 토성이 없지만 조창이 있었다고 하는 흥원창을 복원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보입니다.



고려시대 조창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조창이 있었던 아산 공세곶고지의 경우 공진창성이 들어서 있는데 석성으로 만들어졌으며 조창을 담당한 향리를 위한 선정비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창성 중 가장 잘 남아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인 석두창이 있었던 마산의 경우 일본과 지리적 특성상 가장 가까운 곳으로 왜구의 침략이 가장 많았던 곳입니다. 이런 곳에 다른 조창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때 토성을 축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왜구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합포에 그것도 조창이 있는 합포에 성곽이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석두창은 어디에 있었을까?

다만 석두창이 있었던 곳이 어디인가가 문제인데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곳이 틀립니다. 용마산 인근이라고도 하고 마산운동장부근, 창동 일 것이라고도 합니다. 마산도시변천사 연구학자인 허정도박사의 경우 창동일대가 석두창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필자의 경우도 허정도박사가 주장하는 창동일대가 석두창이라는 것에 찬성합니다. 

다만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조금  다른데  첫 번째는 조창은 왜구들의 목표였으며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합포에 있는 조창인 석두창의 경우 가장 먼저 노리는 목표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 고려시대 조창의 경우 조창을 보호하기위해 수군이나 토성을 축성한 것처럼 산호동이나 마산운동장과 같이 회원현성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석두창을 만들어 놓았을 가망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방어를 위해 아군의 지원병력이 이동이 쉽다는 것이고 회원현성에서 보면 마산만으로 입출입하는 배를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확인을 하고 가까운 곳에 적이 침략하고 있으니 방어하라고 알려주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고 이로 인해 회원현성과 가까울 곳에 설치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래에 왜구가 합포를 침략한 침략사를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두 번째는 조창을 중심으로 성곽을 쌓아놓았을 가망성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고려시대 조창의 경우 대부분 토성을 축성했고 합포에 있었던 석두창도 토성이나 석성을 축성할 가망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일본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고 가장 많이 침략하는 합포에 성을 축성한다면 토성보다는 석성이 방어에 유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정이지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성곽을 축성했는지? 했다면 토성인지? 석성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산도시변천사 연구학자인 허정도 박사의 경우 “사천 선진리에 있었던 통양창의 예로 추정한다면, 석두창에도 창(倉)을 관리하기 위한 토성이 있었을 수 있으며, 창(倉)을 중심으로 판관과 향리 그리고 조창민이 거주하면서 선박 관리 등 조운 업무에 임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로 인해 사람들의 왕래도 잦았을 것이니 자연히 석두창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고 교통망도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조창의 경우 수운을 이용하는 조창을 제외하고는 조창을 보호할 목적으로 토성을 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석두창의 경우도 토성이나 석성이 있을 확률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왜구의 침략이 많은 합포에 있는 조창이 성곽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창동을 중심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명입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동서동의 경우 이전 동성동과 남성동이 합쳐졌고 또 동성동과 서성동, 부림동이 합쳐지면서 지명중 앞 글자를 사용하여 동서동으로 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지명 말고 중성동과 성호동도 있습니다. 이를 보아도 모두 성(城)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심지어 부림동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부림동의 경우 창동에서 서성동위에 있으며 합포진성이 있었다면 서문 외각에 있는 위치입니다. 부림동은 숲이 많은 거리 즉 숲거리 또는 쑥거리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진동에 있는 진해읍성의 경우 풍수지리에 의해 진해읍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양옆으로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어 놓았으며 이를 동림과 서림이라 불렀다고 하며 지금 겨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진해읍성 말고 남원읍성과 광양읍성, 상주읍성 등에도 나무를 심어 비보림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숲은 풍수지리에 따라 음과 양의 기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비보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부림동에 있었던 숲의 경우도 합포진성의 부족한 내백호를 보충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동성동, 서성동, 남성동, 중성동, 부림동, 성호동이란 지명은 분명하게 성(城)과 관계가 있으며 대구에도 성내동,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를 사용중인데 바로 대구읍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경북 상주에는 동문동, 서성동, 북문동, 서문동, 남성동을 사용중이며 이는 상주읍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진주시의 본성동, 동성동, 남성동이라는 동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또한 진주읍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동이 아닌 리(里)의 지명을 사용하는 곳을 살펴보면 포항시 흥해읍 남성리,중성리를 비롯하여 옥성리, 학성리, 약성리 등을 사용중인데 이 또한 흥해읍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포항시 남구 대송면에는 동문리, 남문리의 지명을 사용중인데 바로 영일읍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강진군 강진읍에는 동성리, 서성리, 남성리를 사용중인데 이 또한 강진읍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소개한 시군의 지명 말고 많은 곳에서 지명을 사용중에 있습니다. 

이 지명들은 모두 성(城)과 관계가 있다는 것만 보아도 창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명의 경우 성(城)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조선시대 조창이 창동에 들어온 것이 영조 36년(1760년)인데 이때 성곽을 축성하였다면 기록에 남아있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부터 남성리,중성리,서성리,동성리,부림리라는 지명은 사용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조선시대 조창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석두창에 조창이 자연스럽게 앉은 것은 아닐까 추정합니다.   

이외 보충하는 자료를 소개하자면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가 주장한 내용 중 하나가 고려시대 조창의 경우 “만(灣)의 입구보다는 내륙으로 들어간 해안이나 만의 깊숙한 지점에 위치, 수운 이용이나 하천을 따라 형성된 소로의 이용”을 주장하셨는데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려시대 조창의 경우 많은 조창들이 해로를 이용하여 들어와서 다시 수로가 있는 곳에 조창이 설치되어져 있습니다. 해릉창, 해룡창, 부용창, 장흥창, 진성창, 안흥창, 영풍창이 그렇기 때문에 충분한 근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천에 있는 통양창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통양창의 경우 사천만 입구에서 통양창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10km이고 바닷가에 바로 조창이 설치 되었된 것입니다. 석두창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창동을 기준으로 진해만 입구까지 직선거리로 측정하면 대략 16km가 나옵니다. 통양창보다 더 먼거리에 있습니다. 

고려시대 조창에 있는 곡식을 실고 다니는 배가 바로 조운선입니다. 이 조운선을 문화재청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복원하였습니다. 물론 조선시대 조운선입니다만 고려시대 조운선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조운선의 경우 1797년경으로 추정되는『각선도본(各船圖本)』에 실린 도면과 다양한 고문헌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길이 79.2척(24m)에 너비 24.75척(7.5m), 높이 10.89척(3.3m)  돛(帆) 2개와 키(舵), 호롱(揚錨機)이며 돛은 13m이고 돛대는 18m이고 쌀 1,000가마니를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조운선의 속도는 어느 정도였을까? 조운선의 속도에 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당시 조운선을 개조하여 만든 맹선으로는 왜구의 배를 따라 잡을 수 없어서 만든 배가 판옥선입니다. 이 판옥선의 속력의 경우 1시간에 5~6km간다고 하니 조운선의 경우 그보다 속력이 느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운선을 토대로 만들어다고 하는 맹선
이 기준으로 본다면 조운선을 이용하여 진해만 입구에서 조창이 있는 창동까지 온다고 했을 경우 4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적게 소요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나주에 있는 해릉창의 경우 목포에서 해릉창까지 65km가 되어서 조운선을 이용할 경우 무려 16시간이 소요됩니다. 석두창의 경우 해룡창과 같이 해안입구에서 조창까지 걸리는 시간에 비하면 가까운 거리이지만 고려의 개경에서 본다면 석두창이 가장 먼 거리라 마산만 어디에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곳의 조창의 경우 강을 따라서 한참 진행되는 것에 비해 합포의 경우 바다를 끼고 운행한다는 것 이외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참고로 다른 조창들을 살펴보면 부용창의 경우 서해에서 부용창까지 15km, 순천의 해룡창의 경우 순천만에서 해룡창까지 7km, 해남 장흥창은 목포에서 장흥창까지 30km, 서산 영풍창은 서해에서 영풍창까지 23km, 안흥창은 곰소만입구에서 안흥창까지 15km, 하양창은 아산만입구에서 계산하면 무려 45km가 나오고 남양방조제에서 측정해도 25km가 나옵니다. 군산의 진성창의 경우를 보면 금강입구에서 진포대첩기념비까지는 9km정도이고 진성창이 있었던 곳까지는 20km 정도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진성창의 경우 매립이 많이 진행되어서 정확한 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대략적인 거리임을 알려드립니다.

왜구는 합포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왜구의 합포침략사

왜구의 합포침략사에 관한 책이 나올 정도로 왜구들은 합포를 집중 공격했습니다. 1372년 왜구의 침략은 더욱 극성을 부림으로 인해 수로를 이용하는 조운은 폐지하고 육로를 이용하는 육운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1374년 4월 23일 왜구 전선 350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합포로 침략하였고 경상도 도순문사 김굉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합포진입을 저지하지 못하고 패하게 됩니다. 합포를 점령한 왜구는 영책과 병선소각(40척) 고려군민 무차별 살육 고려군 병사 사망자만 5,000명에 달할 정도로 대패하게 되었습니다. 고려군은 경상도 해안 지역 왜구에 침략에 대적할 능력 상실하게 됩니다.

이후 1374년 고려군은 육전중심에서 수전중심의 대적전술로 전환하게 됩니다. 1376년 왜구가 다시 침략하여 합포영을 소각하고 의창, 회원, 함안, 진해, 고성 등으로 침략하여 백성들을 살육하고 약탈을 감행했습니다. 

1379년 4월, 왜구가 합포를 공격 이곳을 수비하던 원수 우인열 군은 왜구 4명을 참살한 반면에, 고려군측에서는 사상자가 무려 80여 명이나 나왔으며, 지휘관인 우인열도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379년 정월에는 간관(諫官)의 건의에 따라 일도일원수체제(一道一元帥體制)를 하게되었는데 이는 왜구 출몰지역에 원수를 상주시키는 제도를 시행하여 왜구를 격퇴하고자 하였습니다. 

1383년 5월, 왜구는 120척에 달하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남해현 지역에 침구 이 지역의 방어 합포원수 유만수가 나서서 방어를 하러갑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합포의 경우 왜구들의 침략이 일반화 되었으며 왜구의 침입을 가장 많이 받았고 그 피해도 가장 큰 지방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고려조정에서는 합포에 원수를 두었고 합포영을 운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합포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고려가 경상도일대를 방어하기 위한 합포영을 설치하였으며 합포영의 경우 현재 합성동에 있는 합포성지입니다. 합포영의 경우 육군과 같은 군 부대이고 합포등처진변만호부라는 직책이었습니다.  

충렬왕 7년(1281년) 원나라의 제1차 일본원정이 실패한 후, 남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경상도 지역에 설치하였던 김주등처진변만호부(金州等處鎭邊萬戶府)를 충렬왕 19년(1293년)에 개칭하여 합포등처진변만호부를 설치하였다는 것입니다.

만호부의 경우 지방에서는 전라만호부, 서경만호부, 탐라만호부 등 수개만 있었는데 그중 남해안의 경우 합포만호부라는 것만 보아도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하는 고려조정의 노력을 알 수 있으며 합포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경상도에서 곡식을 모아서 보관하는 조창이 있었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형 때문에 왜구들이 끊임없이 침략을 합니다.
 
이후 합포등처진변만호부의 경우 조선의 개국과 함께 창원읍성으로 경상우병영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창원읍성과 경상우병영성으로 사용하는 경상우병영성(현 합포성지)에 수군이 사용하는 진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까요? 창원부를 다스리는 기능과 경상우병영성의 기능에 수군의 기능을 합친 성곽을 유지했을까요? 육군과 수군이 함께 근무하는 종합 군사도시로서의 역할을 한 곳에서 했을까요? 과연 그럴까요? 

필자가 볼 때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고 수군은 원래 석두창이 있었던 곳에 주둔하고 방어를 한 것은 아닐까 추정합니다.  

합포진성은 존재했을까?

현재 정확히는 존재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부분에 관하여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박희윤 "개항이전 마산시 도시형성 및 변화과정에 관한 고찰"의 논문에 합포진성에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동성동, 중성동, 남성동, 서성동, 성호, 북성로 등의 명칭이 성(城)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구읍성에서 사용하는 동성로, 북성로, 남성로, 서성로 등과 같은 방식이고 전국에 있는 여러 읍성이나 읍성지 등에서 사용하는 동명칭이나 도로명칭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위에 자세히 적어 놓았던 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만 보아서는 창동을 중심으로 성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경남대학교 유장근 교수가 “창동에 유정당을 복원하면 어떨까?”라는 글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조창이 들어서면서 조창을 중심으로 도시의 길이나 항구, 관가, 상가, 주택가 등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 나간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은 조량을 관할하는 관청과 그것을 배에 실어 나를 수 있는 항구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조선시대 조창뿐 아니라 고려시대 조창인 석두창이 들어섰다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자연스럽게 마을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좁고 작은 합포진성말고 진성 외부에 마을을 형성할 가망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낙안읍성을 가보아도 성안에 있는 마을도 있지만 외부에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산도시변천사 연구학자인 허정도 박사가 복원한 1900년대 마산 지도를 보면 동굴강과 서굴강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조창에서 나온 곡물 등을 조운선을 이용하여 한양까지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동의 명칭으로 골목으로 남아있는 것이 도시의 역사인데 동성동, 중성동, 서성동, 남성동이라는 명칭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석두창에서 사용한 토성이나 석성을 이용하여 합포진성으로 사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합포진성은 언제 사라졌을까? 

합포진성이 있었다면 언제 사라져 버렸을까요? 조사도 되지 않은 합포진성이 언제 사라져 버린 것에 관하여는 너무나 성급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합포진성이 왜 없어졌는지에 관하여는 꼭 알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합포진성과 마산왜성에 사용한 돌의 이야기는 추정입니다. 

세종 19년(1437년) 합포(합포진성으로 추정)에 있었던 수군첨절제사 진영이 웅천 제포로 옮겨가면서 폐영이 됩니다. 이 폐영이 되니까 관리에 소월하게 됩니다. (거제에 있는 사등성의 경우 조선건국과 함께 거제읍성으로 사용되었다가 현 저제시 고현읍에 있는 고현성으로 읍성이 이동하면서 폐성이 되게 됩니다.)
그러던중 임진전쟁이 일어나고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장 다데(伊達政宗)가 김해읍성을 함락한 뒤 창원을 거쳐 마산으로 쳐들어와 용마산을 군사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축성공사를 시작하였으며, 그 뒤 1597년 10월 정유재란 때 왜장 나베시마(鍋島直茂)와 그의 아들이 본격적인 축성공사에 착수하여 1597년 12월에 완공하였다라고 하는 것이 마산왜성에 관한 백과사전의 글입니다. 
일본군들이 용마산에 마산왜성을 축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돌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일본군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축성한 왜성들을 보면 하나같이 조선군들의 읍성, 병영성, 진성, 토성 등이 있었던 곳에 축성하면서 그곳의 돌을 가져와서 축성하였습니다. 

조선의 읍성 성돌을 이용하여 축성한 왜성을 보면 동래왜성, 울산왜성, 고성왜성, 남해왜성, 웅천읍성, 양산왜성이며 수군진성의 성돌을 이용하여 축성한 왜성을 보면 부산왜성, 자성대왜성, 기장왜성, 서생포왜성, 웅천왜성, 안골왜성, 영등포왜성, 장문포왜성, 눌차왜성입니다. 토성위에 왜성을 축성한 곳을 보면 사천 선진리왜성, 구포왜성, 김해왜성입니다. 


이런식으로 조선의 수군 진성과 읍성의 돌을 가져와서 왜성을 축성하였다면 마산 용마산에 있는 마산왜성의 경우도 왜성에 사용할 돌이 필요한데 어디서 가져왔을까요? 

합포진성이라고 추정하는 창동과 마산왜성과 직선거리로 1.1km로 우리나라에 일본군이 축성한 왜성중 수군진성과 가장 가까운 거리입니다. 울산왜성의 경우 울산읍성과 1.7km, 웅천왜성의 경우 웅천읍성과 3km 제포진성과 1.6km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안골포왜성의 경우 안골포진성 위에 축성, 고성왜성은 고성읍성 옆에 축성하는 방식을 제외하면 합포진성과 마산왜성과는 거리가 가까운 편에 속합니다. 

위에 글은 모두 사실이고 아래에 나오는 글은 추정입니다.

원래 있었던 합포진성의 돌을 마산왜성 축성을 위해 돌을 가져간 후 형태만 남았다가 이후 민가들이 들어서고 하면서 지금과 같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 론

이상과 같이 두서없이 석두창과 합포진성에 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필자의 무지로 인해 여러가지 풀리지 않는 숙제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부분은 필자 말고 다른분들이 풀어주리라 생각합니다. 

위의 내용들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고려시대 조창을 보면 조창에 토성 등을 이용하여 방어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조창인 석두창의 경우 왜구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토성이나 석성으로 성곽을 축성하였을 것으로 생각이 들고 조선후기까지 지명이 중성리, 서성리, 남성리, 동성리, 성호리로 남았을 것 같습니다. 

합포진성에 왜구들을 막기 위해 수군이 배치되었으며 수군첨절제사가 배속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웅천에 삼포가 개항하면서 일본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제포로 수군진이 옮겨가면서 폐영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전쟁이 발발하고 당시 일본군들이 합포진성에 있는 돌을 가져가서 마산왜성을 축성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임진전쟁을 겪으면서 합포의 경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떠나갔지만 조선시대 조창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더욱 번성했을 것입니다.

필자가 추정하는 이부분이 맞다면 창동에 합포진성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창동에 수군진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석두창에 토성이나 석성이 있었는지는 아주 중요할 것입니다. 

만약 수군진성이 있다면 문헌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직접적인 조명을 해야 할 것이며 이를 토대로 또 다른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며 다른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위해 창원시에서는 본격적인 자료조사와 연구조사 등이 이루어졌으면 하고 이를 토대로 창동의 문화가 살아나서 더욱 활기찬 도심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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