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의 만행을 보여주는 동래읍성 임진왜란 전시관 읍성(邑城)



올해로 임진왜란(이제는 임진전쟁으로 사용하기로 발표하였죠) 7주갑이라고 하네요. 1주갑은 60년이니 벌써 420년이 지났네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벌써 420년이 지났으니 강산이 벌써 42번이나 변한 수많은 세월입니다. 이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군의 만행은 역사를 통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2005년 수안역공사를 진행하다가 석축을 발견하고 경남문화재연구원 주관으로 2005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에 착수했으며 2007년 4월부터 2차 발굴조사가 이뤄지면서 일본군의 만행이 만천하에 들어 났던 것입니다. 그 발굴현장을 토대로 부산시 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박물관이 지난 2011년 1월에 개관하였습니다. 

그 참혹했던 임진왜란 현장을 후세에 전해주기위해 개관된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필자는 일단 수안역 8번 출구로 들어갔습니다.  
수안역 8번 입,출구에는 조선시대 동래읍성에 관련된 사진들이 전시되어져 있는데 예전 사진을 전사로 하여 부착하여 놓았습니다.아래 사진의 경우 동래읍성 남문앞에 있었던 세병문의 모습으로 상당히 여유로와 보입니다.   
동래읍성을 상징하기 위해 홍예식으로 된 성문을 표현하여 놓았습니다. 
홍예문의 경우 튼튼한 육축으로 축성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수안역 광장에는 동래읍성 출토유물들을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아마 복제본이겠죠. ^^
동래읍성 해자에서 발굴된 찰갑의 복제본으로 이 찰갑의 출현으로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게 되었죠. 
실제 발굴당시에 발견된 찰갑의 사진으로 당시 발굴된 찰갑의 경우 우리나라 역사상 발굴조사에 의해 출토된 최초의 철갑입니다.

또 함께 발굴된 활과 화살촉, 화살통을 복제한 것을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화살통은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져 있습니다. 화살의 경우 
함께 출토된 투구를 복원한 복제품을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당시 사용하였던 숟가락과 황동그릇으로 임진전쟁 당시 조상들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많은 분들에게 간단하게 보기 위해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6.8번 출입구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출입문이 있는 곳은 홍예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수안역 광장을 걷다보면 대리석으로 표시한 것이 있는데 바로 해자가 발견된 지역임을 표시한 대리석입니다.
사진에 봐서 좌측방향이 발굴 당시의 해자지역이고 지하라 높이의 경우는 조금 비슷할 것 같습니다.
입구에는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이라는 간판이 있습니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전시관 입구 모습
성문을 표현하기 위해 큰 나무로 된 성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이 조선전기 동래읍성 모형입니다. 조선전기 동래읍성 모형을 통해 당시 벌어졌던 전투에 관해서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동래읍성 모형을 잘 알기 위해 버튼을 만들어 놓았으며 이 버튼을 누르면 각 건물주위에 세워진 푯말이 빛이 납니다. 
조선전기 동래읍성의 경우 동시대에 축성한 해안읍성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축성되어져 있으며 동북방향을 제외하면 평지성입니다. 또 원형으로 된 읍성임을 알 수 있으며 원형으로 된 읍성의 경우 생각보다 많지가 않습니다. 조선전기 동래읍성, 해남읍성, 함양읍성 등이고 보통 평지읍성입니다.   
임진전쟁이 끝난 후 축성한 조선후기 동래읍성의 모습으로 조선전기 동래읍성과 비교한다면 크기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지도에서 살펴본 조선전기 동래읍성(고동색)과 조선후기 동래읍성(빨강색)의 모습
不戰則假我道(부전즉가아도):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는 왜구들의 이야기가 한쪽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송승헌 부사가 일본군에게 글자를 적어서 던진 내용을 적어 놓았습니다.  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뜻을 적어 놓았습니다. 
임진전쟁 당시 실질적인 전투가 벌어진 곳은 남문입니다. 그런데 남문옹성과 치성에도 포루가 설치되어져 있는데 저게 사실일까요? 필자가 볼때에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아시는 분은 댓글 남겨주세요. 
동문의 경우 옹성과 함께 자연스럽게 성문이 들어가버려 적을 막기에는 남문보다 좋아 보입니다. 
실제로 일본군들이 동래읍성을 침공할때 사용하였던 동측 동래읍성 체성의 모습 
전시장에는 기와를 얹어 놓아 친근함을 주면서 위압감을 줍니다. 
들어가자 좌측에 있는 영상감상실의 모습으로 임진전쟁과 동래읍성에 관련된 동영상이 나왔는데 TV역사스폐셜 등에서 나온 다큐멘터리였습니다.  
다큐멘터리의 경우 어느정도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않아서 볼 수 있게 꾸며져 있습니다.  
한쪽면에는 동래부순절도가 놓여져있습니다. 비록 진품은 아니지만 1대 1크기로 된 그림이 놓여져 있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출토된 환도의 복제본들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다양하게 출토된 화살촉의 모습

출토된 환도와 복원한 환도
활과 깍지
활과 화살통 그리고 화살을 전시해 놓았는데 수안역 광장에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입니다.  
화살의 경우 다양한 화살촉이 발굴되었으며 용도가 다른 화살이 전시되어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투시 사용되는 장전에 소리가 나는 효시는 색다르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저런식으로 된 화살통의 경우 화살이 몇발 보관할 수 있을까요? 

당시 조선과 왜군의 무기를 비교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조선군의 창을 발굴하고 복원한 창
쇠손칼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발굴조사된 찰갑과 같은 찰갑으로 복제품을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발굴조사된 투구를 복원한 것과 새롭게 만든 투구
저런 투구를 쓰고 동래읍성 전투에서 전사한 이는 누구일까요?
발굴된 갑옷과 투구를 전시하였습니다. 
환도도 복원하여 놓았습니다. 

나무삽과 낫으로 그 시대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순가락과 그릇으로처 청동그릇으로 일본군들이 쳐들어 오기전 최후의 만찬을 즐겼을까요? 가족들과 오손도손 모여서 식사하던 순간도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2005년부터 발굴조사된 동래읍성 해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길이는 좀 작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해자에서 어린아이부터 40대에 걸쳐 100여구의 인골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들은 칼에 베이고, 조총과 둔기에 두개골이 뚫리고 함몰된 상태로 살해된 것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왜군 조총에 살해된 5세 남짓한 유아의 인골과 머리를 두 번이나 무참하게 베인 흔적이 있는 20대 여인의 인골도 발굴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서민 위주로 학살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저항하기 힘든 아녀자와 아이들을 살해하고 자신들에게 짐이 되니까 해자에 버려버렸습니다.  이렇게 나라에 힘이 없어면 가장 희생되는 사람들이 아녀자와 아이들입니다.  
해자의 높이는 대략 3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재현하였으며 당시 해자에 사용한 그 모습 그대로 재현하였습니다. 

발굴 당시에 있었던 그모습 그대로 재현하였는데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 일본군의 칼에 의해 두개골이 절단 된 것 처참한 현장 그대로 전시되어져 있어 임진전쟁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러개 나무가 흩어져 있는데 이는 해자안에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촘촘히 박아두는 목익으로 읍성의 방어 수단중 하나였습니다. 웅천읍성, 거제읍성(고현성), 언양읍성, 동래읍성 등에서 발굴이 되었습니다. 일본군들은 이런 해자에 짚이나 대나무로 해자를 메꾸어 그위로 지나가는 것인데 지금으로 치면 교량전차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봐야할 것입니다.  
화차와 장군전 무기체험 게임이 있는데 어린아이들에게 흥미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람을 생각하고 발사해야하기 때문에 생각했던 것 보다 잘 맞추기가 힘이듭니다. 
2개가 설치되어져 있어서 기다리는 순간을 줄여줍니다. 
모든 것은 빔프로젝트에서 쏘아주는데 위에 세로로 숨겨져 있습니다. 
신기전과 장군전을 이용한 게임인데 동래읍성 전투시의 병사와 같은 체험과 긴박감을 주기위해서는 끊없이 몰려오는 왜군을 막는 장면의 게임이 더 좋은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옆에는 화차와 대장군전 등에 관한 설명이 있는데 이런 무기들이 동래읍성 전투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게임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무기에 관한 설명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왜 저런 무기도 있는데 함락되어서요?"라고 질문을 하면 "저건 원래 없었고 게임을 위해서 그냥 넣어둔거야?" 라고 이야기하기도 뭐하고... ㅠㅠ
좌우측에 표시된 부분이 해자안의 모습으로 사진속에는 해자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예전 동래읍성 해자의 모습의 경우 수안역지하철까지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지하철 표를 구입하고 들어가면 만나는 것이 바로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놓았습니다.
각 출입구마다 동래의 예전 사진을 출력하여 부착하여 놓았습니다. 
동래장날의 모습
식파루를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식파루 뒤에 보이는 내삼문의 모습과 내삼문을 지나서 만나는 객사의 모습도 보입니다. 식파루의 장초석의 경우 정말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비교한다면 2미터 정도의 높이와 지름이 1미터가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남문앞 세병교의 모습
세병문과 주조문을 지난 상태에서 남문인 주조문을 바라본 상태인데 주조문에는 무우문이라는 현판이 달려져 있습니다. 주조문의 경우 홍예로 된 성문이고 세병문의 경우 평거식으로 된 성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조문에는 벽돌로 된 여장이 되어져 있으며 주조문에 사용된 성벽의 경우는 장방향의 돌로 되어져 있는 것을 봐서 임진왜란 이후 복원(1731년(영조7년))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병사들의 모습은 신식군인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병사들의 키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주조문을 거쳐 쭉 올라가면 나오는 것이 객사이며 동래시장입니다. 주조문을 지나자 마자 나오는 것이 바로 내주축성비인데 사진에 좌측에 있는 사주문으로 보이는 문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내주축성비입니다.  
아래에 등장하는 사진의 경우 동래읍성 남문의 모습입니다. 동래읍성 남문의 경우 2중으로 된 성문이었는데 이렇게 2중으로 된 성문을 가지고 있는 읍성의 경우 찾기가 힘이 들 정도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수원에 있는 화성입니다. 수원 화성의 경우 원형의 옹성에 성문을 한개 더 내어서 하였고 동래읍성의 경우 원형이 아닌 사각형의 옹성에 성문을 하나 더 만든 것이 수원 화성과 틀립니다. 보이는 성문은 2중으로 된 익성의 성문중 처음 만나는 누각과 성문으로 성문의 명칭은 세병문입니다. 누각과 여장, 그리고 성벽은 군데 군데 무너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문의 경우 홍예로 된 성문이며 성벽에는 석조형 누혈이 4개가 보이고있습니다. 남문 바깥에서 볼때 성문의 경우 홍예로 되어져 있지만 성안에서 보면 평거식으로 되어져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성벽에 사용된 돌의 경우 틈에 면도칼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틈이 보이지 않는 식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성문 위 여장에 두개의 판문이 보이는 것이 조금 다른 곳과 틀린 느낌을 줍니다. 이제 성문안으로 들어갑니다.  
객사의 외삼문 역활을 하는 식파루의 모습으로 장초석이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식파루의 경우 나주객사 금성관의  아문이며 외삼문인 망화루와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복원된 망화루보다 웅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중익성으로 된 동래읍성 남문의 모습으로 왼쪽에 있는 누각은 1층이고 오른쪽에 있는 누각의 경우 2층으로 된 누각입니다. 1층의 누각의 문 즉 앞쪽 문은 세병문(洗兵門)이고 뒤쪽 문은 주조문(朱鳥門)이라 했다고 합니다. 주조문엔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의 무우루(無憂樓)를 현판으로 달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략을 당한 상태라 보니 더욱 더 성문을 튼튼히 하기 위해 성문을 2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기를 씻는다는 세병(洗兵)의 의미를 담은 세병문인데 남문 앞에 있는 다리가 세병문입니다. 세병문의 세병(洗兵)의 경우 통영에 있는 통제영의 본영 건물이 세병관인데 이름과 뜻이 똑 같습니다.     
동래장의 모습으로 좌측에 있는 누각이 바로 정원루의 모습으로 밀양의 영남무, 진주 촉석루, 함양 학사루, 남원 광한루 등에 있는 누각과 같은 기능을 하는 누각입니다. 
왜군에 의해 무너진 동래읍성은 임진전쟁이 끝난 후 2중으로 된 옹성과 성문을 달았어 사용했습니다. 그후 일제강점기 전에 일본에 의해 또 다시 무너져 내려 동래읍성 동헌의 정문인 독진대아문의 경우 원래 있어야할 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 가 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힘이 없어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동래읍성의 해자인 것 같습니다. 시간나시면 한번 찾아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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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무갑 2012/08/08 19:43 #

    저 찰갑 유물에 대한 복원보고서의 경우, 온전하게 전해지는 비슷한 형태의 9~19세기 티벳이나 몽골지역 찰갑유물들과의 비교는 쏙 빼놓고 뜬금없이 한나라~남북조 시기의 양당개 이야기만 나와서황당했습니다.
    양당개랑 비슷한 면이 한가지(견갑부분이 분리됨) 있다고는 하나 사실 발굴당시 모습만 봐서는 양당식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들어 X선 촬영시 신갑부분의 측면 형태가 옆구리 부분이 트여있지 않고 통으로 이어진 형태였다던가(양당식은 앞뒤로 나뉩니다.)하는 부분들은 정말 보고서를 보고도 왜 이게 양당개가 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보고서 관련된 분들 중 삼국시대 찰갑을 주로 연구하신 장경숙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해도 너무 황당할 정도로 양당개로만 몰아가는 보고서 내용이 정말 황당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너무 서두르다 놓친 부분이 많아 안타까운 보고서였습니다.
  • 팬저 2012/08/09 17:09 #

    찰갑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무갑님의 블로그와 여러 언론에서 보았고 당시 발굴조사를 진행한 분에게 책도 받았습니다만.... 그 분야는 아직 원체 제가 젠병이라.......
    그 숨겨진 내용들은 잘 몰랐는데 무갑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네요.
    시간 들여서 당시 발굴조사한 자료를 다시 한번 보고 글 남겨보곘습니다. ^^ 이해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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