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가장 아래에 자리잡은 미조진성_01 진성(鎭城)

1872년 지방지에서 본 미조진성의 모습입니다. 미조진성은 1486년(성종 17)에 설치했는데 이후 왜구에게 함락당하자 혁파되었다고 합니다. 1522년(중종 17)에 다시 설치하고 석성을 쌓았는데 원래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필자가 가본 곳은 1522년에 지은 미조진서입니다. 석성의 둘레는 2,146척이고 높이는 11척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지방지를 기준으로 보면 둥근원형의 진성에 3개의 성문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문을 제외하고는 성문이 아주 작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주출입문인 동문의 경우 홍예문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미조진성 내부에는 객사와 동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소의 경우 동문을 따라 나와 좌측편에 있는데 그곳에는 전선 한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시 자료에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다고 하는데 1872년 지방지에는 전선 1척만 있는 것 같습니다. 

미조항으로 사용중인 미조진은 앞으로 미조도가 자리잡고 있어 선박의 출입을 알 수 없으며 천혜의 항만으로 되어져 있어 태풍이나 높은 파도에 피항하기 좋습니다. 선소 옆에는 인공적으로 심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맞은편에도 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미조진 상록수림입니다. 

보통 객사의 경우 북측을 향해 터를 잡아야 하나 미조진의 경우 위취상(남측은 바다가 없고 동측이 바다) 酉坐卯向(유좌묘향)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유좌묘향에 관하여 백과사전을 살펴보면 "즉 묘터나 집터 따위에 있어서,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자리, 즉 동향"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객사를 서측방향으로 놓여져 있습니다. 

서측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였을때 미조진성 뒷편에 있는 산이 주산이 되고 미조진이 있는 곳이 명당이 됩니다. 내백호와 내청룡이 없으니 나무를 심어 내백호와 내청룡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미조도는 주작이 되는 것입니다. 즉 현재 남아있는 미조 상록수림은 풍수에 있어서 내백호에 속하는 곳입니다. 내청룡이 있었던 곳은 현재는 나무가 없고 민가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조금 남아있는 곳이 현재 작은 동산입니다.

고지도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 현재는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에 속하는데 최근에 개발한 미조항말고 예전부터 있었던 곳이 미조진성이 있었던 곳으로 미조초등학교를 찾아가면 목적지를 빨리 찾아갈 수 있습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남측이 아닌 동측입니다. 
▼ 필자가 추정한 미조진성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항상하는 이야기이지만 1910년경에 나온 지적도를 기준으로 하고 실사 답사를 해야하나 필자는 지적도를 구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발로 그려봅니다. 따라서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문화재연구원에서 본격적인 조사를 해야 정확한 것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선소의 경우 현재도 비슷하게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저곳에 선소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돌로 된 섬아닌 섬이 있어서 이용하기 편하여 선소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 다시 보강하여 그려본 미조진성 체성도
▼ 미조를 가면 만나는 것이 바로 미조 상록수림입니다. 1872년 지방지에도 상록수림을 표시한 것을 보았을때 오래전에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조진을 건설하면서 풍수에 의해 만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풍수설에 따라 지형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미조 상록수림입니다. 
▼ 설명판으로 예전 것입니다. 현재에 있는 설명판은 더욱 알아보기 좋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 자세히 보시면 미조 상록수림 아래에 보도블록이 있으며 그 옆에 바위가 있는데 오래전 부터 파도가 왔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 미조항의 전경으로 현재는 여기 말고 저기 보이는 산뒤편으로 옮겨 갔습니다.
▼ 미조항은 예전부터 어업전진기지였습니다.
▼ 보물섬 축제때 한번 찾아가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네요. 
▼ 미조도의 모습으로 두개의 섬이 미조진을 가려주는 역활을 합니다. 
▼ 일단 미조진성이 현재 남아있는 곳은 얼마되지 않는데 바로 미조초등학교입니다.
▼ 미조초등학교에는 사진과 같이 돌로 된 담과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콘크리트로 된 담장이 보입니다. 
▼ 미조진성 내벽에 사용된 돌로 보이는 부분이 보이더군요. 즉 웅천읍성에서 본 것과 같은 내탁식으로 보였습니다. 내탁식 아래에는 돌로 계단식으로 축성하여 튼튼하게 만든것과 같은 방식일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 이렇게 쭉 이어져 있으며 사진과 같이 돌이 있는 것 위로는 경사지게 조성이 되어져 있으며 흙으로 덮여져 있습니다.
▼ 이렇게 쭉 이어져 있었습니다. 
▼ 이순신장군상 뒤편에 있는 나무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592년 6월 13일(양력) 여수에서 출발한 이순신함대가 1차 출전을 하면서 거쳐간 곳이 바로 미조진입니다. 또 7월 8일 2차 출전하고 돌아 오면서 미조진에서 연합함대를 해산한 곳입니다. 저번에 어란진을 이야기하면서 한 이야기중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저렇게 이순신장군상만 놓아둘 것이 아니라 이순신함대가 미조진을 거쳐서 갔고 여기서 해산한 곳으로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설명하여 놓았다면 더욱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 미조초등학교에서 바라본 포구의 모습입니다. 현재는 건물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선박의 출입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보시면 현재 있는 축대 위에 예전에 있었던 돌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조초등학교 축대를 만들면서 예전에 있었던 성곽을 헐어버린 느낌을 줍니다.(내탁) 이부분을 문화재 심의를 받고 하지는 않았겠죠.
▼ 미조초등학교 뒷편으로 가보았습니다. 보시다시피 70센치 정도로 되어보이는 담장이 있는데 이것이 미조진성의 성곽의 체성입니다. 풀이 너무 많이 자라서 보이지 않습니다만 풀을 제쳐보면 돌이 보입니다.
▼ 체성이 남아있는 미조초등학교 뒷편으로 올라 가보았습니다.
▼ 미조초등학교 교사가 보이고 낮은 담장들이 보입니다. 저 낮은 담장들이 미조진성의 체성입니다.
▼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군데 군데 낮고 높게 형성이 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죠. 미조초등학교 교사가 보이네요.
▼ 우측편을 보니까 그래도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체성이 나타납니다.
▼ 이순신 장군상 뒷편에 있던 큰 나무 아래에 체성의 모습이 확실히 보입니다. 
▼ 전체적으로 50여미터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낮게 형성되어져 있지만 확실한 체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 밭으로 되어져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농작물을 심고 있고 수확중이라 멀리서 찍다보니 사진에서 체성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이 길도 없는 상태이고 밭이라 더 이상 접근을 못하였는데 실질적인 체성은 사진에 보이는 곳에 많이 남아있더군요.
▼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면 겨우 보이는 미조진성의 체성입니다.
▼ 그래도 곡선을 이루면서 남아있는 체성이 보입니다. 위에서 말한 저곳이 가장 잘 남아있습니다.
▼ 이제 미조초등학교 정문이 있는 곳으로 왔는데 도로가 나타납니다. 예전 미조진성의 체성은 도로위에 있었습니다.
▼ 최영 장군을 모신다고 하는 무민사입니다. 
▼ 여기서 부터는 필자의 추정임을 알려드립니다. 확실한 것은 지표조사 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진과 같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담장을 보았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내탁식으로 된 체성이 아닐까 싶어서 따라가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 천주교 미조공소 즉 성당입니다. 아래편에 보이는 원형의 담장이 체성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 담장 같기도 하고 헷갈립니다.
미조진에 있어야할 선정비는 무민사에 자리잡고 있는데 필자는 가보지 못하였네요. 아무래도 체성의 원형이 잘 남아있는 곳도 아직 가보지 못하여 다음편에 시간을 내어서 가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