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딩 나이로 지켰던 남해 금산 봉수대 봉수대



남해 금산을 가면 제일 먼저 찾는다고 하는 보리암. 보리암보다 더욱 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봉수대가 바로 금산봉수대입니다. 

▼ 일단 금산봉수대에 관하여 살펴보면 고려 의종때 설치되었다가 조선시대까지 사용하였다고 적혀있습니다. 
 경상도읍지에서 본 남해현의 모습으로 북측이 우측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남해읍성이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위에서부터 평산진, 곡포보, 상주포, 미조진의 모습이 보이고 모든 수군의 보와 진 뒤편에는 봉수대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료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영남읍지에서 본 남해현의 모습으로 위지도와 비슷한 방식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남해읍성,수군진,봉수,길이 표시되어져 있습니다. 자료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예전의 지도에 표시된 봉수는 현재는 어떠한 모양으로 되어져 있을까요? 다음지도에서 살펴본 남해의 지도와 봉수입니다. 지도에 표시된 남해 창선도에 있는 적량진과 대방산봉수는 위 고지도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당시 창선도가 진주목에 소속되어져 있어서 남해에 표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주목에 창선도를 배치한 이유는 어패류 등을 공급받기 위해 거리가 됨에도 진주목에 배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 고지도에 창선도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금산봉수대는 동래봉수대에서 연결하여 한양의 남산까지 연결하는 제 2봉수에 속하는 것으로 안내판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제 1경로는 금산봉수대→남해 창선 대방산봉수대사천 각산 봉수대사천 안점산봉수대진주 망진산 봉수대를 거쳐서 한양으로 연결됩니다. 제 2경로는 금산봉수대남해 호구산봉수대남해 망운산봉수대하동 연대봉수대하동 금오산봉수대사천 우산봉수대진주 망진산봉수대를 거쳐서 한양(목멱산)으로 내 달렸을 것입니다. 또 서쪽으로는 금산봉수대→설흘산봉수대→복봉연대→봉화산봉수대→묘도봉화산봉수→건대산봉수대를 거쳐서 한양으로 전달 되었을 것입니다.

 위 다음지도를 기준으로 남해 근방에 있는 봉수대를 표시한 것입니다. 남해 최고 남단의 봉수대는 미조에 있는 망운산봉수대입니다. 
봉수는 봉수대를 두고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는 주연야화(晝煙夜火)의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수의 봉은 한문의 烽(봉화 봉)자로 횃불을 뜻하며 봉수의 수는 한문의 燧(부싯돌 수)로 연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봉이란 홰(炬)에 불을 켜서 서로 알게 하는 것으로 밤에만 사용하고 수는 나무에 불을 피워 그 연기를 서로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낮에만 사용하였습니다. 홰(炬)는 대개 싸리나무 속에 관솔을 넣어서 만들고 수(燧)는 섭나무를 태워 그 위에 이리 똥이나 또는 말똥을 피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리가 많지 않아서 그 똥을 구하기 어려우므로 대신 쇠똥이나 말똥을 구해 섞어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여지도서(1760)에 적혀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경상도 지역 중 153개의 봉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삼가현(현 합천군 삼가면) 금성봉수에 적혀있는 봉수대 비치물목을 살펴보면 거화시설 및 재료가 약 33종이고 방호시설 및 무기가 약 30종이며 생활시설 및 비품이 약 21종으로 총 80종 내외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남해 금산망대는 현존하고 있는 망대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적혀있네요. 남해 금산 봉수대는 해발 681미터 지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봉수대의 망대는 일정한 크기의 돌을 잘라내어 잔돌 매움 방식으로 둥글게 축성하여 놓았습니다. 아래에 조금 큰 돌이 보이기는 하나 거의 같은 크기의 돌이 아래 위에 자리 잡고 있는 형식입니다. 

 봉수대를 지키는 봉수군은 주로 인근지역 주민들로 충원하게 되는데 이는 봉수대 부근의 지형과 정세에 밝을 뿐만 아니라 근무지와 사는 마을이 가까워 적의 침입시 인력을 동원하기에도 수월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봉수대의 운영요원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별장(別將), 오장(伍長)과 봉수군, 봉수군보(烽燧軍補)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별장은 봉수대 관리를 위해 수령이 배정한 책임자이며 봉수군보는 봉수군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는 자이므로 실제로 근무를 서는 요원은 하급 장교인 오장과 봉수군인 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장 1명과 봉수군 4명이 하나의 번이 되어 총 20개의 번을 구성하였으며 한 개의 번은 5일 단위로 봉수대 위 막사에서 기거하면서 경계근무를 섰다고 합니다. 번을 서는 봉군을 제외하고는 19개 번의 봉수군들은 각자의 경제적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체 20번의 봉수군들은 군량형식으로 군포를 해당 봉수대 별장에게 지급하였으며 별장은 이를 실제 봉수대 근무 조에게 급료 형태로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봉수군 연령을 보면 봉수군 중 15세에서 20세까지가 가장 많은 숫자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또한 군역을 수행하지 못하는 10세 이하의 미성년자와 11세에서 14세까지의 어린이들도 편성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 근무를 설 수 있는 봉수군이 5명 중 4명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봉수군이 봉수대에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임무로는 전방의 적정을 살펴서 군사정보를 중앙과 진보에 전달하는 일, 안개나 비바람 등 악천후로 경계가 불가능 할 때 도보로 다음 봉수대에 알리는 일, 봉수대에 화약과 무기를 비치하여 적의 침입을 막는 일, 군사훈련과 검열을 받는 일, 거화 및 방비시설을 관리·보수하는 일, 거화재료를 확보하는 일 등 이었다고 합니다. 위에서도 적어 놓았지만 안개나 비바람 등의 악천후가 일면 다음 봉수대까지 이상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보통 30리 정도 되니 대략 16km정도 되는 길을 비 바람 속에서 짚신하나 신고 산을 오르고 내려야하는 험난한 길을 떠나는 것이 쉽지만 않았을 것입니다. 평지에서도 힘든 길을 산을 오르고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 후 다시 되돌아 오는 것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봉수군이 근무에 충실하면 표창하고 태만하거나 불성실한 봉수군은 엄히 징계하였는데, 심하면 참형을 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중엽부터 기강이 무너지면서 결번과 대립이 잦았고, 때로는 도적들이 봉수대를 차지하고는 거짓으로 봉화를 올리기도 했다고 할 정도니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남해 금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상주은모래비치로 상주초등학교 자리가 조선시대 상주보로 수군기지였습니다. 위 다음지도를 유심히 살피신 분들은 알겠지만 남해 금산봉수대는 상주보의 관리속에 이루어졌습니다. 

위에서 적어 놓았지만 수군진, 수령과 봉수는 아주 밀접한 관계입니다. 수령과 수군진이 있었던 곳에 봉수가 설치되어져 있어서 봉수를 보고 적의 침입을 알고 대비하였던 것입니다. 수령은 유사시에 즉시 관찰사에게 보고했습니다. 관찰사는 3개월 단위로 3·6·9·12월 말에 정기적으로 근무상황을 병조에 보고했습니다.

봉수군의 주거지는 대개 산 정상부의 봉수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두는데, 양지 바르고 생활하기 용이한 완경사지나 평탄지가 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는 왜성에서 왜군들이 막사를 두고 숙식을 하는 방법과 비슷하였을 것입니다. 다만 봉수군의 경우 집 한채만 해도 되었겠지만 왜군들은 여러채를 만드는 것이 달랐을 것입니다. 봉수군이 거주하는 곳에는 반드시 우물이 있었을 것이고 소규모 경작지를 통해 자급자족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진은 남해 금산에 있는 금산산장 앞에 있는 텃밭으로 저런식으로 자체적으로 자급자족을 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자료에는 남해 금산봉수대는 오장 2명과 봉군 10여 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합니다. 봉수대에서 근무하는 봉수군의 수는 시대나 장소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고, 근무일수도 달랐다고 하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면 변경지대의 봉수대에는 봉수군 50명과 감고 10명이 10일마다 교대로 근무하였다고 하니 거의 상주포에 소속된 주민의 자녀들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거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아이들이 지켰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위에서 적어 놓았지만 봉수군의 나이가 보통 15세에서 20세니 말이죠.

이렇게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였지만 실천에서는 제대로 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 그리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몇군데에서 봉수를 올리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가장 빠른 전달 방법이었고 제대로 봉수가 올라가면 한양까지 2~3일 안에 올라간다고 하니 상당히 빠른 정보였습니다. 

 임진전쟁 이후 봉수제도의 문제점들이 오고 갔고 역참제도로 넘어가지만 그래도 살아남아 인간레이더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 근대적인 통신망이 넘어오기 전부터 봉수군들이 근무지 이탈 등으로 인해 봉수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해 금산 봉수대 바로 옆에 있는 문장암으로 "由虹門 上錦山(유홍문 상금산)"이 적혀있습니다. 그 뜻은 "홍문을 경유하여 금산에 올랐다 또는 홍문이 있어서 금산이 최고의 산이다"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그 옆에 嘉靖戊戌(가정무술) 前翰林學士 朱世鳳(전한림학사 주세봉) 尙州浦權管金九成(상주포권관 김구성)으로 시작하는 한문이 있는데 가정무술년은 1538년이고 중종 33년 주세봉과 상주포의 무관인 김구성, 진사 오계인, 승려 계행과 같이 금산에 올랐다라고 적혀있는 문장암입니다. 주세봉과 함께 간 상주포 권관 김구성이 적혀있다는 것은 바로 남해 금산이 바로 상주포 즉 상주보의 관리 구역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현재 상주초등학교 담장에 남아있는 상주포성(상주보성)의 체성 모습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그외 인터넷 참고



덧글

  • 검은하늘 2013/10/09 13:20 #

    흠... 안타까운 건 서양식 기수 통신제도가 근대적 통신망 이전에 생기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네요. 물론 한자나 한글이나 서양식 기수 통신제를 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요...
  • 팬저 2013/10/09 18:56 #

    서양식 기수 통신제도라면 어떤 것을 이야기하시는지 제가 잘 몰라서 질문합니다.
  • 검은하늘 2013/10/09 20:09 #

  • 팬저 2013/10/09 20:48 #

    http://pds10.egloos.com/pds/200901/14/07/a0105007_496d3a1abec44.jpg 아... 여기 있는 이 깃발을 이용한 통신신호를 이야기 하시는군요. 우리나라의 경우 연을 이용하여 통신을 하였죠. 이를 신호연이라 하는 것 같은데 말이죠.
  • 검은하늘 2013/10/09 20:51 #

    신호연의 경우도 찾아보긴 했는데... 자세한 정보전달은 좀 무리겠던데요?
  • 팬저 2013/10/10 09:24 #

    예.... 그렇게 자세한 정보전달은 힘이 들었지만 대략적인 정보는 전달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