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시에서 오래전부터 추진하고 있던 진주대첩광장 진주성 주변 관광자원화사업이 제동이 걸린 것 같습니다. 지난 2007년 부터 추진하여 2014년까지 완공하겠다고 한 진주대첩광장의 경우 2014년에서 2015년으로 미루어졌습니다. 사업을 시작한지 6년이지나 7년으로 다가가가고 있지만 아직 필지를 완전히 매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진주성 주변 관광자원화사업의 경우 감사원에서 진주성 주변 관광자원화사업 재검토를 지시하였습니다. 진주성 주변 관광자원화사업을 하면서 예전에 있었던 대사지를 복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원래 있었던 대사지의 경우 시가지화가 진행되어서 진행하기가 힘드니 서측으로 한다고 계획안을 올렸는데 이게 지적을 받은 것입니다. 즉 예전의 장소도 아닌 곳에 있는 것이 무슨 복원이냐? 는 식으로 사업에 제동을 건것으로 보입니다.
진주시의 입장에서는 관광활성화는 측면에서 예전의 모습을 흉내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왕 돈을 들여서 하는 것인데 제대로 해야겠죠. 진주대첩광장만 해도 1,000억원이 들어가는 마당에 확실하게 복원을 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숭례문 사례만 보아도 대충 흉내내는 것은 얼마가지 못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지자체에서 너도 나도 읍성을 복원한다고 하면서 엉터리로 복원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혈세로 낭비하고 있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엉터리로 복원된 곳은 자라라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사지의 경우 아래 그림지도에 보이는 곳인데 이곳이 도로변 주위라 건물들도 많아서 대사지를 진주읍성 서측으로 가져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지도에 보면 서측은 절벽으로 구성되어져 있어서 해자가 없습니다.

진주의 대사지의 예전사진을 보면 우리들이 흔하게 보아왔던 해자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폭이 거의 80미터가 넘습니다. 과연 조선의 읍성중 이렇게 해자를 만들어 놓은 곳이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 대사지 때문에 진주읍성의 경우 섬아닌 섬으로 방어에 유리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진주읍성내에 있는 공북문과 촉석문의 잡상과 용두, 취두나 없애면서 제대로 된 복원에 힘을 쓰야 할 것입니다. 진주읍성내도 제대로 못하면서 대사지를 엉뚱한 곳에 복원하겠다는 발상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덧글
과거에 있던걸 최대한 그대로 만들어야 복원인데 말이죠.
아니면 '내가 꿈속에서 봤던 환상의 진주읍성을 현실에 복원[...]'이거나 ㄱ-
위 사진으로 봐서는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어 보이는데 실제로 진주성에 있던 건물 중 어떤 건물들이 남아있는지 궁금합니다.
울산 읍성은 그나마 동헌이라도 남아있고, 성벽이 그대로 골목길로 변해 흔적이라도 남아있는데 저긴 안그래보이네요;
또다른 ㅏ진과 관련 기록이 있는 경남일보의기사입니다 ㅇㅇ;;
http://old.gnnews.co.kr/index.html?section=KNCA&flag=detail&code=218777&cate1=KNC&cate2=KNCA
선조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6일(무진)
7월 19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홍계남(洪季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태를 보고는,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가서 내면(內面)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하자, 김천일이 강력히 저지하였으나 거이와 계남 등은 성을 나가 운봉(雲峰)에 진을 쳤다. 21일에 적 2백여 기(騎)가 동북 산상(山上)에 출몰(出沒)하였고, 22일 진시(辰時)에 적 5백여 기가 북산(北山)에 올라 열진(列陣)하고서 병위(兵威)를 과시하였으나, 성 안에서 출동하지 않자 사시(巳時)에는 적의 대부대(大部隊)가 뒤이어 와서 2기(起)로 나누어 1기는 개경원(開慶院)의 산 허리에 진을 치고, 1기는 향교(鄕校) 앞길에 진을 쳤다. 처음으로 교전(交戰)할 때 성 안에서 왜적 30명을 쏘아 맞히니 적이 군대를 거두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진격해 와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이보다 앞서 성 안에서는 적이 오려 한다는 것을 듣고서, 성남(城南)은 촉석(矗石)과 남강(南江)이 매우 위험하므로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할 것이니 서북에 호(壕)를 파야 한다고 여겨 해자를 파서 그 곳에 물을 담아 두었으므로 적이 공격할 수 있는 곳은 동편뿐이었다. 그런데 이 때에 적이 그 해자를 파내어 물을 빼고서 다 마른 뒤에 흙을 운반해다가 해자를 메워 큰 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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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서북쪽에 '호'(연못)을 팠다는 것이 바로 저 '대사지'. 저걸 메우고 들어왔다는 왜놈들도 징합니다;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성내의 집들을 모두 헐어버렸다던데, 그것이 전통가옥 거리 조성 같은 것으로 이어졌다면 낙안읍성처럼 살아 있는 민속촌은 아니더라도 그럴 듯한 모양새가 되었을 텐데요.
성벽과 성문의 복원 퀄리티도 상당히 낮고, 대사지까지 그런 식으로 복원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진주시의 문화행정 담당자들의 머릿속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진주시는 소프트웨어도 빈약한 것 같은데요.
솔직히 진주성과 관련된 축제나 행사는 그나마 간접적으로 유등축제 말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만드려면 진주성 전투 재현 행사 같이 흥미로운 것들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답답합니다.
진주시에서도 저런 부분에 관하여 복원할 마음이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다만 너무 도시화가 많이 진행되어서 대사지는 힘들어 보입니다.
일단 그 부분을 노력한 것에 칭찬을 해야겠지요.
진주성 전투장면은 한번 생각해보아야 될 콘텐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대사지는 물론 외성벽 복원도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