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왜성 이야기1(들어가면서) 왜성(倭城)

왜군들이 와서 조선반도에 축성한 왜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기에 따라 틀리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축성한 왜성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서측은 순천왜성으로 부터 동측은 울산왜성까지 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중 전라도에는 순천왜성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경남,부산,울산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왜성을 축성한 것은 이순신장군에 밀려 수송로 확보와 일본군이 내륙에서 후퇴한 뒤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았던 것입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왜성들은 축성시기가 다른 경우가 많은데 보통 1592년부터 1593년에 축성을 합니다. 아래 지도를 잘 보시면 거제,웅천,김해,부산에 축성한 왜성들이 보일 것입니다. 부산에 있는 부산포왜성,자성대왜성,동래왜성,구포왜성,동삼동왜성,기장왜성 등을 잘 보면 부산포왜성과 자성대왜성을 제외하면 왜성과 왜성사이의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축성한 마산왜성,고성왜성,선진리왜성(사천왜성),남해왜성,순천왜성,양산왜성,울산왜성은 왜성과 왜성사이가 워낙 떨어져 있어서 제외를 하고 임진왜란 당시 조성한 왜성을 보면 부산에 축성한 왜성들은 직선거리로 제법 멀러 떨어져 있습니다. 또 낙동강을 끼고 축성한 구포왜성,호포왜성,죽도왜성,신답왜성,마사왜성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 그런데 웅천땅과 거제 북부에 축성한 왜성들은 거리가 가까우며 총 9개의 왜성이 몰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순신함대가 출정하여 오는 길목인 곳에 왜성을 축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제 땅에 3개의 왜성을 축성하였고 웅천 땅에 6개의 왜성을 축성하였습니다. 웅천은 임진왜란 이전에 왜구들이 출몰하여 가장 먼저 오는 지역입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가장 최전방인 곳이 바로 웅천이라는 곳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들이 웅천 땅을 점령하고 나서는 이순신함대를 막아내고자 하는 가장 최전방이 바로 웅천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나 왜군의 가장 최전방이 웅천이었던 것입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웅천현의 좌측에 속하는 곳으로 웅천읍성을 중심으로 웅천왜성,자마왜성,명동왜성을 축성하였는데 이 거리가 반경 3km이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왜군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곳이며 중요한 곳이 바로 웅천이었습니다. 그 웅천 땅 중 가장 최전방인 왜성이 바로 명동왜성입니다. 명동왜성은 소 요시토시에 의해 축성되었는데 1593년입니다. 웅포해전이 있었던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음력)까지였습니다. 당시 이순신 함대가 하루밤 숙영을 한 곳이 명동왜성의 선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당시 명동왜성이 축성되었다면 이순신 함대가 숙영하기가 힘이 들었을 것으로 보여 명동왜성은 1593년 여름 이후로 추정이 됩니다. 즉 일본군은 웅포해전 이후 웅포해전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는 이유로 명동왜성을 축성하였다고 봐야 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명동왜성이 있었던 곳을 살펴보면 본성과 지성 그리고 관망하는 석루로 나뉠 수 있습니다. 보이는 도로의 경우 2003년 이후 조성될 정도로 명동까지 오기가 쉽지 않았던 곳입니다. 따라서 도보로 가려면 산을 넘어서 웅천 땅까지 가야 되었으며 차라리 배편으로 제포왜관으로 가는 것이 빠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동왜성이 있었던 곳은 산세는 험하지 않고 해발 100여미터 조금 되지만(본성이 있는 곳은 150미터도 되지 않습니다)북과 동,서측은 접근이 쉽지않는 곳이며 오로지 남측 바다를 통해 접근이 가능합니다. 물론 산을 넘어서 간다면 못가는 것은 아니지만 바퀴가 있는 것들은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일단 조선군이 공격을 한다면 육지에서는 창원에서 출발하여 웅천 땅에 들어서게 됩니다. 웅천을 들어서면 명동왜성으로 공격루트를 잡아야 하는데 이 경우 나즈막한 산이지만 일단 산이 가로 막아져 있어서 공격루트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중턱에 명동왜성이 자리잡고 있으니 공격이 쉽지 않을 것이고 그다가 웅천왜성,자마왜성,안골왜성에서 병력들이 지원을 해준다면 쉽게 공약하기가 힘이 들 것입니다. 더군다나 웅천땅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웅천읍성을 점령하고 웅천왜성을 공격하려고 하지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명동왜성을 점령하려고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더군다나 울산왜성을 점령하려고 50,000여명의 조명연합군이 공격하였지만 점령을 하지 못하였는데 왜성이 4군데 뭉쳐있는 웅천땅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 그러다 보니 수군을 통한 공격은 용이한 것은 사실입니다. 육군보다는 수군이 점령하는 구조는 쉬운편이나 선소에 있는 왜군의 함정들을 파괴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겠지만 수군이 명동왜성으로 바로 진입하는 것은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명동왜성은 선소 바로 옆에 명동왜성 지성이 자리잡고 있는 구조이라 완전히 점령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명동왜성의 구조를 살펴보면 선소가 동섬앞에 자리하고 그 옆에 지성이 보인다. 이 지성의 경우 선소를 관리하고 조선수군을 막아내는데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본성에서 떨어져 나온 지성의 경우 서생포왜성에서도 있고 영등포 왜성에서도 보았습니다. 물론 웅천왜성의 경우 지성은 아니지만 선소를 지키는 지성과 비슷한 곳은 보이더군요. 팬저가 주목한 곳은 이 명동왜성의 지성인데 지성에서 본성까지 거리가 대략 450m됩니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산이라고 해도 30분 이내 지원이 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수군을 방어하면서 본성에서 지원을 기대하는 구조라 봐야 할 것입니다.(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명동왜성이 있는 곳 바로 앞이 음지도인데 창원시청 페이스북에 올라온 음지도에서 바로 본 명동사진을 가지고 와 보았습니다. 명동왜성의 지성과 본성이 보이고 조선군의 진입을 감시하는 석루와 함께 선소도 보입니다. 선소의 경우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동섬 그리고 음지도에 막혀 일본군의 왜선이 몇 척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가 힘이 듭니다. 천혜의 자연을 이용하여 선소를 만들고 명동왜성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a라고 적혀있는 부분은 예전에는 산등선이었는데 도로를 낸다고 허물었던 곳입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선소가 있는 야산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보아도 선박이 어느 정도 있는 지 알 수 없죠. 물론 야산 정상에는 지성이 자리잡고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겠죠.
▼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선착장인데 예전에는 저보다 더 들어가 선소가 있었을 것입니다.
▼ 지성이 있었던 곳을 보면 나즈막한 야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명동왜성까지는 올라가보지 못하였습니다. 언제 시간내어 올라간 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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