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전방 웅천에 관하여 읍성(邑城)



명당에 들어선 웅천

“웅천이 왜? 웅천현의 중심이었는가?”에 관한 의문을 알려면 풍수지리적인 부분을 살펴보면 알게 될 것이다. 

현 진해에서 풍수지리적인 측면만 보면 가장 명당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웅천이다. 한양을 수도로 삼았던 것은 풍수지리설였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읍치의 경우 주산을 중심으로 관아와 민가를 남으로 배치한다. 물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웅천은 전형적인 배산임해(背山臨海)의 풍수지리적인 명당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  해동지도에서 본 웅천

태조산인 웅산, 근조산 즉 주산인 시루봉이 북 현무에 해당되는 곳이다. 시루봉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세가 형성이 되는데 풍수 지리적으로 외백호와 외청룡에 해당된다. 천자봉으로 연결되는 곳이 외백호이고 봉동산으로 연결되는 곳이 외청룡이다.

천자봉은 다시 산세가 연결이 되는데 음지도가 있는 명동까지 연결이 된다. 이렇게 연결된 산세가 내백호이다. 외청룡인 봉동산은 다시 갈라져 자마산으로 연결되는데 내청룡이다.

그리고 웅천읍성에서 보았을 때 남측에 있는 산인 남산이 남 주작이 된다. 또 웅천의 물길은 주산인 시루봉에서 흘러와 웅천 읍치의 동으로 흘러서 웅포만으로 흘러가는데 그곳이 파구이다. 

원래 읍치를 정할 때에는 풍수장이를 대동하고 갔을 정도로 풍수는 읍치 선정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읍치에 있어 내청룡이나 내백호 등이 없을 경우 인공적으로 나무를 심거나 하여 청룡이나 백호를 보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웅천은 그럴 필요가 없었을 정도이고 이렇게 배산임해의 자연적인 요소와 함께 현무, 백호, 청룡, 주작까지 다 갖추어진 곳 읍치는 그렇게 많지가 않다. 읍치로 정해진 곳 중 많은 수의 읍치가 어딘가 하나씩 부족한 편인데 웅천은 풍수지리의 표준처럼 잘 갖추어져 있는 명당이니 웅천에 읍치를 정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초기 연해읍성 웅천읍성

웅천읍성은 세종 16년(1434년)에 축성된 정사각형 평지성이며 돌로 축성한 석성이다. 웅천읍성은 정사각형 평지성에서 장방향의 평지성으로 증, 개축하였는데 단종 1년(1451년)이다. 웅천읍성의 외부는 돌로 축성되어져 있으며 내부의 경우 2단으로 된 석축이며 그 위에 흙으로 덮어져 있는 있는데 이를 내탁식이라고 한다. 

웅천읍성의 기록을 살펴보면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성의 규모는 둘레가 3,514자이고, 높이는 15자이다. 우물 2개소와 군창이 있다고 한다. 웅천읍지에 의하면 해자, 우물 6개, 관수고, 육균 병기고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 5년(1868년)에 증보된 웅천읍지를 보면 동헌, 객사, 장적고, 향사당, 인리청, 군관청, 장관청, 훈도청, 지인방, 사령방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웅천읍성의 성문은 4개, 치성이 6개이며 읍성 외부에 해자가 둘러쳐져 있다. 해자는 4.3미터  넓이와 2.5미터 높이다. 동문인 견룡루 앞에는 조교가 설치되어져 있는데 조교는 평상시에는 설치되어 주민이 사용하다가 적이 공격을 할 경우 조교를 들어 올려서 적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한다. 해자는 적의 진입을 늦추기 위해 넓고, 깊게 판 구덩이와 같은 것으로 그곳에 물이 흘러가게 하여 적이 쉽사리 건너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 해자 안에는 뾰족한 나무로 된 목익을 심어 놓아 적이 해자를 도강할 때 적에게 치명상을 주는 방어도구이다. 목인은 웅천읍성 발굴조사에서도 발견이 되어 현재 복원 설치되어져 있다. 

성곽에서 가장 취약한 곳을 꼽자면 성문이며 성문은 나무가 주재료이다. 석성, 토성의 체성(성벽)에 비해 성문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보여준다. 취약한 성문을 공격하는 것은 공격자로서 당연한 것이고 수비자로서는 취약한 성문을 막는 것이 당연하다. 취약한 성문을 막고자 성문 앞에 ㄱ자나 반달형 성벽을 만들어 적이 성문을 향해 직진으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적이 우회하여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문 앞에 또 하나의 성벽을 낸 것을 옹성이라고 
▲ 복원된 웅천읍성 동측체성과 동문 견룡문

한다. 성문은 나무이다 보니 적의 화공공격에 취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약점을 보강한 것이 나무판 위에 얇은 철판으로 덮어놓아 적의 화공공격을 대비하였다.       

읍성은 행정의 기능과 방어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城)이다. 진성은 수군이나 육군이 주둔하는 군사적 목적의 성(城)이다. 읍성의 행정, 방어적인 성격이 있는 성(城)이다보니 사각형, 오각형, 다각형, 원형으로 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수군진성은 원형의 형태가 많다. 산성은 산의 지형을 따라 형태가 이루어져 있다 보니 복잡하고 다양하게 형성이 되어져 있고, 왜성은 직선으로 된 다각형으로 2중, 3중으로 성곽을 두른 형태로 되어져있다.

웅천읍성을 축성할 때 인근 고을에서 주민들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진주, 창녕, 합천, 청도 등의 주민들이 동원되었다. 축성 당시 책임진 구간에 명문석에 새겨 놓아 성벽이 무너질 경우 이를 책임지게 하려 했던 것으로 조선시대 당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웅천읍성이 복원하기 전에 남아있었던 체성은 동벽 약 400m, 남벽 70m를 비롯하여 서벽의 일부가 비교적 양호하게 잔존하였다. 잔존 높이는 약 3~5.5m 였었다. 동측체성과 남측 체성일부를 복원하였으며 동문인 견룡문과 옹성, 해자, 조교, 치성, 수구 등을 복원되었다.

복원된 성벽 하단부를 보면 조선시대 축성 당시의 돌 그대로 있고 중, 상단부에는 현재의 돌로 복원하였다. 웅천읍성은 조선 초기 연해읍성의 방식 그대로 축성된 읍성으로 하단부에 큰 돌을 쌓고 위로 가면서 작은 돌로 축성하는 구조로 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읍성 철거령이 내려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전국에 있는 많은 읍성들이 철거되거나 없어져 버렸는데 웅천읍성은 상당부분 남아있게 되었다. 일본이 군사적 목적으로 진해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면서 웅천은 읍치로서의 기능이 상실하게 되었고, 해방 후 도시화가 진행된 진해와 달리 웅천은 더디게 진행됨으로 인해 웅천읍성은 상당 부분 살아남게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웅천읍성 내에 있었던 객사, 동헌은 물론 많은 관청들이 사라지게 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동문의 견룡루(見龍樓), 서문의 수호루(睡虎樓), 남문의 진남루(鎭南樓), 북문 공신문(拱宸門)이 있었다. 성문이 4개라는 것은 ╋자 모양으로 된 도로가 발달 되어져 있음을 이야기한다. 조선의 읍성은 성문이 3개이면 T자 모양의 도로가 발달되고, 성문이 4개이면 ╋자 모양의 도로가 발달이 된다. 교통의 요충지에 따라 성문이 4개, 그렇지 않으면 3개, 2개씩으로 자리 잡았다. 웅천읍성은 읍성치고 상당히 작은 규모인데 비해 성문이 4개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요충지였음을 의미한다. 

읍성에서 남문이 주 출입문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 동문이나 북문이 주 출입문으로 되는 경우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남문이 주 출입문으로 사용한다. 웅천읍성의 경우 남측에 제포왜관, 제포진성, 보평역(報平驛)도 있어 더 더욱 남문이 주 출입문이 되었을 것이다.  

남문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 전임 수령의 치덕을 알리는 선정비를 남문 입구에 새워두었다. 웅천읍성의 남문이 사라지면서 남문 입구에 있었던 선정비들도 옮겨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선정비들은 현재 서정저수지 근처에 모아 놓았다. 

수령이나 사신들이 들어서는 것도 남문이요 군인들의 입, 출입도 남문을 사용한다. 그 남문에 있는 누각이 진남루이다. 진남루의 진이 진압할 진(鎭)이다. 읍성의 남문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진남루이다. 창원읍성, 진해읍성(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김해읍성, 충남 서산 해미읍성, 충남 보령 남포읍성, 광주읍성, 전남 순천읍성, 전남 강진읍성, 울산 언양읍성, 경북 상주읍성, 경북 청도읍성, 순천 낙안읍성, 평북 구성읍성, 충남 공주읍성 등에서 진남루를 사용한다.

또 군대가 주둔한 병영성, 수군진성, 산성의 남문도 진남문이 많았다. 강진 전라병영성, 여수 전라좌수영, 진주성의 북장대의 누각이 진남문으로 사용, 경북 칠곡 가산진이 설치된 가산산성 등에서도 사용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해의 경우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새롭게 조성된 도시이며 이때 진동면에 있는 진해현의 명칭을 가져와서 진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진해의 경우 진압할 진(鎭)에 바다 해(海)이며 바다를 진압한다는 말이다. 

이런 진해의 경우 도시명칭에 사용한 경우는 진해현이 유일하지만 성문이나 누각 등에도 많이 사용하였다. 현재의 진해루라고 하면 경화동에 있는 진해루를 떠올릴 것이다. 울산에 있는 경상좌병영성 객사의 누각, 경기 강화 외성의 성문, 제주목 관아의 누각, 정유재란 당시 여수 전라좌수영 누각 등에서도 진해루를 사용하였다. 

북문의 경우 4개 성문이 있어야 사용하는 문으로 큰 규모의 읍성이나 병영성, 수영성, 감영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전국적으로 3개의 성문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4개의 성문은 전국적으로 많지 않았는데 웅천읍성은 작은 읍성임에도 불구하고 북문이 존재하였다. 웅천읍성의 성문은 공신문으로 공신문의 공(拱)은 두 손 맞잡을 공이다.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며, 신(宸)은 대궐 신자이다. 즉 북측에 있는 대궐(왕)을 향해 공경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공신문과 비슷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 공북문(拱北門)이다. 즉 성문 중 북문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통제영성, 전라좌수영성, 창원읍성, 진주읍성, 전주읍성, 대구읍성, 광주읍성, 전북 고창읍성, 청주읍성, 공산성으로 알려진 충남 공주읍성 등에서도 공북문을 사용하였다. 뜻은 공신문과 같은 뜻이다. 

공신문, 공북문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공진문(拱辰門)이다.  辰은 별 진과 때 신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십이지(十二支)의 다섯째로 용을 상징한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북측에 있는 왕을 향해 공경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경상좌수영성, 김해읍성, 경주읍성의 북문에 사용하였고 통제영성의 원문의 누각도 공진문이었다. 

동문은 견룡루(見龍樓), 서문은 수호루(睡虎樓)이다. 동문은 청용, 서문은 백호를 나타내는 것으로 방위각에 의하여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웅천읍성의 동문인 견룡문만 복원되었다. 

웅천읍성 안을 살펴보면 길은 ╋자 모양의 길로 되어져 있으며 현재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도로의 북측은 관공서, 남측은 민가가 자리 잡는 것이 조선 읍성의 기본적 배치이다. 물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웅천읍성은 충실하게 기본을 따른 읍성이다. 읍성 내부의 경우 아전이나 백성들이 살았고 읍성 외부에는 양반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읍성 내, 외부에 장이 들어서는데 보통 읍성 안에 장이 들어서며 남문을 중심으로 시장이 자리 잡는다. 이렇게 남문 근처에 시장이 들어서는 것은 남문이 가장 중심 문이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웅천읍성은 남문 옆에 시장이 자리 잡고 있으며 4일과 9일장이다.  

읍성에 있어서 중심적인 건물은 객사이다. 웅천 객사 터의 경우 현재 웅천초등학교 자리이며 동헌의 자리는 웅천고등학교 자리이다.  

도성인 한양에서는 종묘가 있다. 종묘는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가의 사당인데 비해 객사는 현존하는 왕에 대한 충성 명세를 하는 곳이다. 종묘는 죽은 선대 왕과 왕비의 사당이고 객사는 죽지 않은 왕에 대한 사당 기능을 하게 되어 생사당의 기능이 있는 곳이다. 또 객사는 공무를 위해 읍치를 방문한 문, 무관을 위한 숙소의 기능도 함께한 것이 특징이다.
▲ 웅천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된 웅천객사
▲ 웅천객사 천정에 있는 쌍용 
객사는 보통 동헌보다 크고 화려한 건물이며 건물의 방향은 주산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는 것이 기본이다. 또 독자적인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 담장으로 구분되어져 있으며 건물의 구조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고, 앞면에 중문(中門)·외문(外門), 옆면에 무랑(廡廊) 등이 부속되었다. 정당이 더 높게 만들어져 있으며 좌우 익실은 정당보다 낮게 만들어 놓았다. 

정당은 기와와 돌을 깔고 삭망례를 지냈으며 좌우 익실은 온돌로 되어 사신이나 공무를 집행하는 문, 무관의 잠자리로 사용되었다. 정당은 매우 신성한 공간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 수령이 전폐를 모시고 궐배를 하였다. 

웅천객사의 장소는 웅천읍 중 가장 위엄 있게 조성되었을 것이며 다른 읍치의 객사와 같이 객사를 가기 위해서는 2개의 문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웅천객사는 외문과 중문으로 구성이 되어져 있었을 것이고 외문은 삼문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외삼문이라고 한다. 외삼문에 누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누각은 정해루(靖海樓)이다. 

전국의 객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철거하거나 화재 등 수난의 아픔을 거치게 되었는데 그래도 웅천객사는 웅천초등학교 교사로 사용하면서 오랫동안 남아있게 되었다. 1969년까지 객사의 건물을 교사로 사용하였으나 오래된 건물이라 하면서 철거를 하였다. 웅천객사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면 우리들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객사 철거 당시 찍어 놓은 사진을 보면 웅천객사의 위용이 그대로 들어난다. 객사 천정에는 두 마리의 용(청룡과 황룡)이 서로 엉켜 지탱하고 있었는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건물이 동헌이다. 동헌은 오늘날의 시청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지만  행정, 국방, 사법, 조세, 교육 등을 다루는 것으로 오늘날의 시청은 물론 법원, 세무서 등의 기능도 함께 한 곳이다. 웅천 동헌을 추정하는 곳은 웅천고등학교 운동장이다. 여기에 동헌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은 오래된 노거수이다. 이 노거수는 270년이 되었으며 나무 2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보통 동헌의 뜰에 있는 노거수를 심어 두었는데 이는 모든 재판에 입회하는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지도와 웅천읍지의 기준으로 보아도 웅천고등학교 부지가 동헌의 자리이다. 

동헌의 경우도 객사와 마찬가지로 외삼문과 내삼문을 거쳐 동헌을 들어가게 되었다. 내삼문의 경우 문지기가 항상 지키고 있었으며 수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헐소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헐소는 지금으로 치면 민원인 대기실인 것이다.  

동헌은 수령이 근무하는 곳이며 생활하는 곳은 내동헌이라고 불리는 내아다. 내아에는 수령의 가족들이 생활하고 책실이 있었을 것이다. 웅천읍성 내부 관공서로는 장적고,향사당,인리청,군관청,장관청,훈도청,지인방,사령방 등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없다. 

제포왜관에 도착한 일본 사신은 곧바로 동헌을 들러 웅천현감을 만나야 한다. 그 이후 일본 사신은 창원, 칠원, 영산을 거쳐서 한양으로 가게 된다. 일본 사신이 만나는 최초의 수령이 바로 웅천현감이었던 것이다. 제포왜관이 없어지게 되는 정미약조(명종3년 1547년) 전까지 일본 사신의 접견은 웅천현감이 가장 먼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읍성 내부에 있지는 않았지만 읍성에서 중요한 것이 향교인데 웅천향교는 일제강점기 1915년에 웅천현이 폐지되면서 폐교되어 건물이 철거되었다. 웅천향교의 대문인 외삼문에 누각이 있었는데 반화루(攀化樓)였다. 웅천향교의 누각인 반화루와 같은 당호를 사용하고 있는 향교가 있는데 부산의 동래향교, 세종시 연기향교, 전북 정읍시 태인향교이다.

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재정에 의해 설치, 운영된 공립 중등학교격인 교육기관으로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와 유생에게 유학을 교육하는 교학기능과 함께 지방의 문화 향상 등 사회교화기능도 갖고 있다. 향교의 교수, 훈도는 정규관원으로서 임명 하도록 하였으며 웅천향교 학생의 정원은 30명이었다.

웅천읍성 외부에는 땅과 곡식에게 제사 드리는 사직단이 읍성의 서쪽에 배치되는데 웅천도 서쪽에 배치하였다. 

제포왜관 교류의 전진기지

웅천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웅천지역을 다스리는 읍치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웅천이 조선팔도에서 중요성을 부각하게 된 것이 태종 7년(1407년)이다. 바로 왜관의 개관이었는데 웅천의 내이포(乃而浦, 제포[薺浦]라고도 함)와 부산포에 왜관을 개설하면서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세종 1년(1419년) 대마도 정벌로 인해 왜관이 폐쇄되었다가 세종 8년(1426년)에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일본어: 宗貞盛)의 청에 따라 기존에 개방하였던 내이포와 부산포에 이어 울산의 염포가 개방되었는데 바로 삼포개항이다. 삼포에는 각각 왜관을 두어 왜인 60명에 대하여 거주를 허락하였다.

하지만 왜인들은 계속해서 거주하게 되었고 세종 말년에는 내이포에 약 1,500명, 부산포에 약 350명, 염포에 약 120명이 상주하였다. 삼포왜관중 가장 큰 규모가 바로 내이포 즉 제포왜관이며 조선의 가장 큰 개항지였던 것이다.  

왜관이 들어서고 무역항으로 발전하자 주민들도 급증하게 되었으며 왜인과 조선인과 접촉이 자주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왜인들은 무역과 어업을 행하기도 하였다. 거주지와 통행할 수 있는 곳을 정하여 위반할 수 없도록 하였지만 머물러 있는 것이 점점 많아졌다. 

이렇게 왜관이 점점 확대를 하자 조정에서는 웅천의 중요성과 함께 왜인들을 방어하고자 웅천현에 읍성을 축성하는데 조선 세종 16년(1434년)이다. 또 합포(마산)에 있었던 조선수군의 기지를 웅천으로 옮겨오는데 이때가 바로 세종 18년(1436년)이며 이 수군기지가 제포진이 된다. 

이듬해 1437년부터 종 3품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는 거진(巨鎭)이 되었고 안골포진(현 진해), 사량포진(현 통영), 당포진(통영), 영등포진(거제), 옥포진(거제), 조라포진(거제), 평산포진(현 남해), 적량진(현 남해)을 관장하였다.

제포진의 방어를 위해 석성으로 축성하였는데 완공된 시기가 성종 16년(1485년)이다. 이로서 웅천은 제포왜관을 중심으로 육군과 수군의 성곽이 완성이 되게 되었으며 수군과 육군이 지키는 곳이 되었다. 제포진성과 웅천읍성을 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성종 21년(1490년)에 제포 인근에 있었던 수군기지인 안골포에 안골포 진성을 축성한다. 이로서 수군기지 2개 모두 성곽을 축성한다. 

조선인들의 접촉을 차단하고 왜인들을 통제하고자 웅천 남산을 중심으로 흙으로 만든 토성을 축성하였는데 바로 제덕토성이다. 제덕토성의 축성 시기에 관하여는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 없는데 중종 2년(1507년)에 토성을 축성을 하려고 측정을 하자 제포왜관의 왜인들이 항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시기에 축성한 것으로 보여진다. 

중종 5년(1510년)에 왜인들이 난을 일으키는데 바로 삼포왜란이다. 제덕토성, 제포진성, 웅천읍성을 설치하여 방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포진성, 웅천읍성은 왜인들에 의해 함락이 되고 제포 첨사 김세균이 납치되기도 하였다. 이후 창원의 경상우병영과 김해에서 합류한 조선군에 의해 왜인들의 난은 진압하게 되었으며 삼포에 있는 왜인들은 추방되었다. 

삼포왜란 당시 왜인들은 제포, 부산포, 염포, 안골포, 영등포, 다대포에 있었던 조선 수군의 병선을 불태워 없애버렸던 점을 상기하여 삼포왜란 후 바로 조정에서는 각 포구에 수중목책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제포에 설치된 목책의 경우도 이 시기에 목책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중목책은 큰 나무를 박아 세우고 쇠사슬로 차례차례 연결하였으며 큰 나무를 물 밑 한 자쯤 잠기게 하여 적선이 걸리어서 넘어 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연결한 나무 중앙에 쇠갈고리를 설치하여 잠그기도 하고 풀기도 하여, 아군은 입출하게 편하게 하고 적선은 넘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수중목책은 동아 대학교 박물관이 1997년 6월부터 6개월 동안 발굴 조사하면서 발굴되었으며 현재는 매립하였다. 1998년 통영 당포에서도 수중목책이 발견되었다. 수중목책은 일종의 수중 바리케이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며 이런 목책은 인류가 방어를 시작하면서 나타났으며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방어시설물이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소련군과 독일군은 전차의 진출을 막기 위해 쇠나 나무로 만든 목책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수중목책의 경우도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였으며 기록 또한 남아있을 정도로 오래된 방어 시설물인 것이다.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조선조정에서는 웅천의 중요성과 함께 왜구를 막기 위해 가덕도에 수군 진을 설치하는데 가덕진성과 천성진성이다. 가덕진성과 천성진성 모두 중종 39년(1544년)에 축성하게 된다. 그동안 제포진, 안골포진이 있던 수군기지에 가덕진과 천성진이 추가로 설치가 되게 된 것이다. 이로서 웅천은 4개의 수군진이 있는 최전방 전선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왜구를 상대하는 거제, 웅천, 부산, 울산으로 이어지는 GOP(General Out Post)전선이 되었으며 이보다 더 전선에 접근한 가덕진과 천성진은 GP(Guard Post)가 되었던 것과 같다고 봐야할 것이다.

임진왜란 - 왜군의 전진기지가 된 웅천

1592년 일본이 명나라를 정복하러 간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면서 본격적인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왜군은 부산을 시작으로 한양까지 진격하였으며 웅천도 점령하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성 철수 후 남해 연안에 성곽을 축성하여 각기 무기와 식량 등을 충분히 확보하여 장기적인 방어전에 임할 것을 지시하면서 본격적인 왜성의 축성이 이루어졌는데 거제, 웅천, 부산, 울산으로 이어지는 왜성은 조선군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설치하였으며 웅천에 무려 5개의 왜성을 축성한다.

▲  웅천왜성 성문이 있었던 호구( 虎口 고구치 [こぐち])

웅천왜성은 해발 184미터의 산기슭에 축성한 왜성으로 선조25년(1592년)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이 축성하였으며 일본수군의 부기지로 활용하였다. 정상부에 본성을 두고 1외곽, 2외곽을 둔 전형적인 일본성이다. 다만 일본에 있는 일본성과 달리 왜성은 산기슭에서 산 정상까지 나성(羅城)을 쌓았으며 조선의 치성(성벽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성벽)과 같은 것이 있는데 웅천왜성에서 발견된다.

STX조선소를 거쳐서 만나는 명동 뒷산에 왜군이 축성한 왜성이 있는데 바로 명동왜성이다. 명동왜성은 선조 26년(1593년) 마쯔우라 시게노부에 의해 축성하였는데 웅천왜성의 보조적인 성격이 있는 왜성이다. 해발 80미터 지점에 평지를 개량하여 왜성을 축성하였으며 본성을 중심으로 500미터 떨어진 곳에 돌로 축성한 망루인 석루(石壘)가 자리 잡고 있다. 명동왜성에서는 선소도 운영하였는데 현재 웅천초등학교 명동분교 앞에 운영하였으며 지금도 선박의 정박지로 이용되고 있다.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이용한 또 하나의 왜성이 있는데 바로 자마왜성이다. 자마왜성은 웅천읍성과는 직선거리로 1.5km 웅천왜성과는 2.5km떨어져 있다. 자마왜성의 경우 자마산 정상부와 능선에 축조된 왜성으로 선조 26년(1593년) 소 요시토시(宗義智)에 의해 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5부 능선부터 왜성이 축조되었다. 

웅천왜성에서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안골포왜성이 있다. 안골포왜성은 선조 26년(1593년)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등이 성을 축성하고 1년씩 교대로 수비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였다. 동망산의 정상부에 있는 안골포왜성은 3등분으로 나누어져있다. 본환과 2지환, 3지환으로 따로 축성하였고 각 성곽은 연결되어져 있다. 

가덕도에도 왜성이 들어섰는데 가덕도왜성이다. 가덕도왜성의 경우 눌차왜성이라고도 하는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축성을 담당하였으며,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등이 주둔하였다고 전해지는 왜성이다.

이렇게 웅천에 5개의 왜성을 축성한 것은 부산으로 진격하는 조선군을 막아내고자 하는 것이며 왜군의 입장에서 가장 최전방이 되는 곳이며 왜군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전에는 조선군의 최전방에서 임진왜란 시기에는 왜군의 최전방이 된 곳이 웅천이었다. 웅천에서 웅포해전, 합포해전, 안골포해전이 있었으며 조선군은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곳이고 왜군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곳이 웅천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의 핵심기지가 된 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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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웅천은 기존 수군기지를 더 보강하게 되는데 바로 풍덕보이다. 보는 진보다 규모가 작은 부대이다. 풍덕보 설치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고 광해군 2년(1610년)에 조정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정유재란 이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또 현재 예비군과 성격이 같은 김해의 소모진(召募鎭)인 신문진과 청천진이 안골포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때가 효종 7년(1656년)이다. 원래 육군소속이었던 두 개의 진은 안골포로 이전하면서 수군으로 편입이 되었고 예비부대와 교육부대로 남게 된 것이다. 

이로서 웅천은 기존 제포진, 안골포진, 가덕진, 천성진과 함께 풍덕보가 보강되었으며 예비부대와 교육부대인 신문진과 청천진이 함께하게 되었다. 물론 전선을 고치는 굴강까지 안골포에 자리 잡게 되어 웅천은 지금의 신병교육소와 주력함대 그리고 예비부대와 창정비를 하는 진정한 수군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일본이 진해를 해군기지로 사용하였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대한민국 해군의 기지로 되었다.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해군기지보다 그 이전에 진해는 조선 수군의 기지였음을 웅천은 이야기한다.    

성곽의 보고가 된 웅천

현 가덕도의 경우 부산시로 편입이 되었지만 웅천초등학교를 기준으로 직선거리 반경 1km 안에 웅천읍성, 제포진성, 제덕토성, 자마왜성이 있으며 반경 2km 에는 웅천왜성, 제포왜관 이 있고, 3km 명동왜성, 5km 안골포왜성, 안골포진성이 있다. 직선거리이지만 반경 10km 안에는 가덕진성, 가덕도왜성이 있고 반경 11km에는 천성진성도 있으며 바다 건너 거제도에는 구 영등포진성, 영등포왜성이 있다. 웅천읍성에서 김해읍성까지 직선거리로 18km, 창원읍성까지는 20km가 넘는 곳임을 보았을 때 웅천을 중심으로 짧은 거리에 수군진성과 왜성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웅천에서 가덕도와 거제까지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웅천읍성에서 5km 안에 수군진성 2개, 왜성 4개, 읍성 1개, 토성 1개, 수군목책 1개, 왜관 1개, 굴강 1개가 있다. 이 거리를 더 좁히면 웅천읍성에서 직선거리로 3km 안에 읍성(석성) 1개, 토성 1개, 수군진성(석성) 1개, 왜성(석성) 3개, 수군목책 1개, 왜관 1개가 있다. 

반경 3km안에 읍성과 수군진성은 물론 왜성, 왜관, 토성까지 볼 수 있는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볼 수 있다고 보는 동래읍성의 경우 사라진 동래왜성 터는 있지만 수군의 진성을 보려면 직선거리로 6.5km ~ 8km로 가야하며 왜성의 경우 구포왜성은 7km나 떨어져 있다. 그나마 개수도 1개이다. 반경 2km라면 반나절 안에 웅천읍성과 웅천왜성, 제포진성, 제포왜관지까지 둘러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웅천이다. 

이렇게 다른 지역에 비해 성곽의 경쟁력은 물론 역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웅천에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지 않다. 울산의 서생포왜성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항상 상주하고 있으며 서생포왜성을 찾아오는 일본인들에게 일본말로 해설을 해주고 있다. 서생포왜성은 왜성만 있는 곳이지만 웅천은 읍성, 수군진성, 왜성, 토성은 물론 왜관지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관광지로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2013년 12월 100년 만에 35미터 성벽을 복원한 청주읍성의 경우 해마다 청주읍성큰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청주읍성이 복원되기 전부터 많은 인원이 참여하여 청주읍성 탈환을 기념하는 큰잔치를 열었었다. 성벽이 있지 않아도 축제로 진행을 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의 전투장면을 재현한 동래읍성 역사축제는 해마다 인원의 참여가 늘고 있으며 2014 대한민국축제콘텐츠 축제공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또 동래읍성 역사축제 때 발행하는 기념 엽전을 모집하는 마니아까지 생길 정도로 역사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두 개의 축제 말고 전국적으로 읍성을 이용한 축제는 많은 편이다.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 고창읍성 답성놀이, 청도읍성 읍성 밟기 놀이가 시행되고 있으며 마산 회원현성 밟기 놀이가 있기도 하다. 전북 고창군에 있는 무장읍성에서는 동학 농민 혁명의 무장기포를 기념하기 위하여 무장읍성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또 전라병영성에서는 병영체험 활동도 하고 있다.

수원읍성인 수원 화성에서는 무예 24반의 전통무술 공연도 벌어지고 있으며 진주읍성, 낙안읍성 등에서는 수문장 교대식과 같은 볼거리를 관광객에게 만들어 주고 있다. 

2012년 초 동측체성을 복원한 웅천읍성의 경우 아직 성벽과 옹성, 누각을 구경하는 것 이외에는 볼거리가 없는 편이다. 전국적인 읍성들의 축제와 비교하기가 힘이 들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은 사실이다. 

웅천읍성을 중심으로 웅포해전, 삼포왜란이 있었고 삼포왜란의 경우 웅천읍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이다. 1510년 4월 11일(음력 기준이며 양력으로는 5월 28일) 있었던 삼포왜란을 재현하는 행사를 진행한다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웅천은 예전의 웅천과 달리 남문지구가 조성되고 있으며 기업체들이 하나, 둘 입주하고 있다. 아파트단지와 웅동경제자유구역에 입주민과 놀이시설이 입주하게 되면 몰라보게 바뀔 것이다. 또 남문지구에 외국인 주거단지까지 들어선다고 한다.

진해부산경제자유구역은 물론 남문, 남양, 웅동 경제자유구역보다 600년 전인 태종 18년(1418년)에 제포왜관이 개설된 바로 앞에 경제자유구역이 들어선다. 이제 4년 후 제포왜관 개설 600주년이 된다. 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것도 필요할 것으로 보여지고 삼포왜란이 일어난 지 504년을 기념하는 웅천읍성만의 축제도 필요할 것이다.  

역사성과 성곽이라는 하드웨어는 잘 갖추어진 곳이 바로 웅천이다. 이는 전국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지역의 재산이다. 하드웨어에 비해 부족한 것이 소프트웨어이다. 좀 더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담을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지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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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문화원에서 발행한 진해문화 12권에 기고한 "웅천의 재인식"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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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5/01/03 16:25 #

    성곽관련 쓰실때 마다 쭉 보는데ㅜ언제나 재밌게 보고 갑니다
  • 팬저 2015/01/03 22:00 #

    많이 부족한 부분을 느끼고 있습니다.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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