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앞에 매단 다리 조교(釣橋) 읍성(邑城)



역사관심님이 길주읍성에 관련된 글을 작성하시면서 조교(釣橋)를 언급하였습니다. 역사관심님이 발제한 17세기 조선시대 개폐식다리 글 보기 

역사관심님이 글을 작성하시면서 최근에 복원한 웅천읍성의 조교(釣橋)에 관하여 언급을 하면서 조교를 감아올리는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현재 조교(釣橋)를 들어올리는 시설은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웅천읍성 해자 조교(釣橋)에 관련된 글은 안내판으로 대처합니다. 이렇게 조교(釣橋)를 설치한 것은 발굴조사하면서 나온 조교(釣橋)의 시설을 기준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북새선은도-길주과시의 모작이라고 그림입니다.(아무래도 큰 이미지를 구하는데 쉬워서 모작을 가지고 왔습니다)
북새선은도의 조교(釣橋)의 모습으로 홍살문과 같은것에 도르레를 달아서 조교(釣橋)를 들어올리는 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조교(釣橋)를 그려 놓은 그림을 접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런 그림이 있어서 조선시대 읍성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웅천읍성의 조교(釣橋)의 경우도 해자의 다리를 건너게 하고 적이 침입을 할때 들어올려서 적이 해자를 건너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분을 웅천읍성 모형에 만들어 놓았으며 웅천읍성 동문 옹성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만 저런식으로 조교(釣橋)를 들어올리게 만들어 놓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맞다라고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모형에 만들어 놓은 조교(釣橋)식이라면 많은 인원들이 참가하여 들어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에 비해 길주에 있는 도르레 형식이라면 몇 명만 해도 충분히 들어올릴 것입니다.
서양의 성(城)은 저런식의 조교(釣橋)는 유럽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안에서 도르레를 이용하여 들어올리면 적이 들어오는데 힘이 들 것입니다. 다만 우리와 달리 유럽의 조교(釣橋)를 들어올렸을때 화공에 취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래 사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성문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의 아그라 성(城)입구에도 조교(釣橋)가 설치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과 인도의 조교(釣橋)를 보면 성문도 있고 그 앞에 조교(釣橋)를 설치하여 위급할 경우 들어 올리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식의 성문을 현문(懸門)이라고 한다고 하네요.
조교(釣橋)를 풀어서면 매단다리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기존 다리와 달리 줄이나 쇠로 다리를 매단것입니다. 지금 현재로 치면 현수교가 예전의 조교(釣橋)와 같은 것입니다. 또 전교 벼랑을 통과할때 벼랑 벽면에 지지하여 공중에 매달린 형식도 조교(釣橋) 라 말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경새재 곶갑천의 험로에는 0.5m~1m 낭떠러지에는 잔교를 설치하여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황산잔도나 작원잔도의 경우도 낭떠러지에 잔교를 설치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중국의 시안성에 길주에서 본 것과 같은 조교(釣橋)과 설치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홍살문과 같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홍살문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뭐 홍살문이라는 것은 객사,향교,동헌 앞에 있는 것이라 성문 입구에 있는 조교(釣橋)에는 달 수가 없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아래 사진과 같이 도르레를 이용하기 위해 홍살문과 같이 만들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는 대개 평야에 성을 쌓았으므로, 성 밖의 둘레에 깊은 못을 파고 오직 성문 있는 곳만 다리를 놓았는데, 그 다리는 들었다 놓았다 하게 되었으므로 매단다리 즉 조교(釣橋)라 하였습니다. 조교 또는 적교(吊橋)라고 불리기도 하며 적교의 잘못된 말이라고 합니다.(일단 釣橋라 적어 놓아서 일단 釣橋로 표시합니다)  중국의 영향력 때문에 평지성을 가지고 있는 국내의 성(城)에서도 이런 조교(釣橋)가 등장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웅천읍성의 경우 평지읍성이라 저런 조교(釣橋)가 필요하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조교(釣橋)는 조선시대때 여러 곳에 설치되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임진왜란 당시 창원에 있었던 경상우병영성, 거제읍성(고현성), 울산 언양읍성, 서산 해미읍성에 흔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성곽 말고도 여러군데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경상우병영성,언양읍성,해미읍성의 경우 평지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제읍성의 경우 평산성이며 평지인 북측 성문에서 적교의 흔적이 나온 것입니다.

적교(吊橋)의 경우 오래전부터 있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서생포왜성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자료에 나옵니다. 따라서 길주읍성에 보여지는 적교의 경우 중국의 영향력을 받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림으로 남겨진 적교로 기록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핑백

  • 까마구둥지 : 17세기 조선시대 개폐식 다리 (북새선은도의 해자 도개교) 2015-01-08 06:36:20 #

    ... 지르고, 거기에 의지(依支)하여 매달아 놓은 다리 줄에는 와이어 로우프 또는 강철선(鋼鐵線) 묶음을 쓰는 다리", 즉 현대의 현수교의 개념입니다. 성문 앞에 매단 다리 조교(釣橋) 흥미로운 것은 한국인들의 뇌리에선 사라져버린 (아마도 그래서 위 웅천읍성의 조교도 제대로 감아올리는 형태구현을 못한듯 합니다), 이러한 조 ... more

덧글

  • 無碍子 2015/01/07 19:27 #

    조교는 釣橋라고 쓰는 게 맞을 겝니다. 또 적교吊橋라고 써도 됩니다.

    또 현대 토건에서 현수교 비슷한 다리를 弔橋 혹은 釣橋 또吊橋로 쓰여집니다.
  • 팬저 2015/01/07 19:39 #

    한자가 틀리군요?(수정했습니다) 일단 적교라고 이야기가 맞다고 해서 적교라고 할려고 하고 있습니다.
  • 無碍子 2015/01/07 20:12 #

    三國演義 羅貫中 輯 第十二回 陶恭祖三讓徐州 曹孟德大戰呂布에는 吊橋라고 써있습니다.

    操先往觀之,見城上遍豎旗旛,西門角上,有一「義」字白旗,心中暗喜。是日午牌,城門開處,兩員將引軍出戰:前軍侯成,後軍高順。操即使典韋出馬,直取侯成。侯成抵敵不過,回馬望城中走。韋趕到吊橋邊,高順亦攔擋不住,都退入城中去了。數內有軍人乘勢混過陣來見操,說是田氏之使,呈上密書。約云:「今夜初更時分,城上鳴鑼為號,便可進兵。某當獻門。」操撥夏侯惇引軍在左、曹洪引軍在右,自己引夏侯淵、李典、樂進、典韋四將,率兵入城。李典曰:「主公且在城外,容某等先入城去。」操喝曰:「我不自往,誰肯向前!」遂當先領兵直入。

    時約初更,月光未上,只聽得西門上吹蠃鼓聲,喊聲忽起,門上火把燎亂,城門大開,吊橋放落。曹操爭先拍馬而入,直到州衙,路上不見一人。操知是計,忙撥回馬,大叫:「退兵!」州衙中一聲磝響,四門烈火,轟天而起;金鼓齊鳴,喊聲如江翻海沸。東巷內轉出張遼,西巷內轉出臧霸,夾攻掩殺。操走北門,道旁轉出郝萌、曹性,又殺一陣。操急走南門,高順、侯成攔住。典韋怒目牙,衝殺出去。高順、侯成倒走出城。典韋殺到吊橋,回頭不見了曹操,翻身復殺入城來,門下撞著李典。典韋問:「主公何在?」典曰:「吾亦尋不見。」韋曰:「汝在城外催救軍,我入去尋主公。」李典去了。典韋殺入城中,尋覓不見,再殺出城壕邊,撞著樂進。進曰:「主公何在?」韋曰:「我往兩遭,尋覓不見。」進曰:「同殺入去救主公!」兩人到門邊,城上火磝滾下,樂進馬不能入,典韋冒煙突火,又殺入去

    그리고 웅천읍성 해자 조교 안내판에는 釣橋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釣橋나 吊橋 다 맞는 표현으로 봅니다.
  • 팬저 2015/01/07 20:20 #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레이오트 2015/01/07 19:18 #

    그러고보니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각종 매체에서 성이 나온다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저 조교가 오르내리는 장면이 나오죠. 특히 기마 추격전에서 이 조교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하거나 목표를 놓치는 것은 그야말로 클리셰죠.
  • 팬저 2015/01/07 19:35 #

    유럽의 배경에는 저런 조교의 모습이 많이 보이죠.
  • 역사관심 2015/01/08 06:40 #

    아, 이런걸 조교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중국 시안성의 조교는 정말 홍살문스러운 기축기둥을 중심으로 성안에서 감아올리는 구조가 길주관아도의 그것과 거의 일치해서 정말 놀랐습니다.

    포스팅에 첨가정보를 넣었습니다. 좋은 정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팬저 2015/01/08 11:12 #

    발제글을 보고 저도 공부할 수 있었네요. ^^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