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포진성_01 진성(鎭城)



경상좌수영 7진중 하나인 서평포진성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보니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래 지도는 1872년동래부지도이며 동래부 지도중 왼쪽 가장 아래가 다대포진성인데 다대포진성위에 서평포진이 있습니다. 이 지도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 1872년 지방지에서 본 서평포진입니다. 다대포진성 위에 서평포진이 보입니다. 그리고 우측 하단에 구 서평포진이 보입니다. 서평포진에 관하여 1872년 지방지에 관한 서울대학교 규장각 설명 글을 보면 "서평포 만호영은 지금의 사하구 구평동에 있었다. 종9품의 무관이 수장(守將)이 되는 가장 작은 진보(鎭堡)였다. 임진왜란 후 다대진 성내로 이전하였다가 1668년(현종 9) 다대진성이 비좁다는 어사의 보고에 따라 옛 진영 자리 서평으로 돌아갔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는 무관 종4품의 만호가 수장이 되었다. 서평포 만호영은 다대 직할의 만호영으로 만호 아래 군관 8명, 진리 6명, 지인 3명, 사령 2명이 있었다. 보유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었다. 전선1척에 딸린 병력은 1,100명이었다. 사하구 구평동 365, 366번지 일대에 분포한다.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서남 49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형의 석축성으로 둘레 1689척, 높이 13척인데, 1592년에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전에 지금의 구평동인 구서평동(舊西平洞)에 토성지는 1966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신라 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극동철강회사의 공장 신설로 멸실되었다고 한다. 조선조 다대포진과 더불어 동서 양익의 수군진영에 설정된 것은 삼포왜란 뒤의 중종 17년(1522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부산첨사영에 소속된 하나의 작은 보성에 지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진영을 유지할 수 없어 다대포진의 성내로 이전하였다가 1668년(현종9)에 다대진서이 비좁아 다시 옛 영지의 남쪽 2리 지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1966년까지 남아 있었다는 성벽은 이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확대해 본 것으로 서평진이 보이고 우측에 구서평이 보입니다. 이것으로 보았을때 조선말기로 가면서 서평진은 진을 옮기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서평진성이 있었던 곳에서 자리를 옮겨 간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선소와 선창의 경우도 다대포진 옆으로 옮겨 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있었던 서평진은 구서평이라는 지명으로 사용하였고 근래에 와서는 서를 뺀 구평으로 사용중에 있으며 서평포진성이 있는 곳은 구평입니다. 구 서평진이 아닌 서평진이 있었던 곳은 현재 지명인 신평(신서평)이 있었던 곳에 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확실하지가 않네요. 
▼ 동래읍지에 있었던 동래부지도에도 다대는 진성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서평진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해동지도 동래지도에도 서평진은 잘 찾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 현재 서평포진성이 있었던 곳은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일대이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한번 한 적이 있다고 하며 그때 나온 조사를 기본으로 서평포진성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임진왜란때에는 서평포진성이 있었지만 이후 서평포진이 옮겨감으로 인해 흔적을 잘 찾기가 쉽지 않으며 북문과 남문의 경우 2개의 성문이 있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며 팬저의 임의로 추정한 것이라 정확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따라서 정확한 것을 위해서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정확하게 알 수 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성문이 두개 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현재도 남아있는 골목길을 근거로 추정을 한 것이라 성문이 두 개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 네이버 지도의 항공뷰로 본 서평포진성으로 평지와 야산을 끼고 조성된 평산성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해봅니다.
▼ 현재 사하구 구평동을 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노거수로 현재 마을의 당산나무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 현재 이 당산나무는 수령이 17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음력 10월 14일 자정을 기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예전에 도로 개설과 함께 당산나무를 이전하려고 하였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현재도 도로 한 가운데 당산나무가 남아있습니다.
▼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서 바다 방향을 보면 구평로라는 도로가 나옵니다. 일단 지명의 경우 위에서 설명한 구서평포를 줄여서 만든 구평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보이는 건물이 있는 곳이 서평포진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이 되며 임진왜란 1592년 9월 1일(음력) 이순신함대가 부산진을 공격하러 오다가 이곳 서평포진에 있던 왜선 9척을 격파한 곳이고 서평포해전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 맞은편은 현재 공장건물로 사용중인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바닷가로 추정이 됩니다. 사진에서 우측은 지대가 조금 높고 좌측은 낮은편에 속합니다. 따라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사진에 보이는 지점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북문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찍어본 사진으로 슈퍼 옆으로 올라가야 예전 길이 나옵니다.
▼ 이곳이 북문이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으며 예전의 길을 가지고 추정을 한 것입니다. 아래에 나올 사진의 위치가 성문이 아닐까 추정을 해봅니다.
▼ 위 사진에서 조금 올라온 것으로 성문이 있었다면 보이는 파랑색 담장 앞이 북문이 들어설 가망성이 많다고 보여집니다.
▼ 위 사진에서 조금 올라와서 뒤돌아 본 것으로 공장의 창고가 있는데 객사나 동헌이 있었다면 이 정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조금 더 올라가자 본 모습입니다.
▼ 차량이 세워진곳으로 위로 길이 있는데 베이지색 건물까지 체성이 연결된 것은 아닐까 싶어서 찍어본 사진입니다.
▼ 다시 되돌아 본 모습으로 성문이 있었다면 사진에 보이는 전봇대 주변으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정확한 것은 아니고 추정입니다. 일단 남문지 추정입니다.
▼ 남문지 추정 옆 건물로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도로를 따라 건물이 형성이 되지 않고 대각선으로 건물이 놓여져 있습니다.
▼ 현재 감천항에서 오는 도로로 4차선 도로인데 이곳까지 서평포진성이 이어지지 않았을까 추정을 해봅니다.
▼ 구평동 버스정류장
▼ 예전 도시임을 알려주는 것이 조그마한 집입니다.
▼ 서평포진성이 있었던 곳으로 보여지는 곳 맞은편으로 구평동 가구공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확실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서평포진성에서 나와 다대포진성으로 가는 옛길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 일단 바로 앞에 보이는 오래된 나무가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이 부분은 동래 옛길을 참고하여 다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진짜 옛길은 어딘지 알아서 올려볼께요. 
▼ 다시 돌아서 북문으로 추정하는 곳에서 도착을 했습니다.
▼ 사진을 보면 우측의 건물과 도로를 보면 경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바다가 이곳까지 들어 온 것이 아닐까 싶어서 찍어본 사진입니다.
▼ 성인 남성 2명이 지나가면 꽉 찰것 같은 고샅입니다.
▼ 서생포진성의 끝은 어디일까 싶어서 동측으로 가보았는데 사진과 같이 공장건물이 있어서 더 이상 추정해 보기가 싶지 않더군요.
▼ 위 사진의 트럭이 있던 곳에서 서생포진성이 있었던 곳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작은 나무들이 있는 곳이 조금 돌출이 되었더군요. 혹시 체성이 지나간 것은 아닐까 싶어서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 트럭이 있는 곳에서 찍어본 사진으로 확실히 우측이 지대가 낮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서생포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서포로라는 지명을 보고 한장 찍었습니다.
이번에는 정확한 것을 알기보다는 추정을 하여 글을 올렸습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일제강점기 지적도를 가지고 보다 더 정확하게 접근을 해보아야겠습니다.

고지도 이미지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덧글

  • 번동아제 2016/04/23 02:03 #

    감사합니다.
  • 팬저 2016/04/23 10:46 #

    추정만 해봅니다. 지적원도라도 있으면 정확하겠지만 말이죠.
  • 별일 없는 2016/04/23 13:04 #

    대단하십니다. 근데 아쉽네요. 사서에도 다대포진성전투 부산진성전투 동래성 전투 아님 수사 박홍의 행적이나 25인 용사들로 인해 수영에 관한 결과는 알려져있는데(윤흥신같은경우나 이정현같은 경우 늦게 발견된걸로 압니다만) 서평포진성은 전투가 벌어져 모두 전멸된진건지 아님 부대가 와해된건지 아님 동래나 김해로 빠져나간건지 거기다 지휘관들도 알수가 없어서 안타깝네요.
  • 팬저 2016/04/23 15:08 #

    동래읍과 100리나 떨어진 외딴 곳이라 더욱 더 그러한 것 같습니다. 당시의 기록이 없다보니 더욱 더 찾기가 힘든 것이 아닌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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