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경상우도병영성인 진주읍성 모형 영성(營城)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본 조선후기 경상우도병영성인 진주읍성의 모형입니다. 조선시대때 그린 진주성도(晉州城圖)를 바탕으로 제작한 진주읍성 입체도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조선전기때 축성한 진주읍성보다는 규모가 작은편이지만 진주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진주읍성이 크다 보니 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더군요. 이런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진주읍성을 자세히 보시면 진주읍성은 천혜의 자연과 인공적인 부분을 이용한 읍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주읍성은 남쪽으로는 자연 해자인 남강이 흐르고 북쪽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해자인 대사지가 흐립니다. 또 서쪽은 낮지만 가파른 형태로 조성된 산이 있어서 공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서쪽은 동측보다 지대가 높은편이고 동쪽은 평지입니다. 왜군의 입장에서는 남측은 공격하기가 힘이드니 포기를 하였을 것이고 서측은 가파픈 산세라 일단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나머지 북측과 동측인데 북측은 30여미터가 넘는 대사지인 인공해자가 있었는데 이것을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조선의 해자는 4~6미터 정도여서 넘어가기가 수월하였지만 진주읍성은 30여미터가 넘는 인공해자라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인 동측을 공격하는 것이 왜군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 확실하게 동측과 남측은 물론 사방 모두를 알 수 있습니다. 동측은 낮고 서측은 높으며 북측은 평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뭐 남측은 남강이 흐르고 있지요.  
▼ 서측은 행정중심으로 동측은 주민들이 사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양반들은 진주성도에 나오는 곳이 아닌 상대동이나 초전 등에서 생활 하였을 것입니다.
▼ 서장대와 서문의 의정문, 호국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서문에서 내려와서 민가까지는 거리는 얼마되지 않지만 가파른 곳이라 왜군들이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 진주읍성의 내성으로 내성중에서 북포루가 있는 진해루 중심으로 각종 관아들이 몰려있습니다.
▼ 사진을 보시면 진주읍성의 고저 높낮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동측은 낮고 서측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내성의 모습으로 내성 안에는 민가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후반까지도 진주읍성 안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 내성과 외성 그리고 대사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공북문과 대인문을 통해가야 대사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 촉석루와 의암 그리고 촉석문으로 연결되는 내성과 외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모형을 보시면 내성보다는 외성에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주읍성 외곽에 민가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외성은 말그대로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습니다. 
▼ 외성은 주민들이 주로 살고 경상우도병영의 각종 관아는 내성에 진주목의 각종 관아는 비봉산 아래에 자리하였습니다.
▼ 대사지와 남강이 연결되어져 있어서 대사지에 항상 물이 가득차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측체성은 낮지만 그래도 언덕위에 체성이 축성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조선후기 진주읍성의 모습으로 조선전기 진주읍성은 조선후기 진주읍성보다 더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보이는 모형에서 더 동측으로 길게 형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 조선후기 진주읍성의 중심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진주객사에서 연결된 도로와 신 북문인 지세문, 그리고 남문인 예화문으로 연결된 부분이 조선후기 중심도로였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을 거치고 현대까지도 저 도로가 중심도로의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사지는 메꾸어지고 그곳에 학교와 경찰서,우체국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동장대가 있었던 곳이 무너지면서 외성은 사라지게 되고 객사는 관공서 건물(진양군청)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 내성의 모습은 촉석루는 물론 내성을 가기 위한 촉석문과 공진문이 내성을 상징합니다. 현재 진주성은 촉석문과 공진문 그중 공진문이 정문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 조선시대때에는 어떤 문이 정문 역활을 하였을까요? 보통 남문이 정문 역활을 하는데 진주읍성 또한 남문인 예화문이 누각이 2층으로 되어져 있어서 정문 역활을 하였을 것입니다만 진주객사로 연결되는 지세문이 정문역활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즉 상징적인 정문은 남문이 예화문이 하고 실제로 주민들이 출입을 많이 하는 곳은 신북문인 지제문이 그렇게 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때 찍은 사진을 보면 객사로 연결되는 도로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는 것을 사진은 말해주더군요. 또 진주읍성이 무너지면서 지제문과 형옥을 중심으로 진주중앙시장이 들어선 것으로 봐서 지세문이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성문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 지제문 주의가 현재 진주시의 중심지(요즘은 중심지 역활을 하는지는 몰라도 2000년대만 해도 중심지 역활을 하였습니다)이니까요. 
▼ 홍살문이 보이는데 여기서부터는 목가짐을 조심하라고 하는 곳입니다. 형옥은 남자죄수와 여자죄수가 따로 생활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으며 둥글게 다시 담장을 둘러 놓았습니다. 형옥은 크기 차이가 날뿐이지 전국적으로 거의 똑 같은 방식이라 봐야할 것입니다. 
▼ 공북문과 대인문으로 연결되는 공간은 놀이의 공간이라고 봐야할까요? 
▼ 구.북문인 대인문을 나오면 대사지가 나옵니다. 대사지 안에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여기서 뱃놀이를 즐겼던 것으로 진주성도에는 나옵니다. 다만 남강과는 달리 연꽃이 많이 자라고 있어서 남강과는 다른 뱃놀이였을 것입니다. 
▼ 진주목의 중심인 객사와 동헌의 모습이 보이고 경상우도병영이었음을 증명하는 중영의 모습도 보입니다.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던 병마우후(兵馬虞候)가 머문곳이 중영(中營)으로 진주읍성이 아닌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근무하는 운주헌과 외삼문인 포정사의 모습이 보이고 전시때 지휘하는 진남루의 모습이 보입니다.
▼ 사진식으로 이렇게만 보니까 1960년대로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초가집은 뺴고 말이죠. 진주읍성의 경우도 1970년대까지는 진주읍성안에 주민들이 살았으니까 이와 비슷했지 않았을까요?
조선후기에 그려진 진주성도 때문에 저런 모형을 복원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덧글

  • 돌고래N 2016/12/14 12:26 #

    아기자기해서 예쁘네요. 어릴 적 종이가지고 놀던 생각도 나고.. ㅎㅎ 잘 봤습니다.
  • 팬저 2016/12/14 14:42 #

    예.. 아무래도 축소된 것이라 예쁘게 보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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