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교방과 권번 읍성(邑城)



진주중앙광장교차로를 지나서 갤러리아백화점으로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것 중 하나가 우리은행입니다. 이 우리은행 뒤편을 가보면 진주권번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 안내판에는 우리은행터가 일제강점기 당시 권번터였다고 합니다. 진주교방이 폐지되자 진주 관기들이 생업을 위해 기생조합을 결성해 활동하다 1914년 진주권번을 결성해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 진주권번에는 기생 100명과 견습생 5~60명이 있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진주 권번에 좀 더 자세하게 나와 있는 것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적은 <진주대관>애는 500평 큰 기와집에 넓은 마당, 대청마루, 소리, 가야금과 춤을 배우던 큰 연습방이 3개나 됐다고 적혀있을 정도이니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권번은 지역적으로 규모가 있는 곳에서 성장을 하였는데 서울, 평양, 부산, 대구, 광주, 남원, 개성, 함흥 그리고 진주에 있었다고 합니다. 권번은 일제강점기 시절 부르던 이름이었고 조선시대에는 기생들이 있는 곳을 교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교방의 관할은 호방이 하였는데 춘향전에서도 호방은 콧소리를 내며 기생을 소개하기도 하고 변사또에게 “춘향이는 기생이 아니고, 전 사또 자제 도련님과 맺은 사이”라고 알리기도 합니다. 호방은 기생뿐 아니라 호구관리, 전결 조사, 부세의 부과와 징수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교방은 호방이 있는 곳과 가까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호방이 언제나 찾아가야 하는 곳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다보니 진주목의 향청이었던 갤러리아백화점 주차장이 교방청이 있었던 곳입니다. 진주목 동헌과는 불과 50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부터 전해저오는 것을 보면 북평양, 남진주라 하였으며 평양기생이 으뜸, 진주기생이 버금이었다고 하니 진주의 기생은 상당히 알아주었던 것 같습니다. 즉 북측은 평양, 남측은 진주 기생이 제일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평양기생보다는 좀 더 높게 평가하였던 곳이 평북지역의 강계로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고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기생의 경우 기생은 노래를 전담하는 소리기생, 춤을 담당하는 춤기생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기생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지방 수령과 잠자리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수령이 기생과 잠자리를 하면 장 60대에 처하하라고 하였으나 이렇게 지켜지는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토지>의 박경리는 “진주 기생 숫자가 여름날 파리보다 많다”고 했을 정도이니 상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1924년 5월 조선총독부가 이야기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조선기생은 3,400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 자료에 의하면 경남출신 기생이 1,139명이었다고 하니 경남출신 기생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생의 경우 고을의 규모에 따라 달라졌다고 하며 10~100명 내외였는데 감영이나 병영에는 100~200여명의 기생이 있었고 고을 규모가 가장 작은 현에는 10여명 있었다고 하며 군은 40명, 목·부의 경우 60~80명이었다고 하며 조선후기로 가면 더 인원이 많았다고 하니 진주의 경우 병영과 목이 같이 있는 곳이라 대략 250명 이상은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봅니다.

이런 교방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진주교방굿거리 춤이 전승되었으며 현재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져 있습니다. 진주포구락무도 교방가요에도 적혀져 있는 것으로 진주교방에서 연희한 부분을 복원하여 전해지고 있으며 경상남도의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져 있습니다. 또 교방에서 전승되어 온 진주검무는 현재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져 있습니다. 진주교방을 출입하는 한량에 관한 춤인 진주한량무는 경남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무 말고도 교방의 음식도 전해져 오고 있으며 교방음식은 궁중음식과 진주 향토음식이 합쳐져 있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권번에 있던 기생들도 3.1운동 때 참가를 하였다고 하니 진주기생의 기상은 대단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참고 – 디지털진주문화대전, 진주의 기생과 문화
행복이 가득한 집 2013년 8월호
진주 기생의 절개, 진주 정신을 말하다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