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읍 유림 탄생은 풍수지리 때문 읍성(邑城)



유림(儒林)과 사림(士林)에 관해서 많이들 들어보았습니다. 유림(儒林)은 공자나 성현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이고 사림(士林)은 선비의 무리를 뜻합니다. 유림(儒林)은 향교나 서원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이러다 보니 향교가 있는 곳에 보통 유림회관이 있습니다. 남해향교가 있는 곳에도 유림회관이 있습니다. 남해향교 바로 옆에 유림 1리와 유림 2리가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유림(儒林)과 상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유림 1리와 유림 2리에 사용하는 한자는 유림(儒林)이 아니라 유림(柳林)입니다. 이 유림(柳林)은 버드나무 유자를 사용합니다. 즉 한글만 같고 한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림이라고 전해져오게 되는 것은 남해의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현 고현면에 있는 고려시대 치소를 지금의 남해읍으로 가져오게 됩니다. 고현면에 있었던 읍성을 남해고읍성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예전에 현이 있었다고 하여 고현면(古縣面)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고현면은 남해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용합니다. 거제 고현, 창원 진동 고현, 경북 청송 진보 고현, 전남 해남 현산 고현 등에서 사용하는데 대부분 예전에 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입니다.

남해읍에 치소를 옮기고 풍수지리를 더합니다. 보통 주산을 뒤로 두고 물을 앞에 두는 배산임해(背山臨海)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남해도 마찬가지였는데 진산을 남해읍 뒷산인 망운산을 두고 주산을 봉황산을 두고 안산을 남산을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전형적인 남북으로 이어지는 구조이긴 한데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식이며 북쪽도 낮고 남쪽이 높은 西高東低, 北低南高 형식입니다. 다른 읍치와 마찬가지로 내청룡, 내백호, 외청룡, 외백호로 연결되는 형식으로 진행을 하게 됩니다.

주산인 봉황산에서 내청룡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허하다고 판단하였는지 남해읍을 넘어오는 고개에 나무를 심습니다. 즉 인공적인 비보림(裨補林)을 조성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1444년(세종26년)으로 남해현감으로 부임한 현감이 심어라는 지시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심은 나무가 버드나무인데 선소방향으로 많이 심었다고 하며 이때부터 남해읍을 넘어오는 고개를 유림(柳林)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유림 1리와 유림 2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유림1리에 버드나무 2그루가 남겨져 있습니다.
남해읍은 유림(柳林)뿐 아니라 안산이라고 할 수 있는 남산에도 비보림을 조성하게 되었는데 바로 남산수(南山藪)인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고 합니다. 남산수는 안산인 남산을 보완하게 한 것인데 유림의 버드나무와 달리 소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져 옵니다.

남해읍과 비슷한 것이 바로 진동면에 있는 진해현인데 진해현의 경우도 고려시대 읍치인 우산에서 현 진동으로 옮겨왔으며 예전의 현이 있었다고 하여 고현리입니다. 남해읍과 진동의 우산 모두 고려시대에는 산위에 있다가 평지로 내려오는 부분도 같으며 풍수지리적으로 보완을 해야겠다고 하여 인공적으로 비보림을 심는 것도 같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남해나 진해현과 같이 함안의 칠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칠원읍성의 수구문 앞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보완하였다고 합니다. 칠원의 비보림은 사라지고 현재 숲길이라는 지명만 남겨져 있다고 하는데 예전 항공사진을 보니 비보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남광정이라는 정자가 버드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있습니다. 이 남광정은 1971년에 세운 것입니다.
▼ 남광정에는 2개의 현감선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남해 남산에 많은 선정비가 있는데 여기에 2개가 있습니다. 이는 남해를 들어오는 길목이라 선정비를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유림이 있었던 곳에는 유림마을 이외에는 없고 고개식당이라는 상호의 식당이 보입니다.
자료 참고 : 경상대학교 최원석 교수 " 경상도 읍치경관의 역사지리학적 복원에 관한 연구: 남해읍을 사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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