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해구청에서 부산 방면 2번 국도를 따라 차로 움직이면 10분도 되지 않아 도착하는 곳이 남문경제자유구역이다. 현재 남문경제자유구역은 넓은 대지에 아파트단지가 속속 들어서고 있으며 2019년 안으로 모두 입주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창원시는 2020년까지 물류, 유통, 국제 업무 등의 산업을 유치하여 18만여 명이 거주하는 도시로 만들어질 계획일 정도로 창원시의 미래이기도 한 지역이다.
남문지구에서 남측으로 차로 5분 거리도 되지 않은 곳에 괴정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괴정마을은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져 있다고 알려졌으며 현재 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 괴정마을이 예전에 국제항이었다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흔들면서 믿지를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괴정마을 웅동경제자유구역이 있으며 괴정마을과 수도 사이에 36홀 골프장이 있다 보니 이곳에 조선시대 무역항이었던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1997년 6월 제덕만의 공유수면 매립 공사 시 갯벌 속의 목책 유구가 나타났다. 당시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6개월 동안 발굴 조사하였다. 목책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은 300여 점의 분청사기·토기·선박 부재·청동 제품·목간·와편을 비롯하여 사슴뿔 등이 나왔다. 조사된 말목은 가운데 부분은 지름 20㎝ 내외의 소나무를 사용하였으나 남북 지점의 말단부는 지름 10㎝ 내외의 참나무를 사용하였다. 나무 기둥은 150㎝ 정도의 길이와 10~20㎝ 내외의 직경을 가진 것으로서 크게 네 개의 군(群)을 이루면서 일렬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 목책은 선박 출입을 통제하고 우리 선박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서 1510년(중종 5년) 5월 이후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목책 사이에 쇠사슬로 차례차례 연결하였고 동아줄로 매달아 적선이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일종의 방어용 도구로 현재 검문소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제덕만에 목책을 설치하게 된 것은 삼포왜란 당시 왜적들이 조선 선박을 불태워 버린 것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것이다. 즉 적선이 출입을 하려면 일단 목책을 통해 통제를 하였다. 그에 반해 조선 수군의 선박은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제덕만 뒤편에 나지막한 동산이 있는데 여기가 제포왜관지이다. 2018년에 제포왜관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1407년(태종 7년)에 왜인들의 평화적인 교역을 허용하기 위해 부산포와 내이포(제포)에 무역항을 개항하였다. 이후 울산의 염포, 고성 가배량이 개항하였다. 1426년(세종 8년)에 부산포, 염포, 제포의 3곳에만 개항하였다. 왜인들의 왕래가 늘어나면서 잦은 마찰과 알력이 생겼는데 중종 5년(1510년)에는 삼포의 항거왜인(恒居倭人)들이 대마도 왜인들의 지원을 받아 왜선 1천여 척을 동원하여 불의에 내습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 삼포왜란이다.
삼포왜관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던 곳이 제포왜관이다. 부산포의 경우 왜의 가구가 67호 인구 323명 거주, 염포는 36호 인구 131명, 제포는 308호, 남녀노소 합쳐서 1,722명이 살고 있었으며 일본인 절 11개가 있었다고 할 정도이니 어느 정도 규모인지 짐작이 간다. 왜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절에 신위를 모셨는데 그런 절이 11개가 있었다고 하니 제포왜관이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조정에서는 제포지역에 처음 왜인들의 거주를 60호를 허가 하였는데 왜인들이 계속해서 거주하게 되었다. 1494년(성종5년) 일본인이 거주한 인구는 347가구 2,500명에 이렇다고 하니 규모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부산포의 5배 ~ 7배가 넘고 염포에 비해 13배 ~ 19배가 더 많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 제포왜관이었다. 1,700명 규모는 현재 시골의 면사무소 인구 정도 되는 규모이니 적지 않은 왜인들이 거주한 동네였음을 알 수 있다. 면이야 면적이라도 넓겠지만 제포왜관 터는 그렇게 넓지 않은 편이다.
제포왜관은 조선의 또 다른 지역이었으며 재팬타운을 형성하였다. 현재 서울의 이태원과 같이 왜인들이 모여 살았던 가장 큰 재팬타운이 웅천에 있었으며 조선의 물품을 수출하고 왜인을 통해 수입품이 들어온 국제항이었다.
이렇게 제포에 왜인들이 많이 살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조선 정부에서 왜인을 통제하기 좋은 지리적인 이유였다. 즉 왜인들의 통제가 완벽하게 가능했던 곳이 제포였다. 제포왜관을 설치하고 왜인들이 많아지자 조선정부는 왜인들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껴 합포에 있던 수군진을 제포로 옮기는데 그때가 1437년(세종 19년)이다. 합포에서 옮겨온 수군진을 옮기자마자 수군진에 성을 쌓았다. 1485년(성종 16년)에 다시 쌓기 시작하고 1486년(성종 17년)에 제포진성을 완성하였다. 조선조정은 수군진을 합포에서 옮겨오고(1437년(세종 19년)) 나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웅천에 읍성을 축성한다. 그 시기가 1439년(세종 21년)이다.
이렇게 수군진과 웅천읍성을 축성하였음에도 왜인들은 웅천까지 나오자 왜인들을 막기 위해 제포에서 웅천으로 넘어오는 웅신고개를 중심으로 토성을 축성하게 되는데 1507년(중종 2년)이다. 제덕토성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하였다.
이렇게 수군진과 토성으로 왜인을 격리하였지만 왜인들은 웅천읍성 남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평역까지 나와 물건을 팔기도 하고 조선의 물건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시간이 지나면서 단골이 생기고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동업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날 정도였다고 하며 1509년(중종 4년) 사헌부 감찰 박전의 보고를 보면 “웅천읍성 보평역의 왜인 남녀가 장사를 목적으로 우리 민가에 들어가 밤낮없이 왕래하니 친하기가 형제와 같다”며 왜인과의 접촉을 우려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보평역 주변의 조선인과 왜인은 서로 친하게 지내며 형제와 같이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다음해인 1510년(중종 5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났으며 왜인들은 제포진성을 점령하고 웅천읍성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
웅천을 짝사랑한 왜인들은 거리가 가까운 부산보다 제포에 더 많은 왜인들이 살았으며 거대한 재팬타운을 형성하였다. 반대로 조선은 웅천을 지키고자 하였다.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바다에는 목책으로 통제하고 육지에는 조선수군의 제포진성과 제덕토성을 쌓고 그것도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웅천읍성을 축성하여 왜인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삼포왜란 이후 부산포와 염포는 폐쇄하고 제포왜관만 왜관으로 사용하였다. 1541년(중종 36년) 제포에서 조선의 관병과 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제포를 폐쇄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겨간다. 당시 경상우수영이었던 제포는 만호진으로 강등하고 경상우수영은 가덕도로 옮겨간다. 이렇게 되자 교역을 불만을 품은 왜인들은 교역축소에 불만을 품은 1544년(중종 39년) 통영 사량진을 약탈한 사량진왜변을 일으키고 1555년(명종 10년)에는 남해안 일대를 대규모로 약탈하는 을묘왜변을 일으킨다.
해류를 타고 대마도의 왜인들은 한나절이면 조선의 남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대마도에서 부산포를 가는 것보다 제포로 가는 것이 힘이 적게 들고 빨리 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왜인들은 가덕도를 지나 제포로 접어들면 보이는 것이 시루봉이다. 그 시루봉에 뾰족하니 솟아올라있는 시루바위는 바다에서 보면 한 눈에 보이는 랜드마크와 같은 곳이라 왜인들 입장에서는 찾기가 편하였다. 시루바위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웅천을 내왕하는 통역관을 사랑하게 된 기생 ‘아천자’가 이 바위에 올라 대마도를 바라보며 기약 없이 떠난 님을 그리워했다는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대마도가 보이기도 한다.
주목을 해야 하는 것은 1407년 부산포와 함께 제포는 국제항으로 개항을 한 것이다. 이후 600년이 흐른 2008년 6월 진해시청 대회의실에서 진해항 개항 600주년 기념 국제항만학술대회가 열렸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2007년이 600주년이 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만 제포항이 아닌 진해항으로 이야기하였다. 제포와 부산보다 늦게 생긴 염포(울산)는 1418년(세종 초년)에 개항을 하게 되는데 2018년에 개항 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개항 600년! 끼와 멋 주민화합과 소통의 장'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행사는 4회째로 삼포개항지인 염포의 의미를 되새기고, 주민들의 화합과 소통을 위해 진행하였다.
2019년 마산항이 개항한지 120주년이 되는 해로 창원시에서는 기념식, 기념행사, 역사 전시회, 학술행사, 기록서 발간 등 각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마산항의 역사와 정체성을 알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한다고 하는 것에 비해 이보다 역사가 오래된 제포항 개항 610주년 행사는 관에서도 민간에서도 준비를 하지 않았고 기념식이 진행 되지 않았다.
개항(開港)이란 '항구를 개방하여 외국 선박의 출입을 허가함으로써 인적 물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것' 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 항구의 개항 역사인 제포를 그냥 버려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울산의 염포와 부산의 부산포는 600주년 행사를 진행하거나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것에 비해 제포는 너무나 조용하다.
지난 2018년 4월 17일부터 7월 8일까지 웅천도요지테마전시실에서 ‘제포 수중 유적 발굴, 그 20년의 여정’ 테마전을 개최하였다. 조선 초 삼포(三浦) 중 가장 큰 곳이었던 제포, 대일본(對日本) 무역항으로 역할을 수행한 제포의 수중유적 발굴 유물을 전시함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국제 무역항으로 역할을 수행했던 제포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웅천도요지전시실 이외에는 제포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울산 염포에는 염포 개항 기념공원이 2004년 개설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개설된 초량왜관을 기념하는 초량왜관 연구회의 연구와 복원 사업은 시작하고 있으며 관광지로 활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초량왜관 연구회는 아마추어로 130여명 구성되어 활동 중에 있다. 초량왜관 연구회는 2010년부터 시작하여 '새띠벌의 메아리'란 제목의 정기간행물을 일 년에 두 번 내고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염포보다 부산포보다 더 크게 활동한 제포왜관. 왜인들이 탐내었던 제포, 제포를 막기로 한 조선, 바로 웅천의 예전 이야기이다. 제포왜관을 기념하고 이를 연구하는 모임도 없으며 잊혀져가는 역사만 자리하고 있다. 그나마 제포왜관이 있었던 터에 웅천에서 수도로 이어지는 도로를 개설하려고 하고 있다. 이 부분에 관하여 진해시민 누구하나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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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진해에서 원고를 투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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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한일교류의 주요 지점이다보니 임나경영설의 무대로도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