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사천 쾌재정 읍성(邑城)

지난 달 사천읍성 답사 때 가본 쾌재정입니다. 쾌재정은 고려 말 도병마사를 지낸 이순이 지은 정자입니다. 이순은 최영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친 장군이었는데 이곳으로 유배를 오면서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에 쾌재정을 지었습니다. 현재는 구호리는 아주 작은 마을이고 앞으로는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쾌재정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쾌재정을 나타내는 비석과 선정비가 있었는데 이곳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쾌재정은 사라지고 없지만 쾌재정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단서들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기와이며 또 하나가 축대와 포구나무입니다. 기와의 경우 아주 두꺼운 기와였는데 이 기와를 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초기로 추정이 된다고 하더군요. 축대는 현재 농사를 짓는 곳의 경계로 보이지만 예사 축대는 아니었습니다. 포구나무는 500년 이상 되어 보인다고 하던데 그 정도는 되는지 모르겠지만 300년 이상은 되어 보였습니다. 포구나무의 경우 쾌재정이 있었을 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쾌재정이 있었던 곳은 조선시대에는 진주 땅이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는 사천시 땅입니다. 사천에서 곤양 땅을 가기 위해서 지나가는 곳이 이곳인데 이곳은 예전에 해창이 있었고 포구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곳입니다. 나룻배가 운항을 할 정도였으며 1872년 지방지에서도 도로가 표시되어져 있는 곳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사천비행장이 들어서면서 이곳은 사람들 기억에 잊혀져갔고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가면서 더 더욱 잊혀져 간 곳이 되었습니다.

쾌재정이 포구나루에 있다 보니 많은 분들과 인연이 있는데 남명 조식 선생을 비롯해 퇴계 이황, 관포 어득강, 구암 이정 선생 등이 이곳 쾌재정을 이용하였으며 조식선생은 지리산을 가기 위해 이곳 쾌재정에서 배를 타고 지리산을 갔다고 할 정도이니 이곳의 번성기가 언제인지 알 수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곳에 장암창이 들어설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 영광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쾌재정이 있는 구호리에서 장암창이 있다가 축동면 가산리로 옮겨가면서 가산창이 되었고 이 마을은 예전에 해창이 있었다고 해서 구해창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장암창이 있었을 때에는 세운선만 20척이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872년 지방지에서 본 쾌재정의 위치
▼ 일제강점기 쾌재정의 위치와 사천의 모습
▼ 현재 쾌재정의 위치와 사천의 모습
▼ 구호리 노인회관을 찾으면 쾌재정을 찾기가 편합니다.
▼ 앞에는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 축대의 경우 예전 쾌재정이 있었던 곳의 축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이곳에서 여러개의 기와를 보게 됩니다.
▼ 기와의 무게와 두께는 요즘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 빗살무늬 기와
▼ 기와의 두께가 장난이 아닐 정도로 두껍습니다
▼ 이곳에서 기와와 도자기들이 나와 해창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 암수기와 모두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 함께 답사간 선생님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꼬 계십니다.

▼ 괘재정의 유래에 관한 비석과 장암창지를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 장암창지를 표시하는 표지석
▼ 선정비는 오래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돌이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서 관리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 500년 푸조나무가 이곳의 흔적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 푸조나무와 비석, 선정비 그리고 고속도로
쾌재정의 이야기는 좀 더 나올 것 같네요.



덧글

  • 역사관심 2019/04/11 06:03 #

    비만 서있고 아무런 관리도 안 되있는 느낌이네요..
  • 팬저 2019/04/11 10:03 #

    예... 맞습니다. 거의 관리가 안되고 있었으며 좀 더 신경을 써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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