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북동 백영월의 이야기에 관하여 읍성(邑城)



창원 북동에서 북면으로 가는 옛날 길에 있는 것 중 하나가 “퇴기 백영월 영세 불망비”입니다. 이 불망비는 백영월이라는 기생의 업적을 높이 여겨 비석을 만든 것으로 의창동(행정구역이고 의창동 안에 북동, 동정동, 중동, 소답동 등 많은 동이 있습니다)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백영월이라는 인물은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백영월에 관해서 창원향토문화전자대전을 살펴보면 “ 백영월의 구체적인 행적은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생으로 돈을 모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마을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일본군 간부를 상대로 하는 기생 또는 첩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독립군을 자신의 집에 숨기기도 하였는데, 백영월이 상대하는 일본군 간부가 워낙 거물이라 가택수색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미상이다. 북동마을에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하여 마을 발전에 큰 몫을 하는 한편 주민들에게도 큰 혜택을 주었다.”라고 적혀져 있으며 많은 이들이 이 내용을 믿고 있습니다. 

저는 이 백영월에 관한 내용을 들은 지 1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만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뜻 그 분의 생애를 보니 1854년에 태어나 1921년에 작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1854년 출생이라면 1874년에 21살이 됩니다. 그런데 기생은 보통 15세 이전에 관기로 들어가 훈련을 받습니다.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백영월에 관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백영월은 3~4세 때 당시의 창원시 북동마을의 유지였던 하유언의 집 대문 앞에 버려졌다. 이에 하유언이 양녀로 받아들이고는 수소문하여 백영월의 본 수원백씨(水原白氏)를 찾아주었다. 18세까지 하유언의 집에서 살다가 19세 때 가출을 하였다.”

여기서부터 제 추정입니다. 일단 위 내용에 나오는 19세 때 가출을 한 것을 본다면 관기로서의 생활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민기(民妓), 약방기생, 상방기생이라는 이야기인데 19세 때 집을 가출하였다면 기생으로 입문은 상당히 늦다고 봐야하는데 이 부분도 조금 애매합니다. 또 관기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가 되지만 기생들은 생계를 위해 암암리에 진행을 해왔으며 1908년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을 공포하면서 관기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백영월이 활동하는 시기는 1874년부터 1900년이라 상당히 격동적인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 기생이 아닌 다른 일을 하여 돈을 많이 번 것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기생은 일찍 시작합니다. 10살 이전부터 시작하기도 하는 것에 비해 백영월은 19세 때 가출하였다고 하며 기생을 시작하였다면 19세인데 이때에 시작하면 너무 늦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이나 시, 예를 배운다고 하여도 적어도 25세 정도인데 이정도 나이라면 기생으로 너무 늦은 나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어떤 자료에는 “백영월 16세에 가출하여 기생교육을 받고 19세에 관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30세까지 기생 일을 하다 김종진이란 이방직책을 가진 사람과 눈이 맞아 관기 생활을 접고 그 집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 부분도 상당한 의문이 있습니다. 만약에 기생으로 갔다면 관기가 아닌 민기((民妓)민간에서 행하는 기생)으로 생활하였다가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돈을 많이 모았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기생은 소위 이야기하는 기생호적부인 기적(妓籍)에 오르는데 이 기적부는 마르고 닳도록 사용합니다. 춘양전을 보면 신관 사또인 변사또가 부임하면서 기생들의 인원과 명단을 파악하면서 기생점고(妓生點考)를 하면서 기생들을 하나, 하나 부릅니다. 이때 나오는 것을 들어보면 이름 앞에 뭔가를 부릅니다. 행수기생 월선이, 우후 동산의 명월이 등 하면서 나옵니다. 기생이 기적에 오르면 관비 신세로 전락해 면역(免役:늙어서 역을 면제받음)할 때까지 관기로 생활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가 엉망이라고 해도 구한말이지만 이방에게 관기가 첩으로 간다.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힘이 드네요. 뭔 관기가 아닌 민기(民妓)라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관기라면... 글쎄요. 이해하기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관비나 노비가 쉽게 해방되는 방법은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도망을 가면 추노꾼이 쫓아오는 방식입니다. 하물며 사노비도 아닌 관비는 추노꾼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구한말로 가면서 이런 부분도 잘 행하지 않았다고는 합니다. 

또 창원향토문화전자대전에 나오는 이야기도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을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일본군 간부를 상대로 하는 기생 또는 첩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독립군을 자신의 집에 숨기기도 하였는데, 백영월이 상대하는 일본군 간부가 워낙 거물이라 가택수색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미상이다.”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일제강점기 독립군이 활동하였다고 하는 시기는 적어도 1910년 이후라는 이야기입니다. 1910년이면 백영월의 나이는 한 갑을 바라보기 이전인 57살이 됩니다. 1915년이면 62살이 되는데 일본군 간부의 첩이라 가택수색을 받지 않았다는 대목도 이해하기가 힘이듭니다. 50이 넘었다면 적은 나이가 아닌데 일본군 간부로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일본군 간부를 상대로 하는 기생 또는 첩이라는 대목에서 이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사실 여부는 미상이다”라고 하였지만 제가 볼 때에는 너무 부풀려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 

주민들에게 많은 재산을 기부하였다는 부분에 관하여는 저는 폄하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였기에 주민들이 마을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불망비를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내놓았다고 하는 부분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혀져 있는 내용들이 상당한 의문이 들고 있으며 일본군과 독립군의 이야기는 없는 사실을 너무 부풀리고 있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 비석을 해석해 놓았는데 "'읊어 이르길, 북동 사람들의 삶을 구한 공이 있어, 베푼 덕을 밤낮으로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해, 우리는 어진 여인의 공적을 갚고자 천주산 남쪽 기슭에 한 빗돌을 세운다.'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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