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포해전의 장소는 진해 학개일까? 임진왜란



이순신타워가 들어서는 곳 바로 아래에 있는 곳이 수치, 행암, 학개라고 하는 곳입니다. 행암은 진해사람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학개는 합포해전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 합포해전 안내판이 있다고 하던데 저는 보지를 못했네요. 문제는 이 합포해전이 일어났던 곳이 학개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너무나 많은 의문점이 있는 곳이 바로 학개입니다. 현재 학개에서 일어난 합포해전이라고 주장하시는 분은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이십니다. 이순신 연구에 있어서 상당히 탁월하신 분들이라 그 주장에 동의하여 디지털창원문화대전에 기록되어져 있으며 창원시에서도 합포해전이 일어난 곳이 학개라며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마산 땅인 용마산에서 합포해전이 있었다고 주장하신 분은 이은상과 이순신이 싸운 바다의 저자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입니다. 학개에서 합포해전이 일어났고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황정덕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장이십니다. 현재 작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학개에서 합포해전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주장은 합포라는 지명이 창원 땅 합포가 아닌 웅천 땅 합포라고 적혀져 있는 점과 “오후 4시에 출발하여 해질 때까지 도착할 수 있는 곳은 학개뿐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웅천 땅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웅천 땅에 있는 합포와 비슷한 지명을 찾다보니 학개가 나왔는데 제 생각에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학개라는 마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현재 가보아도 그 곳은 가구 수가 10가구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진해 인구 18만 명인데도 10가구가 살지 않았는데 당시 1만 5천 인구인 웅천에 그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현재 학개 땅은 진해 중에서 오지 중 오지입니다. 학개가 합포해전지라고 해서 제가 학개를 처음 찾아간 것이 2007년입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도로가 개설 된 것이 아니라 왕복 1차선이 전부였습니다. 한 차량이 지나가고 나면 반대편 차가 지나가는 좁은 도로가 세상 밖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말 그대로 오지 중 오지였습니다.  그런 오지에 임진왜란 당시에 주민들이 살았으며 그 지명이 그대였을까? 하는 의문은 계속해서 듭니다.

두 번째 의문점이 시간과 거리입니다. 영등포에서 나와 학개까지는 직선거리 대략 8km가 되지 않습니다. 오후 4시경 왜군을 쫓아 해질녘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합포해전이 벌어진 것은 1592년 5월 7일입니다. 양력으로 전환하면 1592년 6월 16일입니다. 6월 16일은 하지인 6월 21일인 날과 얼마 남지 않은 날입니다. 잘 알다시피 하지는 1년 중 해가 가장 긴 날입니다. 하지에 해가 지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7시 45분 사이됩니다. 합포해전이 일어난 날은 하지보다 5일이 빠르며 합포해전 당일 해가 지는 시간은 대략 7시 40분 전후가 됩니다. 
당시 판옥선은 시속 5 ~ 6km로 갔다고 하면 영등포에서 학개까지 거리는 직선거리로 대략 7.3km 정도가 됩니다. 대략 1시간 ~ 1시간 30분이면 영등포에서 학개까지 도착이 가능합니다. 늦어도 학개까지 대략 5시 30분 전후에 도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해질녘인 7시 30분이라면 아직 2시간이 더 남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학개가 아닌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등포에서 용마산이 있는 합포까지는 직선거리 대략 23km정도가 되며 판옥선 기준으로 한다면 4시간이 소요되는 먼 거리가 됩니다. 영등포에서 4시에 출발하였다면 해질녘에 겨우 도착할 수가 있는 거리입니다. 마산 합포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이 시간대를 이야기하며 창원 땅 합포가 아닌 웅천 땅 합포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뭐 그렇게 가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찝찝한 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해가 지고 나서 바로 남포(마산합포구 구산면 난포리)로 가서 숙영을 하게 되는데 학개에서 난포까지는 10km가 되며 용마산에서는 18km가 됩니다. 학개에서는 1시간 30분, 용마산에서는 3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학개에서는 출발하면 시간이 남고 용마산에서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저녁밥을 먹은 것을 기준으로 하면 학개에서는 해가 지기 전에 밥을 먹었고, 용마산에서는 출발하였다면 밤 12시가 넘는 시간입니다. 용마산에서 출발하였다면 너무 진이 빠지는 상태가 되며 학개라면 너무 일찍 밥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학개와 합포(용마산 부근)이 아닌 다른 장소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마산시의 경계는 봉암까지이며 구.창원시는 귀산동까지입니다. 구.진해시는 해군사령부에서 안골포까지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웅천 땅은 현 창원 5부두와 두산중공업, 귀산동까지입니다. 그에 비해 창원시 성산구 신촌은 조선시대에 창원 땅이었습니다. 일단 저는 진해해군기지사령부, 귀산동, 두산중공업 공장 3군데 중 하나가 합포해전이 있었던 곳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창원 땅 합포로 하지 않고 웅천 땅 합포라고 한 것은 창원 땅은 아닌 웅천 땅이지만 지명이 없는 관계로 웅천 땅 합포로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이 현재 합포해전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합포(合浦)는 저번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중국의 허푸(合浦)지역입니다. 후한서에 적혀있기를 “환주합포는 진주조개가 합포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다. 옛날 중국의 전한(前漢) 때 맹상(孟嘗)이라는 사람이 진주조개가 많이 잡히는 합포―중국 남쪽 광시(廣西)자치구 허푸[合浦] 남쪽에 펼쳐진 베이부 옴팡바다[北部灣] 일대―의 태수(太守)로 갔을 때 이야기이다. 값비싼 진주를 탐낸 많은 수령(守令)들이 진주조개를 마구 채취한 탓에 진주조개들이 모두 이웃 고을로 옮겨갔는데, 새로 부임한 맹상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자 마침내 진주조개가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환주합포입니다.

▼ 1950년 창원 귀산동일대로 현재 매립된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조선시대 웅천 땅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

그래서 합포라는 지명을 가져오면서 백성을 잘 다스리겠다는 환주가 따라오게 된 다는 의미로 합포(合浦)라는 지명을 가져왔으며 신라 왕실에서 지은 역사적 명칭인데 이게 갑자기 한글로 풀어서면서 합개가 합포로 바뀐다는 것은 저로서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합포와 합개(鶴浦)는 한문이 다릅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진해에 있는 합개를 가본다면 저기가 포구로서 기능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지금이야 도로가 발달이 되어 차로 이동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배에서 잡은 물고기를 옮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 진해에서 이야기하는 합포해전은 이래 저래 더 많은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에 대한 조사가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진해에서 이야기하는 합포해전은 이래 저래 더 많은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도 2007년에는 이은상씨와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과 같이 용마산에서 합포해전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만 창원 땅 합포가 아닌 웅천 땅 합포라는 것에 주목하여 진해해군기지사령부, 귀산동, 두산중공업 공장 3군데 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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