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읍성 동헌이 성산관이 된 이유는? 읍성(邑城)



성주읍성내 있는 동헌인 성산관입니다. 동헌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성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이게 한 번 이전을 하는데 현재의 군청 자리로 이전을 합니다. 이 시기가 1657년(효종 8년)이라고 하며 그러다 6,25전쟁때 소실이 되었으며 소실된 동헌을 다시 복원을 합니다. 1994년 현재 군청을 확장하면서 원래 있던 동헌은 군청 뒤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현재 보이는 동헌은 군청에 있던 동헌이 옮겨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소의 경우 성주초등학교 자리에서 지금의 군청자리고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현재 동헌의 명칭은 현재 성산관(星山館)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성산은 성주(星州)의 산이라는 의미이니 성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헌은 보통 근민헌, 안민헌, 제민헌, 평근당, 청녕헌 등 백성을 위하겠다는 각오와 같은 것을 당호로 사용하는데 성주에는 성산관이라고 하는 객사에 어울릴 것 같은 당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단 동헌 당호에 사용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청녕헌(淸寧軒) 하늘의 뜻은 맑음으로 얻고 땅의 인심은 평안으로 얻는다. 
평근당(平近堂) 백성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리겠다.
안민헌(安民軒)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겠다. 
제민헌(濟民軒)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겠다. 
근민헌(近民軒) 부지런히 민심을 살피겠다.
청민당(聽民堂) 백성의 소리를 듣겠다

이렇게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되돌아가서 성주동헌의 당호는 원래 청민당(聽民堂)입니다. “백성의 소리를 듣겠다!는 각오가 적혀져 있는 것이 성주동헌의 당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청민당이 아닌 성산관으로 바꾸게 된 것은 1950년 6·25전쟁 때 군청의 청사가 전소되어 청사를 다시 지으면서 성산관도 새로 복원하였는데 이때 성산관이라는 현판을 현액하면서 당호를 성산관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즉 예전부터 내려오는 당호가 아니라 6.25 전쟁 후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성주군청 뒤에 성산관이 있는데 이 성산관을 찾으러 몇 번이나 돌아다녔는데 없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성주군청 뒤편으로 가볼까? 하고 가보니 성산관이 있더군요. 문은 잠겼을까? 하는 마음에 가보니 닫아만 놓았더군요. 그래서 협문을 열고 성산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성산관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지붕 집으로 되어져 있으며 오른쪽 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로 되어져 있더군요. 보통 동헌은 왼쪽에 1칸, 오른쪽에 1칸으로 되어져 있는데 성산관은 오른쪽에 2칸의 방이 배치되어져 있었습니다. 동헌의 계단이 없는 것이 조금 이상하며 성산관 뒤편에는 하마석(下馬石)이 보이더군요. 대청마루에는 절제아문 현판이 있는데 이것도 6.25 전쟁 후 현액한 것입니다. 성산관의 특징은 주춧돌이 높고 마룻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올라와 있는 고상식(高床式)구조가 특징입니다. 이렇게 고상식 구조를 한 것은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성산관 앞 내삼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 자동차가 주차를 하고 있었으며 문도 잠겨져 있어서 관광객들이 성산관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제가 성산관에 가보지 않고 글을 작성하였는데 당시에 성주 객사인지 동헌인지 헷갈린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건물의 규모를 보면 동헌이 맞는데 당호에서는 객사에서 어울리는 당호라 헷갈린다고 하였습니다. 현장을 가보니 동헌은 맞는데 동헌치고는 규모가 작았습니다. 원래 작은 것이었는지 새롭게 복원을 하면서 작게 만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산관이 현재 성산군청 뒤편에 자리하고 있어서 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새롭게 축성하고 있는 성주읍성 북문 근처로 옮기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닌가?

성주동헌에 관련된 한시(漢詩)가 있는데 남재가 지은 성주 동헌입니다. 남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하여 조선개국 공신이 된 분입니다. 

星州東軒1(성주동헌1) - 남재(南在)

萬事年年鬢雪加(만사년년빈설가) 모든 일에 해마다 귀밑 눈 더해
韶華正似隙駒過(소화정사극구과) 화창한 봄 참 같기 틈내 나귀로
百花軒上重遊日(백화헌상중유일) 온갖 꽃 집에 올라 거듭 노는 날
金井秋桐意緖多(금정추동의서다) 금 우물 가을오동 꺼낼 뜻 많아

星州東軒2(성주동헌2) - 남재(南在)

花開花落鬢霜加(화개화락빈상가) : 꽃 피고 지더니 살쩍에 서리 붓고
百歲春光一鳥過(백세춘광일조과) : 백년 세월에, 새 한 마리 지나간다
此日此軒還寂寞(차일차헌환적막) : 이 날, 이 집이 다시 또 적막해지고
滿園疏木夕陽多(만원소목석양다) : 동산에 가득한 성긴 나무에 석양이 짙다

▼ 성산관의 모습으로 그날 비가 조금 와서 그런지 사진상태가 깨끗하지 않습니다.
 내삼문은 열리지 않았으며 원래 있었다면 저렇게 동헌 옆으로 삼문이 날 가망성이 없는데 성주군청을 옮겨오면서 장소가 비좁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 난간이 왜?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뭐 협방과 상방 앞이라면 그래도 조금 이해를 하겠지만 대청마루 앞에 왜 저렇게 있는지 아직도 이해불가입니다.
 성산관의 특징이 바로 고상식(高床式)구조인데 그 구조를 알 수 있는 사진입니다.
 편액은 성산관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절제아문이라는 현판이 보입니다. 절제아문 현판도 6.25 전쟁후 헌액한 것입니다.
 우물정(井)자 모양의 마루바닥입니다.
 동헌에서 보면 협문을 통해 나가야 성주군청이 나옵니다.
 동헌이라면 계단과 함께 난간이 없어야 하는데 성주읍성 동헌인 성산관에는 있더군요. 이 부분은 암만봐도 고증에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저 상태라면 사진 위에 나오는 것처럼 옆으로 계단을 이용해야하는데 수령의 권위에 어울리지 않는 계단입니다.

 성주동헌에는 방이 2개가 있습니다. 이는 다른 동헌에 있는 것과 위치가 다릅니다. 보통 좌측과 우측에 각 1개씩 있는 것에 비해 성주동헌은 좌측에 방이 2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좌측에 있는 방은 보통 협방이라고 하는데 통인이나 급창들이 근무하는 곳입니다. 통인이나 급창들은 고을 수령의 심부름을 하는 청소년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비서정도 될 것입니다.   
 고을수령이 근무하는 상방입니다. 옆에 보이는 문은 성산관을 출입하는 문인데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에서도 적어 놓았지만 고을 수령이나 통인 등이 많이 출입하는 성산관인데 대청마루 앞으로 출입을 하지 않고 옆으로 출입하는 구조를 만든 것은 암만해도 고증에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장소가 좁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진으로 이정도면 재판받는 것도 쉽지 않아보입니다.
 동헌의 담장은 1~2.5미터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상방 옆의 모습으로 툇마루가 보이더군요.
 하마석으로 보여지는 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툇마루 아래편에는 아궁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산관 뒷편은 굴뚝이 있으며 툇마루도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툇마루는 ㄴ자로 꺽어져 있습니다.
 툇마루의 크기와형태를 알 수 있습니다.
 전체가 다 나오게 앵글을 잡은 것
 담벼락 옆에 배수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협방과 상방에 달리는 문과 대청마루에 달리는 문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담은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협문으로 나가서 찍어본 사진입니다.
 성주군청에서 성산관을 올라갈때 사용하는 협문입니다.
 내삼문이 있는 것을 가보니 자동차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어서 내삼문 전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성주 성산관에 대한 안내문인데 왜? 성산관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예전 성주에 있는 동헌에 관련된 글중 성주군 성산관은 동헌일까 객사일까?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