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원포리가 합포해전지인 이유는 이순신이 장계에서 웅천지 합포, 즉 웅천땅이라고 했고, 또 不遠海中 즉 멀지 않는 바다에 적선들이 있다고 했으므로 그 멀지 않는 바다란 이순신 함대가 추격 가능한 바다, 즉 영등포와 그 바로 위의 원포리 사이의 바다가 되며, 따라서 그 바다에서 일본 함선들이 도망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웅천땅 포구는 원포리 밖에 없다. - 정진술 <조선수군의 임란 초기대응에 관한 연구>,<해양연구논총> 제25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0.12
여기서 합포는 임진장초에서 밝힌 바와 같이 웅천(현재의 진해시) 땅에 있는 합포이고, 이은상과 이형석 등이 마산 합포로 비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오후 4시부터 추격하여 해질녘에 상륙이 가능한 곳은 웅천 합포 외에는 불가능하다. 둘째 현재까지 진해에 합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셋째 임진장초에는 창원땅 마산포(고려시대 합포)라는 지명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02), <임진왜란 초기해전연구 1>해양연구논총 제39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2007.5)
임진장초에 웅천땅 합포라 하였으므로 진해시 행암동 학개를 가르킨다. 한자로는 鶴浦로 쓰며, 소리 내면 합포가 되므로 合浦로 써서 마산의 옛 이름과 혼동을 잘 하고 있다. - 황정덕 <이충무공과 진해> 이순신연구논총 제7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2006,12)
임란 해전에 관한 초기 연구자들이 합포라는 지명에 대해 별 다른 고증없이 합포-마산이라는 위치 비정을 단순하게 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합포해전의 상황을 기록한 이순신의 장계의 의하면 분명히 웅천땅 합포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현재 진해구 원포동 학개마을로 비정하는 것이 정설이다. - 제장명 <임진왜란 초기해전 연구의 주요 쟁점 검토> 충무공 이순신과 한국해양 제3호,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2017.2
현재 합포해전지가 진해 학개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의 이야기가 적혀져 있는 논문들입니다. 하나 하나 반박을 해보겠습니다.
정진술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즉 멀지 않는 바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일본 함선들이 도망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웅천땅 포구는 원포리 밖에 없다”라고 단정을 하였습니다. 왜 원포리 밖에 없다고 단정을 하죠. 웅천땅 포구는 원포리가 있었는지 아닌지도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그에 비해 제포에는 웅천 선소와 제포 선소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 논문이 정확한 부분을 유지하려면 임진왜란 당시 원포리와 학개에 포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셔야 됩니다. 그냥 말로 원포리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작고한 황정덕 선생이 鶴浦가 소리내면 합포가 되므로 合浦가 맞다고 해버리면, 경상도 발음으로 안되는 것이 몇 개 있을까요? 무엇보다 鶴이 合이 되는 이유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민웅 교수가 이야기한 해질녘에 상륙 가능하다는 부분은 제가 이야기한 부분을 반박을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분명히 웅천땅 합포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현재 진해구 원포동 학개마을로 비정 하는 것이 정설이다.”라고 이야기하였는데 학개마을이 당시 임진왜란 당시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合浦라는 지명은 조그마한 마을에 부착하기 힘든 지명입니다.
신라 초기에 현 마산쪽 지명이 골포현(骨浦縣)이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합포
(合浦)로 고친 것에 관하여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合浦라는 것은 옛 지명이지만 동래, 웅천, 창원, 고성과 같이 큰 지역에 사용되는 명칭이라는 것입니다. 합포라는 것이 가까이 있는 지명인데 진해에 헷갈릴 수 있는 학개가 합포로 지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동지도에 나온 웅천의 산과 바다, 섬, 절, 저수지, 역, 선소, 고개, 향교 등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한글 표기는 팬저)

조선전도에서 본 웅천

조선전도 이미지출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한글 표기는 팬저)



두 개의 고지도를 토대로 선소를 표기한 현재의 지도 이미지출처 :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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