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는 서기 676년부터 시작하여 서기 900년에 마무리가 됩니다. 이후 고려가 서기 918년부터 시작하여 1392년까지 시대를 이어갑니다. 이후 1392년부터 조선이 개국합니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에 다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그럼 합포라는 지명이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요? 바로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처음 등장합니다. 합포라는 지명 이전에는 골포라는 지명으로 사용하였으며, 합포라는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는 저번에 이야기하였습니다. 고려가 개국을 하여도 합포라는 지명은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몇 번 영현이 바뀌기는 하지만 지명은 그대로 합포로 사용이 됩니다. 이후 1282년 합포가 아닌 회원현으로 승격이 됩니다.
회원이라는 새로운 현이 되면서 합포라는 지명이 행정적으로 사라집니다. 이렇게 합포라는 지명으로 남은 것이 무려 525년입니다. 조선이 1392년 개국하고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이 518년이었습니다. 조선이라는 국호보다 오랫동안 사용한 것이 바로 합포(合浦)였다는 것입니다.
마산과 창원 그리고 진해가 합쳐서 창원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통합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마산과 창원, 진해라는 지명은 그래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통합이 된 합천의 경우 합천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초계, 삼가, 합천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합천뿐 아니라 산청의 경우도 산청과 단성, 창녕의 경우도 창녕과 영산, 함안의 경우 함안과 칠원 이렇게 따로 지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려 10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죠. 위에서 말한 지역민들은 자신의 지역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OO지역을 이야기할 때 자신이 사는 OO사람이라는 점을 상당히 강조를 합니다.
지금은 정보라도 많이 주고받는 상태이며 금방이라도 건물이 초고속으로 올라가 세상이 바뀌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같이 많은 변화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시대에 525년을 합포라고 살아왔으며 그 주변의 도시나 마을에서도 합포라는 것을 다 아는 세상에 바로 이웃 도시에 똑 같은 지명인 합포(合浦)가 있었을까요?
합포해전이 벌어진 곳이 지금의 합개라고 주장하시는 이순신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금주(김해), 밀성(밀양), 양주(양산), 동래 등의 고을 옆에 똑 같은 지명을 가지고 있는 고을이 있는지를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기에 이순신 장군이 합포해전을 치루고나서 상세기록을 적기를 웅천 합포라고 한 것입니다. 즉 합포 앞바다인데 그 지역의 지명을 모르기에 합포라고 적은 것이고 합포라고 하면 현 마산측에 있는 합포라고 생각하기에 웅천 땅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 합포해전지가 진해 학개였다는 것이 맞다면 지금이라도 창원시는 진해 학개에 수중발굴을 실시하기 바랍니다. 진해 학개가 합포해전지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학개가 포구였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구였다면 최소한 배를 묶어둘 수 있는 계선주(繫船柱)가 있을 것 아닌가요?
합포해전지를 정확하게 찾아가는 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발제자와 토론자가 나와서 합포해전지가 합개라고 정의내리는 것은 너무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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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학개에서는 합포승전길을 비롯하여 합포해전 승전지라는 안내판도 부착이 되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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