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유소습격사건>에 나오는 무대뽀는 싸움이 벌어질때 하는 이야기 "나는 한 놈만 팬다" 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도 한 놈만 패려고 합니다. <합포해전>말입니다.
전 국민이 다 안다고 하는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오죠 "세종실록지리지 50쪽 3째줄"말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웅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웅신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웅신현 호구수는 63호 318인이었다고 말이죠.

세종실록지리지는 1454년(단종 2년)에 편찬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1592년이고 합포해전이 있었던 날은 1592년 5월 7일(음력 기준 양력은 6월 16일)입니다.
138년 만에 웅천의 인구가 폭팔적으로 늘어나서 합포해전이라고 주장하는 학개에 마을이 생기고 지명이 생겼을까요? 인구가 1,500만명이라고 하는 일제강점기에도 두 가구만 있는 곳이 학개인데 말이죠.
웅신현말고 진해에는 완포현이 있었는데 완포현의 인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179명이라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진해구 인구가 세종때에는 497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완포현에 수군이 있었는데 선군(船軍) 840명, 영진군(營鎭軍) 120명, 군정(軍丁)ㆍ시위군(侍衛軍) 47명 총 1,007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수군과 인구 수를 합치면 1,504명이 됩니다. 1,504명중 조선수군의 수가 1,007명이니 전체인구에 군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66.9%이니 얼마나 군사적인 도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창원도호부의 호수는 1천 94호, 인구가 4천 9백 55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2명, 영진군(營鎭軍)이 1백 19명, 선군(船軍)이 6백 89명이다라고 적어 놓고 있습니다. 창원은 당시 현재의 창원과 마산을 합친 것인데 인구수는 4,955명 대략 5,000명입니다. 군사의 경우 다 합치면 890명입니다. 비율은 17.9%입니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웅천이 얼마나 군사적인 도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종때 318명이었다면 웅신현과 제포, 안골포, 가덕에 살면 끝일 것 같습니만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는 어떠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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