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시대 합포의 관할지 중 하나가 완포향(莞浦鄕)입니다. 완포는 현재 창원시 진해구 진해 해군기지사령부가 있는 곳입니다. 현재도 해군이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포구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향(鄕)은 신라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특별 행정 구역으로 주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던 마을을 이야기합니다. 고향(故鄕)의 향과 같은 단어입니다. 고려 때 합포현이 관할하던 곳이 완포향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고려 때에는 지금의 진해 서부지역을 합포가 관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완포가 1281년(충렬왕 7)에 완포현이 되게 됩니다. 저번에도 이야기하였지만 1282년 합포는 회원현으로 승격이 됩니다. 그런데 그보다 1년 전인 1281년에 합포의 관할지인 완포향이 완포현으로 승격이 됩니다.
이게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합포가 왜?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합포라는 것을 마치 공중폭파 시키는 것처럼 없애버리려고 하였을까요? 합포현이 있던 곳은 회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관할지였던 완포는 현으로 승격을 시켜주어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한 것은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1281년(충렬왕 6년)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여몽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합포였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였던 합포의 관할지인 완포향은 현으로 올라가고 합포는 회원으로 이름이 변경이 됩니다.
이후 조선이 개국이 되어도 완포현은 그 명칭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현의 기능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1451년(문종 1년)에 웅천현에 속현이 되어 현의 기능은 사라집니다. 즉 170년간 현의 기능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의 기능을 해서 그런지 오랫동안 완포라는 지명은 살아남았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 법정동은 현동이고 행정동은 여좌동입니다.
완포현이 현으로 승격이 되고 100년이 지난 1384년(우왕 10)에 완포현의 뒷산에 왜구의 잦은 침입을 방어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축성하는데 바로 완포현 고산성입니다. 이 고산성에 동, 서, 북문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안이라 일반인의 접근이 허락하지 않는 지역입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87호로 지정 되어져 있습니다.
완포에 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적혀져 있습니다. “완포는 조선시대에 수군의 중요한 기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선군(船軍) 840명, 영진군(營鎭軍) 120명, 군정(軍丁)ㆍ시위군(侍衛軍) 47명이 있어 이곳의 주민 1,079명과 거의 같은 숫자가 되었다.” 라고 적혀져 있습니다만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완포의 인구는 179명이라고 적어 놓았는 것 봐서는 백과사전이 오타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은 경상남도 웅천군읍지에서도 적혀져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완포폐현(莞浦廢縣) 현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본래 합포현(合浦縣) 완포향(莞浦鄕)인데 고려에서 현으로 승격하여 전주(全州)에 예속시켰고, 본조(本朝) 문종(文宗) 때에 본현에 내속(來屬)시켰다. 석성(石城)이 있으니, 둘레가 4천 1백 72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안에 시내 하나, 샘 둘이 있다. " 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영남읍지, 경상도읍지, 신동국여지승람에도 거리의 조금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조선 초기 문종이전에는 대발령을 중심으로 서측은 완포였으며 주민들 사이에서는 합포의 관리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진해구 서부의 지역까지 합포라는 지명이 들리는 시대에 학개라는 곳에 합포라는 지명을 사용하였을까요?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웅신의 호수는 63호, 인구가 3백 18명이며, 완포의 호수는 37호, 인구가 1백 79명이다.”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완포와 웅신(웅천)은 다르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물론 그 이후 문종때 합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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