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에서 6시 출발할 동안 왜수군은 도망을 가지 않았다 합포해전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이 지난 2020년 2월 14일 발표한 <임진왜란 시기 합포해전의 쟁점 검토>에서 "그런 상태에서 출발 명령을 받고 출전한 80여 척의 함선이 모두 출동을 완료하려면 필자 생각으로는 적게는 1시간, 많게는 2시간 정도 소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더욱이 신시가 15시부터 17시까지로 볼때 정확히 4시경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고 본다. 당시 옥포해전 시작이 정오 무렵이었으니 마친 후 영등포까지 이동시간을 고려할 경우 15시경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당시 해가 길어서 17시경에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늦게는 18시경에 출전했을 수도 있다" 

강희승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장이 토론자로 나와서 발표한 것을 보면 “지나가는 적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나 이격된 바다에 있는 작은 어선크기의 척후선은 멀리서 다가오는 적선  5척을 발견하였을 것이고 척후선은 급히 이 사실을 본진에 보고하기 위해 신속히 항해를 하여 지휘관에게 보고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보고를 받고 정박해 있던 판옥선 등을 신속히 출항시킨다고 하여도 정박해 있는 군함을 영등포에서 출항시켜서 대응을 한다면 지체되는 시간 또한 상당히 걸릴 것이기 때문에 추격전이 제대로 진행되기 까지는 2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것으로 보인다. 추격한 부대가 이순신함대의 모든 군함이 일시에 추격전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합포해전에 관하여 그동안 나왔던 논문이나 책자에 이렇게 적혀져 있다. 

1994년 최두환 교수<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완역난중일기>에서 

" 거제도는 산이 험준하고 나무가 울창하여 사람들이 발 붙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막 적의 굴속에 들어 있는데 전선에 사부가 없으면 혹 뒤로 포위될 염려도 있고, 날도 저물어 가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 머물면서 군졸들에게 마루하고 물 긷는 일을 시키고 밤을 지낼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오후 네 시쯤 "멀지 않는 바다에 또 왜대선 다섯 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이를 쫓아서 웅천땅 합포(경남 진해시 웅천 2동 학개/합개)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 가므로, 사도첨사 김완이 왜 대선 한 척을, 방답첨사 이순신 왜대선 한 척을, 광양현감 어영담이 왜대선 한 척을, 부통속 방답진에서 귀양살던 이응화가 왜소선 한 척을, 군관 봉사 변존서 · 송희립 · 김효성 · 이설 등이 힘을 합하여 활을 쏘아 왜대선 한 척을 모두 남김없이 쳐부수고 불태웠으며, 밤새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경남 창원군 구산면 남포)앞바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2002년과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박사 논문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날 옥포해전을 마친 이순신 함대는 거제도 북단에 위치한 영등포로 이동하여 정박하려 했는데, 오후 4시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 일본의 대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척후장의 급보를 받았다. 이에 이순신 함대는 곧바로 추격을 시작하여 웅천 땅 합포에 이르자 다급해진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상륙하였댜 이곳에서 두 번째 전투인 합포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순신함대는 뭍으로 올라 도망한 일본 수군의 빈 배를 모두 분멸하는 전과를 올리고, 밤중에 건너편 창원 땅 남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주석>
여기서 합포는 <임진장초>에서 밝힌 바와 같이 웅천(현재의 진해시) 땅에 있는 합포이고, 이은상과 이상석 등이 마산 합포로 비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오후 4시부터 추격하여 해질녘에 상륙이 가능한 곳은 웅천 합포외에는 불가능하다. 둘째 현재까지 진해시에 합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셋째 <임진장초>에는 창원 땅 마산포(고려시대의 합포)라는 지명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2020년 2월 14일 발표한 <임진왜란 시기 합포해전의 쟁점 검토>를 발표한 제장명 순천향교 이순신연구소소장은 지난 2018년 12월 16일 발행한 <전국 방방곡곡 이순신을 만나다>에서 합포해전에 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합포해전지
소재지 :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학개마을
합포해전은 이순신의 제1차 출전에 있었던 세 차례의 해전(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중 두 번째 해전이다. 이순신은 첫 번째 전투인 옥포해전이 끝난 후 수군함대를 거제도 영등포 앞바다에 이동시켜서 휴식을 취하고 밤을 지내려 하였다. 그러나 탐망하던 우리 척후선으로부터 적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이순신은 즉시 추격전을 지시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왜적을 쫓아 웅천땅 합포(현재 진해구 원포동 학개마을)에 이르러, 정박해 있던 일본군의 전선 5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대전은 비록 적이 정박한 곳에서 치르진 해전이라 일방적으로 조선 수군이 우세한 전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에 앞서 옥포해전에서 수 시간 동안 열전을 치른 후,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이 맹렬한 추격전을 펼쳐서 적을 물리 쳤다는데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
 한편 아직까지도 일부에서 해전 장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바로 합포라는 지명만 보곤 진해가 아닌 마산의 합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산 합포라는 주장은 일부 학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유는 <동여도>에 나타난 현재의 마산 일대에는 합포, 월영대, 마산포 등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에는 창원 땅 합포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 백과사전에서도 다음과 같이 합포해전지를 소개하고 있다. "해전이 일어난 합포는 지금의 마산이(내용 기록하지 못함 ...) 이러한 오류들은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부족한 상태에서 합포하는 명칭은 무조건 마산의 합포라는 세간의 인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장계에서 분명히 웅천땅 합포라고 기록하였다. 웅천은 임진왜란 당시 현재의 진해구역이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에 속하며, 합개 또는 학개라고도 부른다.

오후 4시라고 이야기한 것은 팬저가 아니고 최두환교수와 이민웅 교수이다. 그들이 이야기한 오후 4시에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학개까지 가보고 그 시간대가 맞는지에 관하여 작년과 올해 직접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이민웅 교수의 논문에 나온 “오후 4시부터 추격하여 해질녘에 상륙이 가능한 곳은 웅천 합포외에는 불가능하다.”라는 것은 평균적인 오후 6시를 상정한 것이다. 하지만 합포해전이 있었던 6월 16일(양력)은 평균적으로 오후 7시 41분에 일몰이다. 이민웅교수가 평균적으로 계산한 일몰 시간보다 1시간 41분이나 더 길다고 볼 수 있다. 뭐 물론 이민웅교수가 6시가 일몰이다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민웅교수가 일몰시간을 오후 7시 41분이라고 계산하였다면 합개라고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민웅 교수는 하지보다 5일 앞선 합포해전의 날 일몰을 놓친 것이다. 그래서 난포까지 이동을 하고 귀산까지 오는 것까지 시험을 한 것이며 귀산에 도착을 했어도 어둠은 시작되지 않았다. 

이러한 일몰 시간에 관하여 제 블로그에 기록을 해 놓으면서(2007년 3월 9일)의문을 제기하였다. 이후 2018년부터 의문이 생겨 2019년에 본격적으로 기록을 하였다. 그러한 부분이 반영이 되어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소장이 발표한<임진왜란 시기 합포해전의 쟁점 검토>에도 반대론자에 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2018년 12월 16일 발행한 <전국 방방곡곡 이순신을 만나다>에서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이순신은 즉시 추격전을 지시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왜적을 쫓아 웅천땅 합포(현재 진해구 원포동 학개마을)에 이르러, 정박해 있던 일본군의 전선 5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거두었다.”라고 적어 놓았고 1년이 조금 넘은 2020년 2월 14일에는 “더욱이 신시가 15시부터 17시까지로 볼때 정확히 4시경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고 본다. 당시 옥포해전 시작이 정오 무렵이었으니 마친 후 영등포까지 이동시간을 고려할 경우 15시경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당시 해가 길어서 17시경에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늦게는 18시경에 출전했을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전국 방방곡곡 이순신을 만나다>에서는 즉지 추격전을 펼쳤다고 해놓고는 1년이 조금 뒤 발표회에서는 6시에 출발하였다고 이야기한다. 1년만에 즉시 추격전을 펼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 왜수군의 세끼부네는 첨저선으로 평저선인 판옥선보다 속력이 빠르다고 한다. 판옥선이 시속 6km정도를 간다고 하면 세끼부네는 아무리 못해도 7km 이상은 갔을것이다. 조선수군이 2시간 이상 영등포에서 출항을 할 것이라고 서둘러고 있을 때 왜수군은 적게 잡아도 14km 이상을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영등포 앞바다인 초리도에서 왜수군이 도망을 갔다고 가정하면 서측으로는 마창대교까지 갔을 것이며 동측으로는 가덕도까지 가게 된다. 그만큼 먼거리임에도 조선수군이 쫓아가서 5척을 분멸하였다고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정도라면 조선수군의 판옥선이 얼마의 속력으로 가야 할까? 판옥선의 2배 속력이라고 가정을 두면 시속 14km가 된다고 해도.(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2시간이 늦은 조선수군이 왜 수군을 쫓기 위해서 속력을 낸다는 가정입니다.) 1시간 20분 정도 가야 왜 수군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 장소가 어디일까? 적어도 현재 마산의 돼지섬이라고 하는 돝섬이나 부산의 명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명지해전이 되어야 한다. 마산이 아니고 진동쪽으로 왜수군이 도망을 갔다면 합포해전이 아니라 진동해전이 될 것이다. 
그런데 희안하게 조선군이 정비를 하고 출항을 한다고 부산을 떨 동안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왜수군은 도망을 가지 않고 친절하게 기다려주었다. 조선수군이 쫓아오자 2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그제야 도망을 가다가 학개라는 곳에서 파괴가 된다. 왜수군의 헌신적인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시간 동안이나 도망을 가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은 이순신함대를 보고 오금이 저려서 그럴까?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임진장초에 신시에 적을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유시에 적을 쫓아서 파괴를 하였따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여기에 강희승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장도 가세를 하면서 합포해전은 영등포에서 즉시 출항하지 않고 2시간 동안 열심히 준비를 하였다는 것이 이제 정설로 굳어지는 것 같다. 2시간 드립은 어디서 나왔을까? 바로 일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최두환 교수와 이민웅 교수의 오후 4시에 영등포에서 출항하였다는 것으로 맞추려고 하니 전투가 끝나는 시간이 늦어도 오후 6시에 끝나게 되고 남포로 이동을 해도 7시에 도착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밤을 타고 노를 재촉하여 창원 땅 남포 앞바다로 와서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라고 하는 옥포파왜병장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후 6시에 영등포에서 출항을 하여 오후 7시에 학개에 도착을 하고 그리고 전투를 한다면 마치는 시간이 오후 7시 30분에서 8시를 두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남포로 이동을 하면 남포에 9시 정도에 도착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밤을 타고 노를 재촉하여 창원 땅 남포 앞바다로 와서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는 것이 말이 되기 때문에 오후 6시에 출항을 하였다고 주장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합포해전에 관하여는 신시(申時, 오후 3~5시) 라고 기록이 되어져 있는 것을 아니라고 하면서 시간을 맞추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위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최두환교수와 이민웅교수가 합포해전을 웅천땅 합개라는 것을 보면서 합개라고 비정한 것부터 잘못되었으며 오후 4시라고 시작한 것부터 어긋났다. 이제 세월은 많이 흘러 되돌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임진장초에 기록된 신시가 아닌 유시에 출동을 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장소에 대해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건 그 시대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까지 바꾸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부분은 선뜻 이해하기가 힘이든다. 그리고 저 시간이라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생각일뿐이다.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이순신장군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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