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목 가산창 현 사천시 가산창 조선시대

조창은 세곡의 수납·보관·운송의 세 가지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대규모 물류창고 및 세무서, 화물회사인 것입니다. 조창은 고려와 조선에 있었습니다. 고려시대를 보면 13개 조창이 있었습니다. 강원도 1곳(원주 흥원창), 충청도 3곳(충주 덕흥창, 아산 하양창, 서산 영풍창), 전라도 6곳(부안 안흥창, 군산 진성창, 영광 부용창, 나주 해릉창, 영암 장흥창, 순천 해룡창), 경상도 2곳(마산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 있었고 뒤에 황해도의 안란창을 두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에 2곳을 먼저 두었습니다. 바로 창원의 마산창, 진주의 가산창입니다. 이 시기가 1760년이며 이후 1765년에 밀양 삼랑진에 조창이 생겼습니다. 가산창은 우조창, 마산창은 좌조창이라고 하였고 삼랑진은 후조창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산창, 가산창, 삼랑진창을 합쳐서 경상도 삼조창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조창은 바닷가나 강과 같은 수로에 있었습니다. 삼랑창은 낙동강, 마산창은 바다입니다. 그런데 진주의 가산창은 어디일까요? 현재 진주는 바다가 없습니다. 그러면 진주에 있는 남강을 따라 조창을 만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진주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뭔 소리야~ 진주에 뭔 바다가 있노?”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진주시는 바다가 없습니다만 조선시대 진주목은 바다가 있었습니다. 현재 사천시 축동면 일대가 예전 진주목의 땅이였습니다. 여기말고 삼천포의 일부가 있었고, 현재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창선도가 진주목의 땅이었습니다. 상당히 큰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경상도의 목이라 큰 것 같습니다.
가산창은 진주, 곤양, 하동, 단성, 남해, 사천, 고성 서북면, 의령 서남면 등지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요즘 말로 택배물류기지라 봐야 하겠지요. 지금이야 항공, 철도, 고속도로를 이용하지만 당시로서는 배를 통한 물류가 활발하였으니 당연히 바닷가였습니다.
가산창은 1890년대를 기점으로 조운제도가 폐지가 되면서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 1890년대인 1894년 삼도수군통제영과 수영의 해산, 1896년 역과 찰방이 폐지됩니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가 이루어지고, 1912년 이후 지적도 조사가 이루어집니다. 이 시기가 대략 20년 정도됩니다. 그사이 뭔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국유지의 땅은 민간에서 땅을 불하를 받았는지 무단점령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민간인들이 국유지를 가지고 있고, 일본은 헐 값에 불하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보유한 땅 중에 제법 많은 땅들이 국유지인 것들이 보이더군요. 

왜 제가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가산창이 있는 곳은 진주가 아닌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입니다. 이 가산리에 가산창이 있다고 하는데 암만 찾아봐도 국유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최고로 넓은 땅이 가산창이겠다 싶어서 지적도에서 찾아보니 가산리 1048번지더군요. 지목은 임야로 나와 있습니다. 1048번지 옆 1036번지, 917번지는 지목이 대지로 나와 있어서 포함시켰습니다. 이곳이 가산창의 창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더군요. 가산창 옆 도로를 현재의 지도에서 보니 조창길이라고 하는 것 보니 가산창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으로 계산을 하니 대략 1,500평정도 나옵니다. 다만 현재 창원시 마산에 있는 마산창은 대략 4,300평 정도 나옵니다. 그에 비해 규모가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55, 918, 916, 911, 014, 912, 1058, 1056, 1057, 1059번지 들이 다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서부 경남에 있는 세곡들이 모이는 규모치고는 작은 것은 아닌가 추정해봅니다. 추정만 하는 것이고, 보다 정확한 것은 다른 분들이 조사를 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가산창이 생기기전에 장암창이 생겼는데 그 시기가 1660년입니다. 이곳은 가산창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데 직선거리 1.8km 정도됩니다. 현재 주소로는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입니다. 여기는 해창이라고 하며 해창길이라는 도로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사천문화원에서 세운 장암창지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현재는 사천시이고 당시는 진주목 땅이었습니다.

장암창에 관하여는 이곳을 클릭하세요.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위치이기도 합니다. 사천은 공항이 들어서면서 바다가 매립이 되었고, 고속도로가 지나가면서 외딴 섬 형식으로 된 곳이 장암창이 있는 구호리, 예전에는 사천으로 가기 위해서는 구호리서 중관리로 거쳐 사천을 갔는데 지금은 공항이 들어서버려 삥 둘러 가야하니 선뜻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구호리와 마찬가지로 가산창이 있는 가산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세곡선이 드나드는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한적한 시골입니다. 
축동면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천으로 편입이 되었고, 현재는 사천시 축동면입니다. 고려시대 통양창, 조선시대 장암창 → 가산창으로 이어지는 곳이 사천이었습니다.
조창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지 이곳에서 오광대가 전해지고 있는데 바로 가산오광대입니다. 이런 곳은 시·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미지출처 : 1) 근대지도 : 다음 지도 필자 채색
              2) 1910~30년대 지도 :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3) 지적도 :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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