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량(梁) 임진왜란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지난 영화 <명량>에 이은 2번째 영화이며, 앞으로 나올 영화는 <노량 죽음의 바다>라고 합니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견내량에 있는 왜선을 한산도로 유인하여 섬멸해버리는데요. 명량, 견내량, 노량에 나오는 한자는 량(梁)입니다.

대체로 량(梁)은 들보 량으로 강과 강, 바다와 강, 바다와 바다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을 량이라 사용합니다. 한문으로 사용하는 교량(橋梁)이면 잘 알죠. 량을 또 다르게 사용한다고 하는데 우리 말로 좁은 곳이라 해서 '목'이라 한다고 합니다. 길목과 골목이 대표적인 것이지요. 명량의 경우 울돌목이라고 하고, 강화 손돌목이라고 하는 것도 량과 목은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량을 사용하는 도시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양산(梁山)이지요. 량산이라고 하지 않고 양산이라고 하다 보니 들보 량(梁)과 상관이 없을 것 같다고 여겨지지만 양산(梁山)의 량(梁)은 들보 량이 들어가지요. 양산은 예전에 양주(良州)라고 불리었지요. 양주(良州)에서 양주(梁州)로 바뀐 것은 고려 940년(태조 23)이라고 합니다. 양산에는 양주동(梁州洞)과 소주동(召周洞)이 있습니다. 

일단 경남과 부산에 있는 량(梁)이 들어간 곳을 보면 양산 제외, 서측부터 보면 노량, 적량, 구라량, 사량, 가배량, 착량, 견내량, 칠천량, 고리량, 돌돌개, 취량, 초량입니다.

노량은 잘 아시니까 패스하고 적량(赤梁)이 나오는데요. 창선도에 있는 적량진성(赤梁鎭城)과 관계가 있습니다. 세종 21년 1월 16일 "경상도 남해현(南海縣) 적량(赤梁)에 강어구가 협착하여 방어하기에 마땅하지 아니하오니, 적량의 병선을 지도포(池島浦)에 옮기게 하소서."로 나오는데 적량은 당시 진주목이 아닌 남해현 소속이었습니다.

1455년(단종 3) 윤6월 5일 “남(南)으로 적량 수로(赤梁水路)와의 거리가 30여 리나 되며”라는 적량수로가 나옵니다. 적량이 현재의 수군진이 아닌 수로임이 나옵니다. 따라서 적량진이 옮겨오기 전에 있었던 적량이라는 지명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구라량은 삼천포와 창선도 사이의 해협을 이야기하고, 이 부분은 자료가 많이 남겨져 있어요. 사량도에 있는 사량(蛇梁)은 상도와 하도 사이에 있는 해협을 이야기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가배량(加背梁)입니다. 가배량진성(加背梁鎭城)이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에 있는데 엉뚱한 곳에 있어서 이상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1418년(태종 18) 경상좌도 염포(鹽浦), 경상우도 가배량(加背梁)에다 각각 왜관(倭館)을 설치한다고 나오는데 가배량은 거제가 아닌 고성(固城)으로 나옵니다. 즉 고성에 있는 가배량에서 왜관을 개항하였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1년 뒤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개항장은 폐쇄합니다. 1420년(세종 2) 오아포(烏兒浦)에 만호진을 설치합니다. 이후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1423년 부산포와 내이포(웅천), 1426년 염포에 개항을 하는데 가배량은 개항을 하지 않습니다. 1465년 (세조 11) 오아포 진성을 축성합니다. 
오아포에서 가배량으로 바뀌는 것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489년(성종 20) 한성부 우윤 성숙(成俶)이 아뢰기를, "청컨대 진군(鎭軍)을 고성(固城)에 설치하고 만호(萬戶)를 가배량(加背梁)에 두게 하소서." 하는 장면이 나오고, 가배량(加背梁)은 본진(本鎭)과 거리가 겨우 20여 리(里)라는 구체적인 거리가 나옵니다. 고성읍치에서 20리가 되는 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아뢰기를 “‘고성에 읍진(邑鎭)을 두고 가배량에 만호(萬戶)를 두어서 불의의 사변에 대비하는 것이 적당하다.”나오며, 1489년까지는 가배량이 고성 땅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가배량이 다시 등장하는 시기가 1751년(영조 27년)입니다. 거제의 장목·조라·옥포·지세·율포·소비포·가배량 7진은 모두 한 조그마한 고을 안에 처하여 실로 중첩되고 긴요하지 않은 개탄스러운 점이 있으나,.. 생략.. 

위에서 나온 것 때문에 가배량은 고성만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전의 가배량진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현재 통영시 도산면 도선리나 오륜리 부근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글 남겨주세요. 

조선시대 진(鎭)이 옮겨가면서 지명이 바뀐 곳이 여러곳입니다. 구조라의 경우 원래 조라진이었는데 조라진이 현 옥포1동 옥포중학교로 옮겨가면서 예전 조라진이었다고 해서 옛 구(舊)를 사용하여 구조라로 사용중에 있으며 원래 영등포진이 있었는데 이 영등포진이 장목면에서 둔덕면으로 옮겨가면서 구영등포를 줄여서 구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율포진이 옮기면서 예전 율포진은 율천이 되고 현재 율포리는 옮긴 율포진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것 말고 우리가 잘 아는 삼천포의 경우도 구 삼천포 지역이었는데 거리가 워낙 멀리 떨어져 가서 그랬는지 구 삼천포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삼천포로 사용중에 있습니다. 새롭게 왔던 삼천진은 삼천진으로 사용하였다가 1894년 페현이 되면서 현재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로 사용중입니다. 이 경우는 구 진이 사용하는 특이한 케이스라 봐야 할 것입니다.

착량(鑿梁)은 통영과 미륵도(彌勒島)사이를 이야기하며, 견내량(見乃梁)은 통영 용남면 장평리와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사이를 이야기합니다. 칠천량((漆川梁)은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와 칠천도 사이 해협을 이야기하고, 고리량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와 구복리 저도 사이를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은 검증이 되지 않은 것인데요. 돌돌개입니다. 여기는 현재 소모도와 진해해군기지사령부 사이를 이야기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梁이라는 한자로 표기된 부분을 가야어로 된 소리가 '돌'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필자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천장지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맞다면 돌돌개라는 것이 “돌이 구를 정도로 물살이 세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면 예전의 선조들이 이야기한 돌이 구르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고 하여 돌돌개라고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어디가 맞는지 모르고, 좀 더 알아봐야 할 사항입니다.

그 다음이 취량(鷲梁)인데요. 취량(鷲梁)은 현재는 없습니다만 김해읍지에 등장하는데 명지도 위에 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취량도(鷲梁島)와 명지도(鳴旨島)사이를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이 초량(草梁)입니다. 삼포왜관이 끝난 후 왜관이 자리 잡은 것이 초량(草梁)인데요. 영도와 광복동 사이에 있었던 해협을 초량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현재 있는 초량동은 원래 초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량동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량(梁)이 들어간 곳이 많이 있습니다. 진도와 해남 사이의 명량도 있지만, 여수의 진례량(進禮梁), 내례량(內禮梁), 거문도의 소흘라량(所訖羅梁), 경기도 화성 화량(花梁), 서울의 노량(노량진 鷺梁津) 등이 많이 있습니다.
 
똑 같은 량(梁)인데 량(良)과 헷 갈릴 때가 있습니다. 필자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게 한문으로 적어 놓은 것이 아니고 한글로 적어 놓았다면 10중 팔,구는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량(梁)은 해협 사이 물살이 빠른 곳에 사용한다면, 량(良)은 어질 량자이다. 마량면(馬良面)에 있는 마량리는 고금도 앞에 있다. 그래서 고금도와 마량면 사이에 있는 해협이 마량(馬梁)인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馬良). 

마량보다 더 유명한 곳은 삼랑진(三浪津)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랑(浪)은 물결랑입니다. 서울의 중랑구(中浪區)는 중랑천 때문에 사용된 지명입니다. 량(梁), 량(良), 랑(浪) 헷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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