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조병갑(趙秉甲 1844~1911)입니다. 조병갑의 학정은 동학 농민 혁명의 발단이 된 인물로 드라마에서도 조병갑이라는 인물이 등장을 하죠.
조병갑은 천안군수(1882년), 보성군수(1885년), 풍기군수(1886년)로 부임하려다 병이 난다고 하여 함양군수(1886년)로 부임. 김해부사 (1887~1889), 1899년 영동 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병이 있다고 하여 고부군수로 바꾸어라고 명령, 1892년 고부 군수로 임명, 1897년 법부 민사국장 임명, 1898년 법부민사국장 겸 고등재판소예비판사 임명,
조병갑은 김해부사 (1887~1889)를 역임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고종 24년(1887년) 행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인 이규안(李奎顔)이 당시 관찰사 이호준(李鎬俊)과 같이 의논해 근무성적을 올립니다. 이규안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는 조병갑에 대하여 “염명(廉明)하고 공평(公平)한 데다 다스리는 법규에 숙련 되었다”고 기록하였음.
그 다음해인 고종 25년(1888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민경호(閔敬鎬)는 관찰사 이호준(李鎬俊)과 같이 의논해 근무성적을 올립니다. “이 고을은 본래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했으나 그의 훌륭한 솜씨에 힘입었음” 또 12월에는 “온갖 정사를 시행할 적에 전후의 규모(規模)가 한결같았음”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 자료를 보면 조병갑은 근무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조병갑은 하동군수로 역임하여 선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 자료는 제가 못 찾겠네요. 혹 아시는 분 있으면 글 남겨주세요. 일단 조병갑은 셀프로 영세불망비를 세웁니다. 하동, 정읍, 천안, 함양 그리고 김해에서도 영세불망비를 셀프로 세웁니다. 문제는 조병갑 자기 것만 한 것은 아니고 태안군수를 지낸 아버지(조규순 趙奎淳)의 선정비를 세웁니다. 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도 선정비를 세우는 판국이니... 백성들이 마음에서 스스로 움직인 것이 몇 개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함양에 있는 조병갑 선정비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습니다.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케하고 봉금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사심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1887년) 비를 세웠다.” 라고 말이죠.
조병갑의 선정비는 현재 2기가 남아 있는데 함양과 천안에 있다고 언론에 소개 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빌런인 조병갑이 자기가 부사로 역임한 김해에도 영세불망비를 세우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김해에서도 조병갑은 영세불망비를 세웠습니다.


▼ 바로 조병갑의 영세불망비입니다.


현재 조병갑의 영세불망비는 김해시 생림면 행정복지센터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 생림면행정복지센터에는 조병갑의 영세불망비와 함께 다른 비석 4개 총 5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셀프로 비석을 세우는 것처럼 역대 대통령들이 스스로 훈장을 주는 셀프 수여하고 있죠. 예나 지금이나 셀프는... 다 그런 거지예~
함양에서는 조병갑 선정비에 대해 철거를 하자는 이야기와 그래도 아픈 과거를 기억하자는 뜻으로 철거는 하지 않고, 함양 역사공원에 세워져 있습니다.
김해에 있는 선정비들은 김해문화원에 모셔 놓았습니다. 김해문화원에서는 해마다 부사선정비 헌다례(獻茶禮)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조병갑 영세불망비는 김해문화원에 있는 부사들이 선정비에는 못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또 어떻게 조병갑 비만 이곳 생림면으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병갑은 나중에 1898년 법부민사국장 겸 고등재판소예비판사 임명이 되어 동학 2대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재판장은 조병직, 배석판사가 조병갑이었습니다.
조병갑은 잘 살았으며, 조병갑의 증손녀는 조XX은 잘 살고 있습니다. TV에 몇 번 나오고, 모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생림면에 있는 비석들은 훼손이 되어서 그런지 상태가 안 좋습니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