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9월 24일 김해·부산·동래 등지에서 합세한 왜적 2만~3만여 명이 김해를 떠나 창원으로 진군함으로써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적군을 지휘한 주요 장수는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치(木村重玆),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등이었다. 이들은 9월 25일 2대로 나뉘어 노현(露峴)과 안민현(安民峴)을 넘어 들어와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 칠원 현감 이방좌(李邦佐)의 군사를 물리치고 9월 27일 창원을 점령하였다. 라고 인터넷에 많이 나온다. 여기서 안민현은 지금의 창원시와 진해시 경계에 있는 안민고개라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노현은 과연 어디일까? 고지도를 보면 노현이 나오는데 광여도의 창원도호부지도이다. 우측 자여 옆에 노현이 나온다. 그리고 성주사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9월 24일 일본군 2만명은 김해성을 출발하여 창원성을 향했는데 창원을 지키고 있던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일본군이 진출할 노현으로 병사 2,000명을 데리고 나가 진을 치고 적을 맞아서나 중과부족으로 창원성으로 후퇴하였지만 창원성을 지키지 못하고 진주로 후퇴하였다. 25일에 창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26일에 함안으로 진출한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경상우병사 유숭인과 경상우병사들이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은 일본군의 진출도입니다. 신방리라고 표시된 곳을 보면 저수지들이 보입니다. 그곳중 큰 곳이 주남저수지인데 이곳에서 유숭인이 일본군을 기다렸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봉림사와 성주사 사이에 있으며 봉림사와 가까운 곳은 제가 표시한 곳이 노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 창원은 임란당시 도호부였으나 임란시 창원민들이 왜적을 맞아 한치의 물러섬 없이 방어를 하고 장렬히 전사하여 1601년 선조34년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이 됩니다. 임진왜란당시 1592년 5월 31일 성이 함락이 되고, 1592년 10월 31일(모두 양력기준) 유숭인이 이끄는 경상우병사들과 함께 지키다가 두번째로 함락이 됩니다.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그 동안 해체되어 각기 타지역으로 흩어진 군졸들을 다시 수습하여 창원읍성을 수복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불리한 병기와 병력의 열세로 인하여 대패하고 말았다. 현재 남아있는 창원읍성의 동쪽 성곽으로 창원시에서는 창원지명 600주년을 맞아 창원읍성 동문지를 복원한다고 합니다.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부사(府使)를 겸하고 있는 동안 종군(從軍)한 아전과 백성들 중에서 한 사람도 왜적에게 투항한 사람이 없었다. 체찰사(體察使)의 장계(狀啓)로 승격된 것이다.
덧글
노현은 님이 고찰하신 지점이 맞습니다.
지금 이 고개의 아래로는 고속국도 10호선이 개설 운용되고 있지요.
지금도 고개 위에는 옛길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김해 쪽에서 육로를 이용해서 창원으로 진격하려면 당연히 이 고개를 넘을 수 밖에 없죠.
바로 이곳이 옛 자여도에 속한 성법역에서 자여역으로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여역을 거쳐 신풍역(동읍 용전리 신풍골 장승백이)을 지나 신풍고개(달리 동문고개라고도 함)를 넘어면 바로 창원도호부성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웅천을 거쳐 우회하는 침투로는 안민고개일 수 밖에 없죠.
그곳도 김해에서 적항역(김해시 장유면 관동리)-웅천현성-보평역-팔현-안민고개를 넘어 대체로 지금의 국도 25호선을 따라 창원읍성으로 들어 왔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