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포해전 임진왜란



웅포는 진해시 웅천읍성이 있는곳에 있다. 밑에 있는 사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옥포해전을 비롯해 한산도해전, 부산해전까지 승승장구하였지만 아직도 일본의 세력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이는 일본의 수군의 배가 많은 것도 이유가 되지만 조선군의 함선이 많이 부족했기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부산포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군은 재무장 강화되어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호남지역 내륙으로 진출하고, 해상으로 병진하기 위해 웅포연안에 전선 115척에 수군 1만여명의 전진기지를 설치하였으며, 부산포에는 또 다시 500여척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옥포의 적 수군이 부산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한,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부산출격이 불가능하며, 또한 부산으로 추월공격을 한다해도 일본수군의 양면 협격을 당할 경우, 열세한 통합함대가 중과부적으로 역공을 당하여 대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순신은 웅포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2월 6일 낮12시 42척의 전선으로 인솔하고 출범하였다. 2월 7일 남해도 남단 미조목을 거쳐 사량도에서 일박하고 2월8일 정오에 견내량에서 이억기함대 전선 40척과 원균 함대 전선 7척과 합류하여 통합함대 편성을 하였다. 총함정 세력은 89척이었다.

▼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이 기동로이고 웅포해전을 치루고 대부분의 유박은 거제 송진포입니다. 나머지는 송도에서 사화랑으로 사화랑에서 제포를 가는 것을 표현하였습니다.
통합함대는 2월 8일 오후에 견내량을 출범하여 저녁 늦게 칠천도의 외줄포(외줄포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더군요. 견내량전투에서 패한 지역이 외줄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에 당도했다. 일기불순으로 2월 9일과 10일은 해상기동이 불가능하여 계속 그곳에서 유박 하면서 작전계획을 검토했다.

웅포지역은 웅천읍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웅포를 가기위해서는 ㄷ자의 웅천왜성(남산왜성)과 지금 전망대가 있는 곳(백석말이고 지금은 남문전망대)을 지나가야하나 그 폭이 600미터 내외로 조선수군의 주력인 판옥선들이 진을 형성하여 들어가기는 불리하였다. 폭은 600미터이지만 뱃길이 진입할 수 있는 거리는 200미터 내외이고 웅포가지의 거리가 1.5km인데 좁은 수로의 폭으로 형성되어있어서 접근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왜군은 웅천왜성과 반대편 능선(백석말)에서 조총으로 무장하여 이동하기가 불리하였다.
예전 웅포지역으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웅천1동과 남문동일대이다. 아래에 보이는 곳이 웅천만이다.바로 앞에 보이는 산이 남산으로 남산왜성(웅천왜성)이 있었던 곳으로 일본군들이 조선수군을 향하여 조총을 발사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순신 통합함대는 주력을 송도 서측 해안에 결진 대기케 하고 수심이 깊은 밀물때를 이용하여 7∼8척이 교대로 진입하여 유격전식 전법으로 장기소모전을 펴면서 적을 격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웅포해전은 8대 해전중 최장기전으로 무려 1개월간 계속 되었는데, 2월 10일, 12일, 18일, 20일, 22일, 28일 그리고 3월 4∼6일의 7회에 걸친 맹공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 지금의 웅천만은 웅천왜성앞부터 수도까지 매립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예전의 웅천만과 많은 차이가 납니다.
기간중 해전은 2월 18일 웅포에서 5척, 3월 4일 저도(거제도)에서 8척, 3월 5일 저도(거제도)에서 17척, 3월 6일 청승에서 21척, 도합 51척을 당파 분멸하였다. 국내사료에는 구체적인 일자별 전과가 없이 20여척으로 돼있으나, 일본사료에는 피해를 일자별로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웅포해전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마지막 단계인 2월 22일에는 이순신이 최초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다는 사실이다.

▼ 웅천만에는 진해시 요트계류장이 있는데 보이는 마을이 와성마을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순신은 수륙병진 공격을 주장해왔는데, 웅포일대에는 그 당시에 적 육군 1만 6천여명의 대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부산포 해전이후 관하에 1,600여명의 승군과 의병으로 하여금 적 접근예상 통로를 차단·방어케 하고 있었던 바, 웅포의 적을 포위 섬멸키 위해 이들 중 1,100명을 2월 22일 남양리(웅포 동쪽)에, 600명을 제포(웅포 서측방)에 각각 상륙시켜 수륙 3방향에서 포위공격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림에도 설명하였지만 웅포주위에 왜성이 많이 있어서 왜군들의 입장에서는 수비를 하기가 좋았다. 또 왜군의 입장에서는 물러 설 수 없는 위치적, 지리적 특성때문에 1만6천여명이 포진 하였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는 웅천왜성,웅천읍성,제포성, 왜성이 있어서 수비에 대한 부담을 들기가 편했을 것이고, 또 웅천도요지에서 도공을 데려가기 위해서는 물러설 수 없지 않았을 까 생각이된다.

녹색선이 이순신함대의 수륙병진공격 이동로입니다. 그리고 파란색으로 된것이 일본수군의 방어방법이지 않았을까 해서 그려본 것입니다.
▼ 해동지도에 있는 웅천현의 모습으로 웅천읍성과 웅천왜성, 제포성이 잘나타나있다. 그림지도 왼쪽끝이 지금의 진해기지사령부가 있는 곳이고. 제포성에서 왼쪽옆에 보면 사화랑이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위 구글인공위성지도에서 보는 웅천왜성과 반대편 남문동 산등성이와의 간격이다. 위애서 설명하였듯이 웅천만의 입구는 600미터정도 된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건 구글인공위성에서 측정한 값이다. 하지만 해동지도를 보면 600여미터보다 더 좁아보인다. 그리고 웅천만안에 상당히 다양한 굴곡진 바다가 보인다. 예전에는 웅포만의 저런모양이었을까?
▼ 대동여지도 중 웅천현에 관련된지도이다. 여기도 보면 웅천만이 복잡하게 보인다. 이에 대한 답은 밑에 보시면 나옵니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 광여도의 웅천계이다. 이곳도 조금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송도입니다. 송도는 웅천만 입구에 있고 수도라는 섬위에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도 그렇고 광여도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구글어스와 각종 지도를 보면 송도는 수도보다 밑에 있습니다. 그러면 지명이 바뀐 것일까요? 아니면 섬이 옮겨진 것일까요? 섬이 옮겨질 수는 없을 것 같고.. 아무튼 이부분은 조금은 미스터리네요.
지도 이야기는 생략하고 이순신장군이 2월 22일 상륙전을 펼치기 전에 유박을 했던 곳이 사화랑이다. 사화랑은 지금의 명동으로 명동앞에 있는 섬이 음지도인데 지금 현재 음지도에는 진해시 해양박물관(함상공원)이 있다. 역사적으로 봐서 함상공원이 있을만한 이유가 된다. 사화랑은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던 곳으로 그곳에 왜군은 사화랑산왜성(일명 명동왜성)을 짓는데(임진왜란때 성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언제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웅포해전이 끝나고 만들어 졌을 것 같습니다. 바로 산위에 있는 왜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유박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이 있었습니다.

▼ 웅천만에서 남문동방향을 바라본 모습으로 기록에서는 산이 끝나는 지점에서 조총으로 사격을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백석말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불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곳에는 남문전망대가 있습니다. 다만 웅포해전관련 전망대는 아니고 신항만공사 전망대입니다.
이때 판옥선이 89척이 되었으므로 송도에 대기하는 동안 1,600명의 상륙군을 지정된 표구에서 탑재 수송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판옥선은 길이 35m 폭11 m의 2층 갑판으로 된 배수톤수 90톤의 대형함 이었으며 갑판만의 넓이가 90평이 됐 던바 상륙군 800명 이상의 탑승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며, 선수와 좌·우현에 창문이 나와 있어 접안상륙시 출입이 가능한 개폐램프(ramp)도 있었던 것으로 사료에 나와 있다.

▼ 남문전망대에서 웅포가 있었던 곳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2월 22일, 웅포를 공격한 공격함대는 화포로 많은 적선을 파괴했고, 상륙한 의병과 승병은 다수의 적을 무찔렀다. 이순신의 당시 장계를 보면 상륙군의 결정적인 역할과 활약상을 알 수 있다. 「...... 의 승병들은 창을 비끼고 혹은 활과 총통으로 종일 돌격전을 감행하여 무수한 적을 쏘아 죽였다. 비록 참두는 못했다해도 우리 군사는 부상당한 사람이 없었다.」 이날 수륙합동작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적 수군과 육상의 육군을 완전 격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남문전망대에서 웅천왜성이 있었던 남산방향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위 고지도의 기준으로 하면 제2남산입니다.

2월 22일 웅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수로를 이용해야 했는데 이는 사화랑에서 제포까지 거리가 가까운이유도 있었지만 사화랑에서 제포까지 산들이 막혀있어서 육로로 갈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화랑에서 제포까지는 5리 정도되고 조선수군의 배로 이동을 해도 30분안에 도착할 수 있다. 조선군들이 제포에 상륙을 하고 적을 공격하기위해서 간길은 제포에서 제포성방향이다. 조선수군이 삼포왜란때 왜군이 갔던 그길로 똑같이 갔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인 이유이다. 제포성과 삼포왜란을 참고하시면 답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 남산과 수도입니다. 사진을 찍었던때는 2007년 5월경 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때 보다 많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겠죠.
특히 적 수군은 통합함대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목책을 설치하여 당파 당하지 않도록 아군함의 기동을 저지했고,( 목책은 바로옆 제포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출입하는 선박을 관리하기 위해서 였다면 웅포에는 조선함대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다고 봅니다. ) 양안(남산과 백석말)의 조총진지에서 사격으로 엄호하였다. 만약 이때 대규모의 조·명연합 지상군이 배후에서 포위공격을 병행했더라면, 독 안에 든 쥐처럼 갇힌 적을 해안선으로 밀어붙여 일망타진할 수 있었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순신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꾕과리까지 쳐야하니, 조정의 전쟁지도 역량부족은 물론 야전군 총사령관격인 도체찰시나 도원수가 무관이 아닌 문관으로 임명되어 있었으니 입체적인 연합·합동작전을 지휘 감독할 수 있는 자질이 되지 않았다.

남문전망대에 있는 아치형다리를 건너서 올라가면 수도,송도 등의 섬들이 다보인다.
명군의 합류를 했다면 제포에서 웅천왜성방향과 웅천읍성방향 두방향으로 들어간다면 왜군의 입장에서는 세군데를 막아야 하기때문에 곤란했을 것 같습니다. 웅포방향으로 오는 조선수군과 양갈래로 오는 명군과 조선군을 막으려면 병력이 분산해야하기 때문일 것 같네요. 다만 명군이 합류했다고 해서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이는 지휘체계 문제도 있고 명군의 소극적인 자세도 이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 남문전망대에서 바라본 안골입니다. 예전에는 안골포죠. 유명한 안골포해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순신 통합함대는 2월 28일 일단 칠천도의 외줄포로 물러서서 부대를 재정비 한 다음 주력을 이곳에 두고서 일부 공격부대로 하여금 2월 28일 당일은 물론 3월 6일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칠천도와 외줄포로 이순신함대가 간 이유는 임진왜란동안 조선수군의 숙영지이기도 하지만 밑에 사진을 보면 육안상으로 거제도에서 웅포가 보이고 웅천왜성에서도 거제도가 보입니다. 사화랑에서 철수했던 원인이 일본군의 병력들이 사화랑을 넘어서 기습공격때문이었을 것 같기도합니다.

이순신이 건의한 바 있는 조·명 연합군의 공격기동을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고, 온다던 명나라 수군은 나타나지 않으며 농민들의 파종시기가 늦지 않아야 함으로 3월 10일 웅포해전을 마감하고 본진으로 귀환하였다. 무려 1개월이 넘는 장기원정 작전으로 장병들의 피로는 극도에 달했고, 모든 군수지원 문제도 벽에 부딪혔다. 더 이상 적의 영향권내에서 머무를 수가 없었다.

▼ 남산에서 바라본 웅천만 입구로 신항만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1개월여의 7회에 걸친 장기 지구전에서 이순신 통합함대는 적선 51척을 당파·분멸 했으며, 적군 2,500여명을 수륙협공으로 사살한 대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순신이 웅포해전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승리를 얻는 동안 다행히 2월 12일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적은 더 이상 서울을 사수하지 못하고 4월 18일부터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웅포해전은 포구에 정박해 있는 일본수군이 꾀임에 말려들지 않아 해상결전을 벌일 수가 없었던 어려움이 이순신에게 있었다. 그러나 2월 15일, 순찰사 권율로부터 「명군이 곧 수군을 파견할 예정이니 기대하라」는 소식이 전해왔다. 동시에 2월 1일에 명군이 서울을 함락시켰다는 기별도 포함돼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장기지구전으로 웅포의 적군을 무찌를 복안을 굳힌 것이다. 그리고 2월 17일에는 「도주하는 대군을 전부 죽이라」는 조정의 특별지시가 하달되었다.

수도와 세꼬지섬 수도는 이제 완전히 섬이 아닌 육지가 되었다. 뒤에 보이는 곳이 거제도입니다. 한눈에 들어오기때문에 거제에서 이순신장군함대가 출동하면 웅천읍성에서 보면 이순신함대의 모습이 보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출전한지 1개월이 된 3월 6일 통영쪽으로 도주한 일본배 40여척을 추격하여 이중에 21척을 당파·분멸하는 기간중 최대의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밤 명군의 도사(都司) 담종인(譚宗仁)으로부터 일본수군을 더 이상 공격하지 말라는 해전금지 지시가 하달되었다. 이 공문은 같은 날 선조에게도 전달됐는데, 이순신은 격노하였다. 이때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교섭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고니시(小西行長)가 웅포 군영에 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웅포해전을 종합 정리해 본다.
웅포해전 기간인 2월 22일부터 29일까지의 1주일간의 진주성 제2차 전투에서 조선군 9천2백여명과 민간인 6만여명이 9만 2천여명의 일본군 공격을 받고 모조리 살륙 당하는 엄청난 패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전라도의 관문인 진주가 함락되었지만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전라도 해상을 철벽수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웅포해전은 별로 중요한 해전이 아닌 것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명·일 강화 교섭기에 행하여진 중요한 일전이었다. 특히 선조가 이순신에게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기 상당기간이전에 정식명령에 모든 수군을 총동원하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봐 3도 수군통제사 직제를 창설할 구상을 하고 있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 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말라」(片帆不退)는 강력한 왕의 지시는 적의 퇴로차단과 추격소탕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바, 이순신은 최장기간인 1개월 3일간의 힘겨운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의 작전권을 쥐고 있는 명나라 군대가 일본과의 강화교섭을 진전시키기 위해 육군은 물론 수군에게 전투중지 지시를 하달함으로써 분통이 터지는 일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휴전도 원치 않은 방향으로 진전되었으니, 결국 휴전협정 조인시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협정문서의 서명자로서 포함되지 못한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순신의 웅포해전은 도요도미의 특별명령에 따라 적 수군이 웅포에 구축한 해상전진기지 겸 육상전초기지를 반신불수로 대파함으로써 일본과 명나라간의 강화협상에서 조선에 불리한 조건들을 일방적으로 일본이 관철치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요도미의 조선 입국을 저지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웅천해전이 진행중이던 1593년 2월 27일 서울에 모인 일본장수 15명은 논의 끝에 다음사항을 결정했던 것이다.
① 식량이 부족하므로 부산까지 철수한다.
② 부산에 가서 도요도미에게 건의하여 본국 철수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후 3월에 서울에 왔던 도요도미의 특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선현지 주둔군 장수들의 의견을 수렴한 건의문을 갖고 귀국한 것이다.

① 병사들에게 잡곡밥을 먹이면 4월 11일까지는 견딜 수 있다.
② 서울까지 식량추진이 불가능하다.
③ 전라도를 치는 일은 신중한 계획이 필요하다.
④ 전라도와 경상도를 치고 난 다음 해안가에 튼튼한 성을 쌓을 것이다.

이리하여 강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다음사항이 비밀리에 합의됨으로써 명나라는 조정과 수군에게 공격중지 지시를 하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① 일본군은 부산방면으로 철수하되, 명군과 조선군이 도중에 공격 못하도록 보장한다. 일본군도 도중에 약탈과 살인을 하지 않는다.
② 일본군은 서울철수와 동시에 두 왕자를 돌려보낸다.
③ 일본군은 4월 18일 서울을 떠난다

이 정도의 강화교섭이라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이 이순신이 그 동안 이룩한 수군의 전과 덕분이었다.
특히 강화기간중의 웅포해전 승리는 도요도미의 조선 입국을 멈추게 하고 일본군의 서울철수를 불가피하게 강요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물론 2월 12일의 행주산성 전투를 가능케 한 간접적 요인도 됐다.
이순신이 전라도를 지켰기에 권율이 3천명의 의병을 전라도로부터 동원하여 상경할 수 있었고, 충청수사 정질이 판옥선에다 화살과 쌀을 싣고 한강하류에 갖다대어 행주산성의 전투원들에게 추진 보급할 수 있도록 보장한 것 역시 이순신의 전라도해역 제해권 확보 덕분이었다.

내용출처 http://tong.nate.com/optimage/

위의 출처를 기준으로 작성했으며 파랑색으로 된 글은 제가 작성한 것입니다.
위에서 의문을 제기했던 지도와 송도에 대한 의문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도를 남쪽방향으로 놓고 보니 웅천왜성이 있었던 남산과 안골포 왜성이 있었던 곳을 위 고지도에서 아주 좁게 그림을 그려서 웅포만안에 복잡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지도를 거꾸로 보니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송도도 위치상은 수도 밑에 있는 것이 맞지만 그림지도를 그리는 분의 입장에서 남산과 안골포에서 본다면 송도가 육지에 더 가까이 보이는 이유때문에 송도가 수도보다 위에 그렸던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웅포해전에 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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