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읍성 북문지 복원 읍성(邑城)



며칠 있으면 김해시에서 김해읍성 복원공사 중 하나인 북문지가 완공이 됩니다. 완공되기전 먼저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 아래 조감도는 김해읍성 북문조감도로 옹성과 여장, 문루가 잘나타있습니다.
▼ 북문문루 뒷편에서 찍은 사진으로 복원된 성곽이 아름답게 서있습니다. 아직 마무리 공사가 안되어 있어서 마무리 공사중입니다.
▼ 이곳에 주차장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아직 포장이 안되어있습니다.
▼ 2007년 2월에 착공한 북문은 4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서 완공을 하게 됩니다. 문루가 하늘과 함께 멋지게 보입니다.
▼ 성문을 줌인 한 모습
▼ 단청도 아름답게 그려놓았습니다. 김해는 경상도 6개 진관의 하나로 속군, 속현의 병력을 합하여 약 5, 6백 명에서 최고 1천 명을 갖춘 곳이었다고 합니다.
▼ 용두도 만들어 놓으니 그 옛날 읍성의 북문의 위엄이 있는 것 같네요.
▼ 치미와 용두만으로 전체적으로 북문의 위용이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잡상은 보이지가 않네요. 지붕에 올라가는 이러한 다양한 장식기와들은 깔끔하게 지붕을 마감해 줄 뿐만 아니라 화재나 액을 막아준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 체성(여장이 없는 성곽)에서 바라본 문루. 성곽의 길이는 좌측 19m, 우측 19m, 높이 3.5-4.5m의 성곽입니다.
▼ 적들이 옹성을 들어가기 위한 곳으로 옹성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피해를 입고 들어가야 한다.
▼ 처음엔 해자인줄 알았는데 해자치고는 너무 작더군요. 아무래도 그냥 배수구인 것 같습니다.
▼ 옹성과 김해읍성 북면의 모습으로 옹성에는 총안이 있습니다.
▼ 여장과 여장사이에서 활을 쏠 수 있는 공간을 타구라고 하는데 타구가 있고, 여장 밑에 물이 내려오는 누혈이 보입니다.
▼ 김해읍성의 복원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느정도 조선시대의 방식의 성곽을 복원한 느낌이 든다.(아마추어의 관점에서 봤을 경우입니다.) 일단 면석들이 조선시대 축조방식처럼 큰 면석으로 채우고 위로 가면서 작은 면석을 채워서 그런 느낌이 들고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게 축성한 것이 조선시대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하는겁니다.
▼ 김해읍성의 전체길이는 1,950m이며 평지성(平地城)으로 동(海東門), 서(海西門), 남(鎭南門), 북(拱辰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성과 성문은 高宗 32년(1895) 이후 거의 살거되고 현재는 동상동 818번지 일대에 20여m가 남아 있다. 김해읍성은 기록으로 보아 世宗 16년(1434) 石城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임진왜란시 구로다가 이끄는 일본군에 의해 1592년 4월 18일 낙동강 하류에 상륙해 김해성을 격파당 했다. 이후 구로다는 창원, 창녕을 함락시켰다. 이 후 1593년 김해부사에 임명된 이종인인 2차 진주성싸움에서 참가하여 의병장 김천일 등과 함께 방어에 임하였다. 적병이 근접하자 선봉에서 활로써 왜적 수십명을 사살하고, 화살이 떨어지자 창을 들고 적을 무찔러 적의 시체가 산과 같았다고 한다. 혼전 중에 총알을 맞아 전사하니, 나라에서는 호조판서(호조의 으뜸벼슬)와 겸지의금부사에 추증(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하였다. 그뒤 진주 사람들이 충민사(忠愍祠)를 세워 제사지냈다.
▼ 김해읍성은 수시로 침입한 왜구들의 노략질에 대비하고자 조선 세종 1443년에 축조됐다. 김해시가지를 둘러싸고 4대문을 갖춘 성곽으로 축조된 뒤 조선 고종 1895년까지 약 450년 동안 존치됐다 이후 없어졌으나 기록이 조선왕조 세종실록, 김해부내지도 등에 남아 있다.
▼ 임진왜란 당시 김해읍성은 왜군들의 집결지였다. 한산대첩에서 패한 왜군은 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한성 주둔 병력의 일부를 김해로 집결시키고 물자들은 낙동강을 통해 부산으로 옮기고 왜군 2만여 명은 9월 24일 김해성을 출발하여 진주를 향하였다. 밑에 설명하겠지만 지금의 낙동강과 예전의 낙동강의 폭이 달랐고 예전 낙동강은 김해읍성근처까지 흐리고 있었기에 김해읍성이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것이다.
▼ 다음에 완공이되고 나면 여장에서 사진을 찍고 회각로를 통해서 성곽의 규모를 찍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하단부의 면석들을 통해 축성방법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여장안에 있는 총안이 3개인데 가운데 있는 것은 가까운적을 물리치기 위해 설치된 근총안이고 양폎에 있는 총안은 멀리 있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설치된 원총안입니다. 총안 밑에 있는 것은 성곽의 물을 밖으로 빼내기위한 누혈입니다.
▼ 옹성안으로 들어가는 길으로 저도 옹성의 모습은 처음 확인하는 길입니다. 야간 조명을 고려하여 조명이 설치된 것이 보입니다.
▼ 옹성안은 180도 원으로 된 후면과 정면은 일자형의 누각이 있어서 공격자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 문루에는 공진문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누각이 없어진 것은 고종을미 후였다고 합니다.
▼ 성문주위에 있는 돌들이 큰데 이것은 아무래도 방어를 위해서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이겠죠. 성문주위 큰돌을 육축이라고 합니다.
▼ 성문으로 성문앞에 철판을 부쳐서 만듭니다. 이는 화살이나 총탄을 막기 위한 것으로 철엽이라 부릅니다.
▼ 김해읍성안에는 군기청이 있었는데 이곳은 무기를 관리하는 곳으로 활과 총 등의 무기를 관리했습니다. 누각안에는 둥글게 된 총안이 있어서 여기에서도 적을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등성계단을 통해서 성곽을 올라가야 하나 아직 완전히 오픈하지 않은 관계라 올라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 등성계단과 체성
▼ 체성부분이 잘 나타 있습니다.
▼ 김해읍성 북문을 통해 나아가면 김해향교가 바로 앞에 있습니다.
▼ 옹성안에서도 여장이 설치되어 적의 공격을 무력화 시킬 것입니다.
▼ 김해읍성 북문 뒤편에서 바라본 김해시장방면
▼ 김해시는 북문공사를 완료하고 2017년까지 총 사업비 900억원을 들여서 4대문을 다 복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조선시대 김해읍성은 어떤 모양일까요?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김해읍성과 낙동강의 모습으로 지금의 모습과는 조금 틀려 보입니다. 아무래도 낙동강이 예전에는 더 큰 모양입니다.
▼ 김해읍성을 나타낸 김해부 내지도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4대문을 복원한다고 합니다.
▼ 그러면 복원하려는 김해읍성은 어디까지일까요? 김해부 내지도를 기반으로 제가 임의로 추축한 김해읍성의 모습입니다. (김해시에서 추진하려는 성문을 참고로 작성한 것입니다. 동문은 동광초등학교 후문, 남문은 김해농협지부, 서문은 김수로왕 입구근처라고 합니다.) 대략 이정도의 규모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래의 내용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이야기로 읽는 임진왜란 10편 "김해성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네 선비"의 이야기입니다. 진평일님의 글입니다.
임진전쟁이 터지자 부사 서예원(徐禮元)이 송빈에게 중군도총(中軍)의 직책을 맡아달라고 제의하였다. 송빈(宋貧, 1542-1592)은 아들의 만류에도 순수 장정만으로 김해의 사수를 맹세하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중군을 맡아 서예원을 도왔다.

나이 50이던 이대형(李大亨, 1543-1592)은 김해 부사 서예원과 인척간이었다. 부사가 이대형에게 편지를 보내 입성을 청하였다. 그가 장정 백여 명을 이끌고 입성하자 부사 서예원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성의 남문을 맡았다

송빈은 4월 17일 북상하던 왜군이 김해성을 포위하자 기습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김해와 부산 사이의 죽도까지 추격했다. 일본군이 성난 파도처럼 공격을 펼쳐 오자 철수했다.

임진년 4월 18일 아침에 구로다 나가마사의 지휘하는 일본군 제3진이 부산 앞 바다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19일에 낙동강 하구에 있는 죽도에 상륙했다. 원래 계획한 작전 진격로인 김해성을 향해 진군했다.

김해 부사 서예원은 배를 띄워 적정을 탐색했다. 적의 동태를 살피던 조선 정찰병은 일본군 선발대와 마주쳤다. 먼저 일본군은 이 배를 빼앗고, 조총을 쏘아대면서 육상으로 추격했다. 조선의 정찰병들은 활로 응사하면서 김해성 안으로 철수했다.
이를 추격한 일본 제3진 주력군은 김해성을 일시에 포위한 채 공격을 시작했다. 서예원은 성문을 닫고 수성 태세를 갖추고 성 안을 돌면서 종일 군사들을 독려했다.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은 서문을 지켰다. 김해성에는 관군 이외에 인근 백성들이 모두 성 안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수비군에 많은 일반 백성들도 있었다.

그리고 김득기(金得器, 1549-1592)는 일본군이 김해성으로 쳐들어오자 비분강개하여 분연히 일어나 한 줌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입성했다.

일본군과 조선군의 접전은 계속됐다. 낮에는 일본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았다. 성에 포위되어 있는 조선군의 저항은 한 동안은 성공적이었다.

이때 조선군 측의 사기를 더욱 떨어진 사태가 벌어졌다. 성 안의 초계 군수 이유검이 겁을 먹고 먼저 도망하자 다른 군사들도 따라 도망을 쳤다. 이런 혼란스러움 속에서 새벽에 초계 군사는 지휘관마저 없어 저항할 힘을 잃었다.

조선군의 동요를 눈치 챈 일본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은 성문을 열고 난입해 성 안에서는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18일 다시 공격해 오자 진주 부사 서예원은 패전이 확실해지자 이유검을 잡으러 간다는 핑계로 성 밖의 강창포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달아나 버렸다.

선비 류식(柳湜)은 일본군들이 월당진(현 대동면 월촌리)을 건너 쳐들어 온 것을 보고 김해성으로 달려가 중군겸 남문 및 서문장을 맡아 밤낮으로 성을 지켰다. 이미 부사 서예원도 성을 떠난 뒤였다.

부사가 떠난 김해성에서 네 선비는 남아 있는 병사와 백성들을 위로하며 당부하고 독전했다.

그러나 19일 밤에 일본군은 보리를 베어다가 성 밖에 쌓기 시작하였다. 쌓은 볏짚과 보리단이 성곽과 같은 높이가 되자, 그 곳으로 올라가 성 안으로 조총을 쏘아 댔다. 조선군들은 활로 대항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수가 너무 많았다. 20일 일본군은 못을 메운 동쪽에서 방어선을 무너뜨리며 성 안으로 난입해 왔다.

남문의 송빈은 적의 진중 한가운데로 들어가 싸웠다. 북문에 이대형, 동문에 김득기, 서문에 류식 등의 선비를 중심으로 격렬한 백병전을 벌였다. 그들은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일본군의 조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네 선비와 병사들 백성들은 몰려오는 적 수백 명을 베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네 충신은 끝까지 김해성을 지키다 성의 운명을 함께 장하게 순절했다.

또한 이우두(友杜)는 죽은 아버지 이대형의 시체를 찾으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형 대윤(大胤)의 딸은 일본군에게 잡히자 자결하였다. 이 때 참전했던 양업손(梁業孫)이 탈출하여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김해성에서 도주한 죄로 이유검은 참수당하고, 서예원은 삭탈관직 당했다. 이후 서예원은 의병장 김면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김시민을 이어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김해성을 지키다 순국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은 이후 네 충신(四忠臣)이라 하여 순절한 음력 4월 20일에 사충단에서 이 분들을 기리는 제례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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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유진우 2008/04/17 09:22 # 삭제

    잘 보고 갑니다. 그런데 성문이 너무 내측으로 달려있네요. 문루가 홍예가 아니라 더욱 불안한데( 저런 구조는 의외로 화공에 취약합니다 )다 적군의 충차가 성루 아래로 거의 들어와 버리는 단점이 있습니다. 문루 내부 바닥에 힌지로 협문을 달아 끓는 물을 붓거나 돌을 던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닌 이상 저런 구조는 의외로 위험한 구조이기도 하죠.
  • 팬저 2008/04/18 23:47 #

    제가 모르는 부분을 가르쳐 주어서 감사합니다. ^^ 저도 그부분에 관해서는 생각도 못했는데 지적 해주시어서 감사합니다. 다만 북문은 김해부내지도상에 보시면 예전 그림과 유사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 성훈이 아빠 2008/06/10 09:51 #

    진우님이 이곳도 이미 다녀가셨군요..부지런도 하셔라..

    팬저님.. 글과 사진을 보니 김해 읍성 북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어 제가 올린 김해읍성 북문 란에 링크 해 놓겠습니다. 이해해 주시겠죠?

    성훈 아빠 올림
  • 팬저 2008/06/10 12:14 #

    예... 감사할뿐입니다.
  • 네크베트 2009/02/10 14:37 # 삭제

    김해 읍성.. 검색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감사히 구경했구요~

    출처를 밝히고 카페에 올려도 되겠습니까??
  • 팬저 2009/04/30 12:29 #

    예...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0/07/29 04:53 # 삭제

    궁금한 점이 있어서 뒤늦게 질문 올립니다.
    김해읍성의 문들만 복원하는 것인지, 저 성곽 전체 (벽)을 복원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올해 2월에 폭 6미터 깊이 2미터짜리 '해자'가 제대로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해자를 복원하면 훨씬 웅장한 규모가 될텐데, 혹시 복원소식 아시는지요?

    귀찮은 질문드려 죄송합니다. ^^
  • 팬저 2010/07/29 11:26 #

    김해읍성 북문의 경우 복원을 한 것입니다. 보이는 전부를 복원한 것입니다. 성문,옹성,누각,체성,여장 등 전부 복원입니다. 해자 발굴의 경우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북문과는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현재 저도 그곳은 가보지를 못해봐서 뭐라고 답변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남문의 경우 복원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단체장이 바뀌면서 김해시 부채를 줄이기 위해서 비용이 들어가는 민간 사업은 축소한다고 하던데 남문까지 포함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원래 계획은 4대문을 복원하려는 것이고 2020년까지였습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0/07/29 11:48 # 삭제

    자세한 답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4대문이 모두 복원되면 지방 명물로 대단할듯 합니다.
    제 질문은 사실 중간중간 현대시설물들로 끊기더라도 저 4대문을 이어주는 성곽을 모두 복원하는가하는 점이었습니다만, 사진을 보니 그렇게는 못할듯 해보이네요...

    답변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팬저 2010/07/29 19:09 #

    복원을 하려는 단체장의 의지가 있었지만 단체장이 바뀌어서 어떻게 흘러갈지 잘 모르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0/07/30 05:57 # 삭제

    이런 일들은 장기프로젝트로 단체장이 바뀌더라도 이어서 조금씩이라도 해나가는것이 중요한 것인데 말이지요 (유럽의 경우처럼)...

    사람 바뀌면 그냥 '폐지'되는 건 좀 자제해야할듯..... (장기프로젝트는 더 위에서 관리를 하던가)..
    답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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